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들릴 리 없는 나였는데 -
취한 그녀는 내 옆에 있었다.
내겐 낯설지 않은 장면이었다.
그녀는 소파에 반쯤 누운 채
팔 하나는 무심히 내려뜨리고,
다른 손은 와인잔을 느슨하게 감고 있었다.
셔츠 단추는 위에서 두 개쯤 풀려 있었고,
넓게 드러난 쇄골 아래로
미세하게 떨리는 숨결이 보였다.
스커트 자락은 비스듬히 올라가 있었고,
그 아래로 드러난 허벅지는
살짝 기울어진 조명 아래서
피부보다 더 부드럽게 보였다.
대부분의 남자라면...
그 순간,
그녀가 ‘취했다’는 전제만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았다.
그녀는 취한 척을 하고 있었단 걸.
한두 잔의 와인으로 취할 사람은 아니었고,
말투며 눈동자, 몸의 균형까지 다 계산돼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취했다고 믿어주는 척만 하고,
그 자리를 먼저 나왔다.
조금 걷고 싶었다.
집까지는 걸어서 20분.
딱 가벼운 유산소 운동이 될 거리.
바람은 차분했고,
밤은 조용했다.
고요한 이 거리 위에,
나 혼자 떠 있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5분쯤 지났을까.
인스타그램 DM이 떴다.
디자이너였다.
“어디 가셨어요?”
나는 짧게 답장했다.
“실수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냥 먼저 나왔어요.
집 가는 중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거짓은 아니지만, 진심도 아니었다.
언제든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계산이 있었고,
굳이 오늘 끝까지 함께하지 않아도
그녀는 날 ‘이성적이고 신중한 사람’으로 인식하게 될 거라는 계산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원하는 게
‘다정하게 안아주는 남자’였다면,
지금쯤 차가운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그 가능성도 없진 않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녀에 대해 확신이 없었고,
혹시 모를 리스크도 계산해둬야 했다.
사람을 모른다는 건 리스크다.
그녀가 진짜 괜찮은 사람일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가끔은,
내 계산이 사람을 보호하는 방패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모든 가능성을 대비하며 움직였다.
집 앞 골목에 다다를 무렵,
편의점에 들렀다.
물 한 병,
그리고 담배 한 갑.
담배는 자주 피우진 않지만,
가끔 정리되지 않는 밤에
딱 한 개피만 태우는 게 습관이 됐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차가운 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이었다.
한 사람이 내 앞을 지나쳤다.
평범한 실루엣, 무심한 걸음.
그런데—
너무 말도 안 되는 향기.
은은하면서도 단단한 향.
자극적이지 않지만 확실한,
기억에 남는 냄새.
무슨 생각도 없이,
나는 본능적으로 입을 열었다.
“저기요.”
그녀가 걸음을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