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정신이냐?
이든이와 세계여행을 결심하고 살고 있던 집을 전세로 내놓았다.
하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단 한 명도 집을 보러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우리... 세계여행을 떠날 수 없을 것 같아.." 거의 포기하려던 찰나, 한 분이 집을 보러 오셨다.
그리고 우리 집을 보자마자 맘에 들어하셨다. 문제는 단 하나! 바로 다음 달 초에 이사를 원하신다는 것!
재빠르게 머리를 굴려보았다. 그렇다면 한달안에 짐 정리를 해야 하고 출국예정일까지 대략 두어 달을 지낼 곳도 필요한 상황이었다.
'어쩌지?'
이 분을 놓치면 우리의 세계여행도 놓칠 것 같았다. 우리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부터 매일매일이 짐 정리와 '당근'의 연속이었다.
출근해서 근무를 하고 집에 돌아오면 또 다른 업무를 시작했다.
나는 짐을 싸고, 남편은 당근 거래를 위해 집을 나섰다.
살면서 쌓인 물건들의 무게를, 이제서야 체감하게 됐다. 하루하루 줄어가는 짐을 보며, 실감이 났다.
“이제 빼박이다. 주사위는 던져졌고, 후회해도 소용없다.”
전세계약이 마무리되자, 그다음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이 여행을 양가 부모님께 어떻게 말씀드릴 것인가였다.
남편은 외동이고, 나는 남동생이 있지만 아직 미혼이다.
남편과 나는 늦은 나이에 결혼해 양가 부모님이 연로하셨고 이든이는 양가에 하나밖에 없는 귀한 손주였다.
그런 손주를 무려 1년 반동안 볼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를 꺼내야 한다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말씀드리는 걸 차일피일 미루던 어느 날,
“저희 이든이랑 세계여행 갔다 오려고요”
시댁에서 밥을 먹던 중, 남편이 무심한 척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아마 상상도 못 하셨겠지만 의외로 큰 반응은 없었다.
그러나 며칠 후 아버님이 남편을 따로 호출하셨다.
“너 미쳤냐? 제정신이냐?!”
며느리 앞에서는 차마 못하셨던 말을 아들인 남편에게 하신것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도 아니고, 마흔이 넘었으면 돈을 모아서 애 키울 생각을 해야지.
있는 돈 다 쓰고 오면 나중에 어쩌려고 그러냐?”
사실 당연한 말씀이었다. 우리 스스로도 속없고 무모하다고 느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버님도 아셨을 것이다. 다 큰 아들, 며느리의 결정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반면 친정엄마는 단순, 명쾌하게 말했다. “그래, 인생 한 번 사는 거 하고 싶은 거 해라! “
아빠는 별다른 말씀은 없으셨지만, 그건 우리의 여행을 이해해서가 아니라 이해하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주말마다 우리는 꼭 필요한 물건들을 시댁과 친정에 가져다 놓았다.
30평대 아파트를 가득 채운 물건들을 업체 도움 없이 직접 처리한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까운 신혼 가구와 가전들.. 이렇게 빨리 이별할 줄 알았다면 그리 골머리 싸매고 고르지 않았을 텐데...ㅋ
정말, 매일매일이 정신없었다.
짐을 싸고, 당근마켓에 올리고, 거래하고, 밤에는 다음 날 정리할 목록을 쓰고,
주말에는 부모님 댁을 오가며 또 짐을 옮기고…
세계여행을 위한 준비는 그저 ‘비행기 티켓’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었다.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다행히 두어 달 살 곳도 생각보다 쉽게 해결되었다.
마침 이든이의 어린이집 친구네 가족이 새 아파트로 이사 가면서, 기존에 살던 집이 비어 있었다.
혹시 두어 달 살 수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는데 너무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정말 진심으로, 진짜 진짜 너무 고마웠다.
세상엔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우리가 그 따뜻함에 기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 새삼 느껴졌다.
모든 상황이
우리 가족에게 지금,
“이제 떠날 때야” 라고 등을 밀어주는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 출발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