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아보카도인가요?
내 친구 샘은 머리가 곱슬하고 짧은 멕시코계 미국인이다.
샘은 미국 육군사관학교를 나와서 한국에 장교로 파병된 군인이었다.
마침 같은 아파트, 같은 통로에 살아서 거의 매일 보며
집에서 밥도 같이 해먹고 운동도 같이한 형제같은 친구다.
샘은 한국 사람도, 한식도 좋아했다.
집 근처 김밥집에서 김밥과 라볶이를 즐겨 먹었고
미국인에게 최고난이도의 한식인 산낙지도 잘 먹었다.
그렇게 한국을 사랑했던 샘은
Uncle Sam(U.S. 미국 정부를 의인화하여 부르는 말)이
자기의 한국 파병을 연장해 주길 바랐다.
그런 샘도 한국이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고 했는데,
“과일이 너무 비싸다”였다.
샘은 미육군 대위였고 연봉이 1억을 넘었다.
미국은 물가가 비싼 나라에 머무르는 군인들을 위해 보조금을 줬다.
Cost of Living Allowance(생활비 보조금)이라는 이름인데,
미군들은 이것을 줄여서 COLA(콜라)라고 불렀다.
샘의 콜라는 100만 원이었다.
서울의 물가가 미국보다 비싸기 때문에 미국 정부가 돈을 더 준 것이다.
마치 대학교 입학하는 조카에게 돈 쓸 일 많을 거라며
세뱃돈을 유난히 더 많이 주듯이.
샘이 가장 좋아했던 과일은 딸기였다.
우선 그 맛에 놀라고 (미국에서 파는 딸기는 푸석하고 맛이 없다)
그 가격에 더 놀랐다.
콜라를 100만 원씩 받는 샘도 딸기는 특별한 날에만 사는 과일이었다.
샘은 딸기 중에서도 죽향 딸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마트에서 사는 설향 딸기가 아반떼라면 죽향 딸기는 제네시스였다.
그런데 이 죽향 딸기를 과일가게에서 사려하니
가격이 500g 팩에 3만 원, 한 알에 천 원을 넘었다.
샘은 기름값이 싼 텍사스에서 왔는데,
샘이 좋아했던 딸기 한 알은
텍사스의 커다란 픽업트럭을 굴리는 휘발유 1리터보다 비싼 존재였다.
straw(건초, 짚단)+berry(산딸기류의 과일)이다.
우리가 음료를 마실 때 쓰는 빨대가 바로 이 straw(건초, 짚단)에서 유래했다.
빨대가 건초의 속이 빈 대롱과 같은 모양이라고 해서 스트로우라고 불렀다.
water(물)+melon(멜론), 말 그대로 과즙이 많은 멜론이란 뜻이다.
여기서 Melon은 라틴어로 ‘큰 과일’을 뜻하는 melo(멜로)에서 왔다.
수박이 아닌 큰 과일들은 다 멜로라고 불렀는데,
이후에 Melo(멜로)는 이탈리아어로 사과(Mela; 멜라)가 되었고,
스페인어로 복숭아(Melocotón; 멜로꼬똔)가 되었다.
Melo(과일)라는 단어가 어디서는 사과, 어디서는 복숭아가 된 것처럼
같은 단어가 지역에 따라 뜻이 달라지는 것을
Regional Semantic Variation(리저널 시맨틱 베리에이션: 지역적 의미 변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Chip(칩)은 영국에선 감자튀김이고 미국에선 포카칩 같은 얇은 감자칩이다. ,
Biscuit은 영국에선 딱딱한 과자이지만 미국에선 부드러운 빵이다.
한국은 영어의 두 가지 뜻 중에 선택적으로 받아들여서
‘칩’은 미국의 감자칩, ‘비스킷’은 영국의 비스킷 뜻을 따른다.
맛있는 걸 잘 아는 민족인만큼 같은 단어라도 더 맛있는 걸 택한 것으로 보인다.
칩과 비스킷은 맛은 달라도 둘 다 음식을 말하지만,
그 뜻이 전혀 달라지는 단어도 있다.
예를 들어 Rubber(러버: 고무)는 영국에서는 지우개를 뜻하지만,
미국에선 Rubber가 속어로 콘돔이다.
당장 배가 고프냐 안 고프냐 정도로도 내 기분도 몇 번씩 바뀌는데,
하물며 수억 명이 쓰는 언어는 지역에 따라 이렇게 바뀔 수 있다.
Apple은 고대영어 aeppel(애펠)에서 유래했는데, ‘애펠’의 뜻은 과일이었다.
고대에도 지금처럼 사과가 흔한 과일이었기 때문에 과일의 대명사였다.
오늘날의 영어 표현에서 the apple of one’s eye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존재)라는 뜻이다.
예문으로 Her dog was the apple of her eye.
(그 강아지는 그녀에게 사랑스러운 존재다)와 같이 쓸 수 있다.
Kiwi(키위)는 뉴질랜드의 키위새에서 유래했다.
키위의 색깔이 키위새와 비슷하고 털이 송송 난 것도 비슷하여 키위라고 불렸다.
그런데 키위는 뉴질랜드를 상징하는 새라서
Kiwi는 ‘뉴질랜드의, 뉴질랜드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한국의 국민연금처럼 뉴질랜드에도 연금 체계가 있는데, 그 이름이 Kiwisaver(키위세이버)이다.
Save는 ‘돈을 저축하다, 목숨을 구하다’라는 뜻이 있는데,
돈을 차곡차곡 모아 뉴질랜드 사람(Kiwi)을 구해준다는 뜻으로 이름과 의미가 모두 귀엽다.
Coconut(코코넛)은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로 coco(원숭이 얼굴)+nut(견과류)이 합쳐졌다.
코코넛에 어두운색으로 세 개의 구멍이 있는데, 원숭이의 눈과 입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어에서 사람의 성격을 물을 때 이런 표현이 있다.
Are you a peach or a coconut?
(당신은 복숭아에요, 코코넛이에요?)
당신의 성격은 어느 쪽인가?
Peach, 복숭아 같다는 것은 물복숭아처럼 겉에서 눌러봐도 말랑하다는 것이다.
붙임성이 좋아서 이야기를 나누기도 쉽고 상냥한 사람을 말한다.
여러나라들 중에 국민성이 복숭아인 나라는 역시 미국이다.
미국사람들은 친절한 만큼 말을 잘 하고, 많이 한다.
미국인은 금요일 저녁식사 초대를 하면 5시간 정도는 가볍게 수다를 떨 수 있다.
식사 전후로 3~4시간을 이야기하고,
마침내 집에 갈 때 현관문에서 마지막 인사를 하다가
‘어? 그 신발 예쁘다, 어디서 샀어?’라고 물으면
그 자리에 선 채로 한 시간 동안 동네 쇼핑몰 구두 매장 다녀온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미국 사람들이다.
반면에 코코넛은 껍질이 워낙 단단하고 질겨서 무뚝뚝한 사람을 말한다.
좀처럼 웃지 않고 차가워 보이는 사람들, 독일인의 느낌이랄까.
그래서인지 복숭아 미국인들은 코코넛 독일인의 메마른 감정에 대한 농담을 많이 한다.
"A German's idea of a heartwarming moment is when the train arrives exactly on time."
“독일인들의 가슴이 따뜻해지는 순간은 기차가 정시 도착하는 순간뿐이다.”
"Germans don’t do drama—they file detailed progress reports on their emotions."
“독일인들의 감정에는 드라마가 없다. 대신 감정에 대한 절차보고서를 쓸 뿐이다.”
"A German says ‘I love you’ once.
Hitler said it to Eva Braun, and we all know how that ended."
"독일인은 ‘사랑해’라는 말을 한 번만 해.
히틀러도 에바 브라운에게 한 번 사랑한다고 했다가 무슨 꼴이 났는지 우리는 알지.
*히틀러는 1945년 4월 29일에 에바 브라운에게 사랑한다고 하고 결혼했고
1945년 4월 30일에 연합군에게 패배한 것이 확실해지자 자살했다.
‘나는 peach처럼 상냥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coconut처럼 무뚝뚝하지도 않다’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보카도다.
아보카도의 껍질은 부드러운 복숭아껍질과 단단한 코코넛의 껍질의 중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보카도의 약간 단단한 껍질 속에는 아주 부드러운 과육이 있다.
이렇게 처음부터 말랑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절대 깰 수 없는 단단함도 아닌,
게다가 아보카도처럼 부드러운 속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아보카도다.
Avocado(아보카도)는 아즈텍의 Nahuatl(나우하틀)언어에서 유래했다.
아즈텍 사람들은 아보카도를 huacatl(아우아카틀)이라고 불렀는데, 이건 남자의 고환을 뜻했다.
그들은 아보카도와 고환이 생김새가 비슷하다며 이름을 바꾸지도 않고 그대로 불렀고,
아보카도가 정력에 좋다고 믿었다.
이후에 스페인이 아스텍을 정복하고 아우아카틀을 aguacate(아구아까떼)로 바꿔서 불렀고,
영어로는 avocado가 되었다.
Orange는 산스크리트어 naranga(나랑가)에서 유래해
아랍어로 naranj, 고대 프랑스어로 orenge를 거쳐
영어로 orange가 되었다.
스페인어(Naranja), 포르투갈어(Laranja), 이탈리아어(Arancia),
힌디어 नारंगी (Narangi)는 오렌지의 어원 ‘나랑가’를 아직도 유지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열었던 해,
미국 플로리다에선 오렌지가 너무 많아서 처치 곤란이었다.
미국은 그 많은 오렌지를 한국에도 팔기로 결심하고는
‘한국, 우리 오렌지 좀 잡숴 봐. 우리가 당신들 물건 사준 게 얼만데 이제 오렌지 좀 사 가야지?’
라고 부탁인 척 압박을 했다.
그럴만했던 것이 당시 한국 정부는 오렌지 수입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이유는 제주의 감귤이 덜 팔릴까 봐.
하지만 미국의 무역 협상과 압박으로 오렌지가 점점 많이 들어왔고,
짧은 시간이지만 제주 감귤은 나랑가때문에 나락으로 갈까봐
국민들에게 토종 농산물의 우수성을 적극적으로 홍보하며 잘 살아남았다.
이제 당신은 아보카도를 볼 때마다 그 이름의 유래를 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처럼 이름은 그 자체로도 힘이 있지만 그 유래를 알면 더욱더 큰 힘을 가진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 ‘꽃’에서 이런 아름다운 구절처럼 그 이름을 불렀다면
그 뜻과 유래가 무엇인지도 함께 물어보자.
우리가 먹는 과일의 이름처럼 재미난 스토리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