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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초기 법철학
오캄(William of Ockham, 1287~1347년)이 유명론(Nominalismus)를 주장하면서 자연법은 더 이상 '신성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오캄은 사물의 내부에 '보편자'는 내재하지 않으며, '보편자'라는 것은 개별적인 객체들의 일반화로서 인간이 지은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이름만이 있다고 해서 유명론(唯名論)입니다. 즉 수많은 찰흙 자동차들에 '자동차 모형'이라는 동일한 속성이 내재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수많은 찰흙 자동차들을 보고 서로 유사한 것 같아서 '자동차 모형'라는 관념을 생각해내 이름 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진짜 세상에 존재하는 대상인 것처럼 착각하는 건 문제라는 게 오캄의 주장입니다. 이를 보편자에 관한 논쟁이라고 해서 '보편논쟁'이라고 부릅니다.
오캄에 이르러서 자연법은 자연의 속성을 이성으로 포착해내 발견한 법칙이 아니라, 그저 인간이 고안해낸 것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근대가 시작되었고, 근대의 법은 따라서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서도' 타당해야 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 자연법이라는 아이디어 자체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실정법을 초월해서 무언가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법이 존재는 하고 또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이러한 자연법을 발견 내지는 고안해내는 데 있어서 근대 초기 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정의한 후, 이것으로부터 논리적 추론을 통해 '자연적 권리와 의무'를 도출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 중에서 각 개인들이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상호 간의 권리와 의무를 확정짓는 사회계약을 하게 되고, 또 그게 인간의 본성에 새겨진 것이라는 주장을 일컬어 사회계약론이라고 합니다.
여하간 이 자연법을 도출하는 데 핵심적인 인간의 본성이란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철학자들 마다 견해가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유의미하게 살펴봐야 할 철학자들을 나열하자면, 필수적으로는 사회계약론자들인 홉스(Thomas Hobbes, 1588~1679년), 로크(John Locke, 1632~1704년),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년)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홉스와 루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로티우스(Hugo Grotius, 1583~1645년)를, 로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댕(Jean Bodin, 1530~1596년)의 주권론을 공부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법철학자라기 보다 법학자 내지는 정치학자로 유명한 몽테스키외도 이쯤에서 언급해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로티우스가 이성을 자연법의 인식 수단이 아니라 자연법의 원천 그 자체로 파악했다는 아이디어는 이후 독일의 이성적 자연법론자들에 의해 계수되었습니다. 푸펜도르프(Samuel von Pufendorf, 1632~1694년), 라이프니츠(Gottfried Wilhelm Leibniz, 1646~1716년), 토마지우스(Christian Thomasius, 1655~1728년),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년)가 이에 해당하는데, 이 시기의 독일 법철학을 아주 깊게 공부할 것이 아니라면 이들까지 공부할 필요는 적겠습니다. 국내에 이들을 대중적으로 소개한 좋은 자료도 빈약한 것으로 압니다.
근대의 법철학 : 칸트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법철학은 ≪윤리형이상학 정초(Grundlegung zur Metaphysik der Sitten)≫,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 ≪윤리형이상학(Die Metaphysik der Sitten)≫ 등에서 주로 논의되지만, 자연법론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은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3대 비판서 중 인식론에 관한 저서인 ≪순수이성비판(Kritik der reinen Vernunft)≫에서 암시됩니다.
이제까지 자연법은 사물의 본성에서 도출되는 것으로 봤는데, 칸트는 사물의 본성이고 자시고 인간은 자신의 인식 세계 밖의 '사물 자체(Ding an sich)'도 직접 인식할 수 없다고 봤습니다. 사람이 새를 인식하는 과정을 예로 들면, 사람은 새를 보거나 소리를 듣거나 만지거나 해서 여하간 '감각자료'를 먼저 쌓습니다. 그리고 뇌는 그 감각자료를 태어날 때부터 모든 인간의 뇌 속에 이미 주어진 12가지 범주(kategorie)라는 도구를 가지고 판단(urteil)합니다. 그렇게 판단한 결과로 머릿속에서 만들어진 관념으로서의 '새'는 실제 인식 세계 밖에 존재하는 진짜 '새'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는 인식 세계 속의 '새'만 알 수 있고, 우리 뇌 밖에 있는 진짜 자연의 '새'는 영원히 알 수 없습니다.
이렇게 진짜 자연의 '새'로부터 뇌 속에 그 새에 대한 감각자료를 소화한 결과로 관념으로서의 '새'를 구성해내는 과정은 모두 이성이 아니라 직관이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칸트의 철학을 구성주의(Konstruk-tivismus)라고도 합니다.) 즉 우리는 새를 딱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새'라는 관념을 만들어냅니다. 이성은 직관이 만들어낸 '관념'들을 가지고 사고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 머릿속 관념으로서의 '새'는 진짜 자연의 '새'와 같지 않기 때문에 늘 '착오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새는 참새다'라고 판단했는데, 사실은 비둘기일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이성이 하는 일이란 늘 틀릴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결국 칸트의 인식론은 '인간이 이성으로 사물의 본성인 자연법을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단호하게 주장하는 셈이 됩니다. 이성은 사물의 본성은커녕 사물 자체에도 제대로 닿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칸트는 철학의 관심을 존재, 대상, 객체의 본질을 따지는 것에서 주체의 인식이라는 문제를 따지는 것으로 돌려놓았습니다. 이것을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학문의 줄기를 바꿔버린 사건에 비유하는 취지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Kopernikanische Wende)'이라고 합니다.
그럼 칸트는 어떤 법철학을 전개했을까요? 칸트는 인간 상호 간에 국가라는 상위의 권위체가 없는 자연상태는 평화롭지 않고 투쟁상태라고 봤습니다. 인간은 타인과 비교하고 경쟁해서 이기려하는 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런 상태가 죽음과 폭력이 난무하는 막장인 상황은 아니지만 내 권리가 침해되어도 구제받을 방법이 없기 때문에 '불편한 상태'라고 봤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자 '제멋대로 행동해서 타인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정도의 자유'는 포기하고, 서로에게 적당한 권리를 보장하면서 나도 적당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규율하는 법체계를 갖춘 시민상태로 진입할 동기를 갖게 됩니다. 이로써 사람들은 함께 의기투합해서 공동체를 꾸리게 될 수 있는데, 칸트는 이를 시원적 계약(Ursprünglicher Kontrakt)이라고 부릅니다.
따라서 칸트에게 법적 자유는 개인이 타인의 자의에 의한 금지나 강제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말합니다. 칸트의 도덕철학에서 자유(Freiheit)가 도덕법칙(Sittengesetz)의 존재근거이자 자율(Autonomie)인데 반해, 법철학에서는 소극적 자유를 의미한다는 점을 짚고 넘어갑시다. 이렇게 자유를 정의한다는 전제 하에서, "법은 한 사람의 자의가 자유의 보편적 법칙에 따라 타인의 자의와 조화될 수 있는 조건의 총체(Die Metaphysik der Sitten, Einleitung in die Rechtslehre B = VI230)"를 의미하게 됩니다.
이런 법은 당연하지만 강제력을 가져야 합니다. 법을 어긴 사람은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처벌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불법적 행위를 방치하면, 타인에 의해 권리를 침해당한 사람들이 국가에 의해 구제받지 못하게 되고 저마다 자력구제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곧 시민상태의 붕괴를 의미하므로 국가는 법을 어긴 사람을 처벌해야 하고,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그가 자연상태가 아니라 시민상태에 머물게 함으로써 그의 이익을 위하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법의 강제규범성은 법과 도덕을 구분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입니다.
이 외에 칸트가 ≪영구평화론(Zum ewigen Frieden)≫에서 전개한 국제법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들도 있지만 우선 여기까지만 정리하겠습니다. 종합적으로 칸트는 독일 계몽주의의 라이프니츠-볼프를 위시한 대륙의 합리주의 전통을 수용하면서 데이비드 흄을 비롯한 영국의 경험주의 또한 흡수하며 인식의 본질을 탐구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자연법론을 근본부터 비판하는데 성공하였고, 그 위에 홉스, 로크, 루소 등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종합한 성격의 법철학 내지는 정치철학을 구성했습니다. 하지만 칸트가 진정으로 고평가 받는 까닭 중 하나인 그의 윤리학에 관한 내용은 이 지면에서 거의 소개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만 읽는 것은 칸트의 법철학에 대한 이해도 불완전하게 만들 것이기에 독일 법철학을 깊게 공부할 생각이 있는 사람은 칸트의 윤리학에 관해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