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의 귀여움에 대한 선문답적 고찰
1. 우리 집 서열 1위, 맹수인 척하는 솜뭉치
나는 1년 반 차 고양이 집사다. 우리 집에는 서열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치즈냥이, 탱고가 있다. 이혼 후 갈 곳이 없어진 나는 늙은 어머니가 계신 인천 본가로 쫓겨나듯 들어와 살던 중, 이 녀석이 우리 집 문턱을 넘었다.
녀석은 젖도 채 떼지 못한 아주 어린 아깽이 시절, 어미를 잃고 깊은 맨홀에 빠져 생사를 오가는 무서운 사고를 겪었다. 다행히 길을 지나던 조카가 그 가엾고 작은 생명을 구조했고, 우여곡절 끝에 결국 우리 집으로 오게 되었다.
처음엔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평생 집안에 동물을 한 번 들여본 적 없는 어머니는 "어디 털 날리는 짐승을, 그것도 요물이라는 고양이를 방에 들이냐"며 완강하게 반대하셨다. 하지만 세상천지에 기댈 곳 하나 없이 파들거리는 그 작은 핏덩이가, 갈 곳을 잃어 칠십 노모의 집으로 굴러들어 온 비루한 내 처지와 어쩐지 겹쳐 보였다. 결국 나는 기를 쓰고 고집을 부려 녀석을 거두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는 기묘한 세 식구가 동거를 이어가고 있다. 이혼 딱지를 붙이고 빈털터리로 굴러들어 온 아들놈이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고양이까지 들이밀었건만, 이제는 체념한 듯 그저 새벽 기도 다녀와 낮게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묵묵히 멸치 똥을 따는 무던한 어머니. 그리고 인생의 밑바닥을 박박 기며 지금 이 나이까지도 어머니의 등골을 빼먹고 있는 삼십 대 후반의 이혼남인 나. 마지막으로, 제 어미와 헤어진 끔찍한 트라우마는 까맣게 잊은 채 세상에서 자기가 호랑이인 줄 아는 고양이 한 마리.
고양이가 왜 귀여운지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다. 그저 존재 자체가 귀여움이다. 보들보들한 털 뭉치를 가만히 쓰다듬고 있으면, 하루 종일 안팎으로 죄인처럼 굽신거리던 내 뾰족한 마음이 눈 녹듯 스르르 녹아내린다. 소리 없이 사뿐히 걷는 말랑한 발바닥 젤리와 불쑥 다가와 내 손등에 닿는 촉촉한 코의 감촉, 그리고 우주의 활처럼 우아하게 휘어진 꼬리의 호를 마주하고 있노라면, 마치 주눅 든 내게 과분한 위로가 쏟아지는 것 같다. 게다가 찢어지게 하품할 때마다 빼꼼 모습을 드러내는 좁쌀만 한 가지런한 앞이빨을 볼 때면, 굳어있던 입가에서 나도 모르게 배시시 웃음이 피어오른다.
자신은 정글을 호령하는 맹수라고 굳게 믿고 있는 듯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저 '맹수인 척하는 솜뭉치'일뿐이다. 등이 터진 불쌍한 쥐돌이 인형을 거머쥐고 맹렬하게 뒷발 팡팡을 할 때면, 옹골차고 딴에는 한없이 진지하다. '내 이 쥐돌이의 숨통을 기필코 끊어 놓겠다'는 그 가열찬 결의는 너무도 하찮고 귀여워 꽉 깨물어주고 싶다. 낚시 장난감을 흔들면 갈기 같은 등 털을 바짝 곤두세우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다가도, 츄르 껍질 부스럭거리는 소리 하나에 체면을 다 버리고 쪼르르 달려오는 이 오묘하고 신비로운 털뭉치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2. 내 유일한 구원, 그리고 수백만 원짜리 짝사랑
월급날, 통장에 숫자가 찍히기가 무섭게 '퍼가요'라는 비아냥거리는 환청이 들릴 정도로 돈은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매달 월급의 절반은 전처에게 양육비로 자동 이체된다. 영끌해서 샀던 아파트는 위자료 명목으로 넘긴 지 오래다. 이혼한 지 벌써 3년. 전처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고작 내 우울하고 답답한 기분 하나 달래 보겠다고 나갔던 술자리에서 저지른 하룻밤의 미친 일탈은 내 삶의 궤도를 통째로 박살 내버렸다. 누구를 원망할 자격조차 없는, 스스로 내 무덤을 파고 기어들어간 참담하고 뼈아픈 과오였다.
이제 세 살이 된 둘째는 차치하더라도, 일곱 살이 된 첫째 녀석은 면접 교섭일에 만나도 어느새 나를 남 보듯 데면데면하게 대한다. 아비의 자리가 아이의 기억 속에서 속절없이 지워져 가는 것을 지켜보는 건, 생살이 찢겨 나가는 것보다 더한 고통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직장 내 분위기도 흉흉하다. 대대적인 조직 개편 이야기가 돌며 내 책상이 언제 복도로 밀려날지 모른다는, 싸한 짐승 같은 촉이 매일 밤 나를 괴롭혔다.
주변에선 "아직 젊은데 새 출발 해야지"라며 가십거리 삼아 가벼운 훈수를 건넨다. 하지만 양육비 자동이체일만 지나면 텅 비어버리는 통장, 퇴근 후 돌아갈 곳이라곤 칠십 노모의 좁은 셋방뿐인 빈털터리 돌싱남. 혹 달린 삼십 대 후반이라는 앙상한 밑천은 누군가와의 새로운 시작은커녕, '조건 미달'이라는 노골적인 잣대에 부딪혀 번번이 바스라졌다.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게 나를 다시 정상적인 궤도 위로 올려 보낼 생각이 없어 보였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온 노모의 낡은 집. 내 손으로 시원하게 말아먹어버린 내 인생에서, 유일한 숨구멍은 고양이뿐이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 나를 불량품 취급하며 가차 없이 밀어낼 때, 유일하게 나를 평가하지 않고 곁을 내어주는 온기 가득한 존재였다. 가라앉는 배에서 구명줄을 부여잡듯, 나는 숨 막히는 현실에서 도망쳐 이 말 못 하는 짐승에게 버거운 몸을 기댔다. 나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주는 그 작고 따뜻한 위로에 무방비로 마음을 툭 내려놓고 비비는 것. 그것만이 내 구차한 일상을 버티게 해주는 완벽한 구원이었다.
녀석은 내게 잃어버린 자식들의 빈자리이자, 이 비루한 세상에서 유일하게 남은 '내 편'이었다.
그래서 나는 쪼들리는 생활비 속에서도 미친 듯이 지갑을 털어 녀석의 세상을 최고급으로 세팅해 주는 충직한 집사 노릇을 자처했다. 내 입엔 1,500원짜리 편의점 삼각김밥을 욱여넣고 목이 다 늘어난 누런 속옷을 입고 다니면서도, 탱고의 밥그릇만큼은 바다 건너온 비싼 일제 츄르와 유기농 수제 캔으로 채워 넣었다. 녀석의 화장실 또한 먼지 없는 최고급 모래로 쏟아부어 주었다.
환절기마다 도지는 지독한 몸살과 편두통에도 병원비가 아까워 꾸역꾸역 타이레놀 한 알로 버텼지만, 백만 원에 육박하는 탱고의 야간 응급실 진료비와 초음파 검사비, 그리고 비싼 영양제 앞에서는 단 1초도 주저하지 않았다. 내 썩어가는 속은 굴러다니는 약으로 달래면서도, 이 작은 생명의 이빨 하나, 털끝 하나조차 완벽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내 몸 하나 편히 뉠 방 한 칸조차 내 명의가 아닌 주제에, 좁아터진 거실 한가운데에는 천장까지 닿는 육중한 원목 캣타워와 커다란 캣휠, 그리고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고양이 전용 공기청정기까지 보란 듯이 세워두었다.
어머니의 낡고 빛바랜 가구들 사이에서 홀로 매끄럽게 번쩍이는 최신식 기계들과 웅장한 캣타워는, 마치 이 집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선포하는 거대한 징표처럼 보였다. 내 현실이 처참하게 찌그러져 갈수록, 나는 녀석의 세상을 보란 듯이 화려하게 치장하는 것에 더욱 집착했다. 그것만이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책임질 능력이 있고 이 세상에 아직도 가치 있는 존재'임을 증명해 주는 유일한 길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죄를 내가 씻듯, 이 작은 생명에게 모든 것을 경건하게 쏟아부었다. 텅 빈 통장 잔고를 확인하며 한숨을 쉬면서도, 거대한 캣타워 위에 앉아 있는 탱고를 볼 때면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적어도 이 녀석만큼은 내가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있다'는 그 기만적인 안도감이, 무너져 내리는 현실의 절망을 진정시켜 주는 마지막 보루였다.
내가 쏟아붓는 이 비정상적인 집착이 훗날 내 목을 조를 징그러운 올가미가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나는 그 수백만 원짜리 짝사랑에 미친 듯이 전력투구하고 있었다.
3. 하악질로 돌아온 나의 과유불급
하지만 완벽한 위로라고 믿었던 이 감정이 철저한 나만의 착각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루 종일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사자에게 쫓기는 가젤처럼 고용 불안에 떨다 돌아온 밤.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신발도 채 벗기 전에 녀석을 찾는다. 너덜너덜한 내 하루를 기워줄 유일한 진통제가 거기 있다는 듯이.
"탱고야, 아빠 너무 힘들다. 제발 조금만 안고 있자."
나는 녀석을 안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듯 녀석의 작은 몸통을 움켜쥐었다. 내 아픈 몸은 미련하게 깡으로 버티면서 백만 원에 육박하는 녀석의 스케일링 비용을 댔다는, 그 비틀린 보상심리가 내 두 팔에 가학적인 힘을 실었다.
내 비릿한 슬픔과 세상으로부터 따돌림당하는 것 같은 고립감을 녀석의 부드러운 털 속에 파묻고 싶어 얼굴을 들이밀자, 탱고는 기겁하며 내 품을 빠져나가려 버둥거렸다. 핑크빛 앞발이 내 코와 입술을 밀어내고, 평소엔 하찮던 뒷발이 내 가슴팍을 사정없이 걷어찼다. 그래도 기어이 내게 위로를 달라는 위압적인 손길이 녀석의 몸통을 더 옥죄는 순간, 뜻밖의 날카로운 파열음이 터져 나왔다.
"하아악-!"
나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내며 하악질을 한 뒤, 녀석은 소파 밑 어두운 구석으로 쏜살같이 숨어버렸다.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남겨진 나는 밀려오는 무안함과 비참함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야, 내가 너한테 어떻게 해줬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배신감에 눈시울이 붉어지고, 야속함에 가슴이 조여왔다. 맨홀에서 죽어가던 가련한 핏덩이를 살려내 최고급 세상을 바쳤건만,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냐는 서운함이 미친 듯이 밀려왔다. 세상 모두가 날 버려도, 애지중지 온 정성을 쏟아 키워낸 너만큼은 나를 위해 무조건적인 위안을 내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그 조그만 녀석을 향해 한탄을 늘어놓았다.
씩씩거리며 녀석이 숨어버린 소파 밑으로 억지로 손을 뻗으려던 순간, 멈칫했다. 내 헌신에 대한 배신인 줄 알았던 그 억울함이 실은 '준 만큼 내놓으라'는 기브 앤 테이크로 환산된 천박한 본전 생각이었음이 머리를 스치자, 왈칵 쏟아지던 눈물이 거짓말처럼 말라붙었다.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서 도망친 고양이에게 분노하는 내 꼴이 한없이 기괴하게 느껴졌다.
돈으로 사랑을 사고 복종을 강요하는 이 짓거리가, 세상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아세웠던 폭력적인 잣대와 다를 게 무엇인가. 능력과 통장 잔고로만 쓸모를 매기던 세상으로부터 밀려나 패배감에 씁쓸한 속을 남몰래 달래면서, 나는 고작 5kg짜리 짐승에게 '내가 이만큼 돈을 썼으니 너도 그에 맞는 사랑을 내놓으라'며 똑같은 폭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제야 짐승보다 못한 내 밑바닥이 똑똑히 보였다. 그 뼈아픈 자각이 텅 빈 거실을 무겁게 짓눌렀다.
가만히 짚어보니 내가 녀석에게 들이민 것은 따뜻한 온정이 아니었다. 내 곪은 상처를 무조건 받아내라는 일방적인 감정 쓰레기통이자, 애정을 빙자해 청구서를 들이미는 징그러운 정서적 부채였다.
그러나 나를 더 미치게 만드는 건, 낡은 성경책을 옆에 두고 무심하게 앉아 있는 어머니와 탱고의 관계다. 어머니는 탱고에게 팔이 아프도록 낚싯대를 흔들어주지도, 비싼 사료도 화려한 캣타워도 사주지 않는다. 그저 거실 바닥에 앉아 나직이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걸레질을 하거나 된장찌개에 넣을 멸치 똥을 딸뿐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나만 보면 질색하며 피하던 녀석이, 자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머니 곁으로는 제 발로 슬며시 다가간다. 그러더니 어머니의 무릎 위로 가볍게 뛰어올라 제 집인 양 자리를 잡고 눕는 게 아닌가. 어머니가 마른 손으로 녀석의 등허리를 대충 툭툭 쓸어주면, 이내 탱고는 눈을 감고 '골골송'을 부른다.
수백만 원을 쏟아붓고도 하악질을 당하는 내 초라한 두 팔과, 멸치 똥을 따는 노모의 그 무심한 무릎. 이 환장할 대비 앞에서 지독한 자괴감과 함께 알 수 없는 서늘함이 내 뒷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4. 알고리즘이 던져준 죽비 소리,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발가벗겨진 듯한 수치심에 쫓기듯 방으로 숨어들었다. 거실에 남겨진 어머니의 고요한 뒷모습과 고양이의 골골송이 환청처럼 귓가를 맴돌았다. 불을 끌 용기도 나지 않아 침대 머리맡에 우두커니 앉아 스마트폰을 켰다. 허탈한 마음을 달래줄 자극적인 영상이라도 찾으려 의미 없는 스크롤만 반복하던 그때,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한 스님의 법문 영상 하나가 화면에 떴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고루하고 딱딱한 '선문답 강의'라는 제목. 하지만 그날 밤은 무엇에 홀린 듯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 속 스님은 온화하지만 단단한 목소리로 1,200년 전의 대화를 들려주고 있었다.
趙州問 如何是道
南泉云 平常心是道
州云 還可趣向否
泉云 擬向卽乖
조주가 묻는다. "어떤 것이 도(道)입니까?"
남전이 답한다. "평상심(平常心) 그대로가 도이니라."
조주가 다시 묻는다. "그렇다면 그 도를 향해 애써 나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자 남전 스님이 쐐기를 박듯 말한다. "향하려고 애쓰면 도리어 어긋나 버린다."
귓가에 꽂힌 낯선 문장에, 나도 모르게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화면 속 스님은 조용히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 남전 선사가 언급한 평상심이란 특별한 경지가 아닙니다. 인위적인 조작이나 의도가 개입되지 않은 본래 마음 상태입니다. 배가 고프면 밥을 먹고 졸리면 잠을 자듯, 목적의식 없이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일상 자체가 곧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무언가를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목적의식을 품고 다가가는 순간, 우리는 이미 본질에서 어긋나 버립니다.
불교에서는 우리의 행동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바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입니다. 유위는 목적을 가지고 억지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무위는 조작 없이 절로 되는 상태를 뜻합니다. 우리는 대개 유위법의 세상에 삽니다. 내가 이만큼 정성을 쏟았으니 대접을 받아야 하고, 내가 이만큼 사랑을 줬으니 너도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지독한 계산이 깔린 행동이죠. 겉으로는 대가를 바라지 않는 지극한 정성인 것 같아도 그 밑바닥엔 내 뜻대로 상대를 움직이겠다는 지독한 욕심이 숨어 있습니다.
조주는 도에 도달하기 위한 실천 방안을 묻지만, 남전은 '의향(擬向)', 즉 의도를 가지고 다가가려 애쓰는 순간 곧바로 어긋난다(乖)고 단언합니다. 무언가를 쟁취하려는 목적의식을 품는 순간 '나'와 '얻어야 할 대상'이라는 분별이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애써 다가가려 하는 그 작위 자체가 도리어 본질로 가는 길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무미건조한 유튜브 영상이 내는 매서운 파열음.
'의향즉괴(擬向卽乖)', 향하려고 애쓰면 어긋난다.
벼락같은 그 네 글자가 거실 한복판에 덩그러니 남겨진 내 처량한 꼴을 정면으로 겨냥하고 있었다. 망치로 얻어맞은 듯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어머니의 무릎에서 녹아내리는 탱고와, 자신을 위해 온갖 것을 바치는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던 탱고. 그 극명한 온도 차의 답이 바로 그 네 글자 속에 시퍼렇게 날 서 있었다.
가만히 내 밑바닥을 들여다보았다. 나는 탱고의 애정을 쟁취하기 위해 미친 듯이 '애쓰고(擬向)' 있었다. 내 과거의 죄책감과 보잘것없는 현재를 보상받겠다고, 수백만 원짜리 조공을 바치며 녀석의 환심을 사려 온갖 유위의 '조작'을 일삼았다. 나는 그것이 헌신적인 사랑이라 믿었지만, 야생의 감각을 지닌 녀석의 눈에 비친 나는 어땠을까. 츄르 하나를 내밀면서 "내 많은 걸 희생하며 널 거뒀으니, 넌 나의 이 끔찍한 외로움과 짙은 죄책감을 씻어내라"며 무거운 청구서를 들이미는, 아주 숨 막히고 폭력적인 빚쟁이에 불과했을 것이다.
고양이는 영물이다. 상대가 그저 편안한 마음으로 곁을 내어주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귀여움을 착취해 내면의 시궁창 같은 구멍을 메우려는 음흉한 의도를 품고 있는지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내가 녀석을 억지로 끌어안으려 했던 건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철저히 내 못난 에고(Ego)를 위로받기 위한 이기적인 유위의 발버둥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어떠한가. 집도 애들도 다 뺏기고 빈털터리로 굴러들어 온 속 썩이는 아들놈에게 잔소리 한 번 하지 않듯, 어머니는 고양이에게도 위로를 강요하거나 애정을 구걸하지 않는다. 그저 낡은 성경책을 곁에 두고 "주님의 은혜가 오늘도 족하다"며 나직이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멸치 똥을 딸뿐이다.
아무런 의도 없이 자신의 지금을 조용히 다듬어가는 어머니의 무릎은 철저한 무위의 공간이다. 녀석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애쓰지 않고, 그저 평상심으로 존재할 뿐이다. 고양이는 그 청정하고 고요한 공기를 귀신같이 알아본 것이다. 결국 녀석이 내 숨 막히는 집착을 견디지 못하고 하악질을 한 것은, 내 안의 일방적인 '의향'에 대한 지극히 정당한 거부였던 셈이다.
진정한 관계에 닿기 위해서는 억지스러운 목적의식부터 버려야 했다. 녀석을 향한 헌신으로 내 죄책감을 덜어보겠다는 질척이는 통제욕을 빼고, 그저 녀석이 숨 쉬는 공간에서 나 역시 아무런 기대 없이 그대로 머무르는 것.
캔 하나 내어준 것 없이도 흔쾌히 곁을 허락받는 늙은 어머니처럼, 나 역시 무언가를 바라지 않는 텅 빈 평상심의 층위로 들어가야만 비로소 이 엇나간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자각이 스쳤다.
5. 정상성 궤도를 이탈한 자의 음침한 종속, 그리고 텅 빈 무릎
남전 스님의 일갈을 빌려 내 내면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니, 그곳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시궁창 같은 결핍이 웅크리고 있었다.
내 손으로 다 망쳐버린 '정상 가족'이라는 궤도. 거기서 튕겨져 나온 내 삶은 매일이 숨죽인 자책이었다. 남들은 번듯한 아파트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완벽한 행복의 서사를 써 내려갈 때, 나는 칠십 노모의 낡은 집에 얹혀살며 언제 책상이 복도로 밀려날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초라하고 죄 많은 사내일 뿐이었다. 첫째 아이의 기억 속에서 내 아비로서의 자리가 지워져 가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만 하는 그 지독한 상실감과 자기혐오. 나는 그 거대한 공포를 고작 한 줌의 가련한 생명체에게 맹렬하게 투사하려 했다.
"세상이 다 날 욕하고 밀어내도, 내가 살려냈고 내 돈으로 먹이고 재우는 너만큼은 나를 신처럼 떠받들며 완벽하게 종속되어야 한다. 그렇게라도 너는 내 초라한 존재 가치를 증명해 달라."
퇴근 후 파김치가 된 내가 탱고를 억지로 끌어안으며 내뿜은 기운은 결코 따뜻한 온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징그럽고 음침한 통제욕이었다. 녀석은 내 무겁고 빈곤한 열패감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맡았던 것이다. 내 못난 에고(Ego)가 드리운 그 숨 막히는 집착의 악취가 녀석의 목을 조르고 있었으니, 생존을 위해 내게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낸 것은 당연한 방어였다. 그것은 끈적하게 들러붙는 내 폭력적인 애정의 청구서가 자초한, 너무도 자명한 인과였다.
그제야 남전 스님이 말한 평상심의 진짜 의미가 내 핏속으로 서늘하게 스며들었다. 도(道)라는 것은 애초에 무언가를 쥐어짜 내어 움켜쥐는 투쟁이 아니었다. '내가 너에게 이만큼 해주었으니, 너도 내게 최소한 이만큼을 내놓으라'는 식의 천박한 거래는 더더욱 아니었다.
집착의 굴레를 벗어던진 진정한 무위란, 무언가를 내어주되 내가 베풀었다는 알량한 흔적조차 마음에 남기지 않는 것이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는다. 내가 너를 사랑하고 너에게 베풀었으며 너를 구원했다는 오만한 자기만족마저 깨끗하게 지워버린 완벽하게 텅 빈 상태.
비워낸다는 것은 곧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허락한다는 뜻이다. 내가 쏟아부은 정성에 대한 보상심리를 끊어내고 '내가 했다'는 흔적마저 지워버릴 때, 그 무심한 공성(空性)의 자리에는 상대를 통제하려는 폭력 대신 대상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놔두는 가장 순도 높은 사랑만이 남는다.
고양이의 진정한 사랑이라는 도(道)에 가닿기 위해서는, 그 징그러운 청구서를 산산조각 내고 '흔적 없는 머무름'에 서 있어야만 했다. 내가 너를 위해 뭔가를 했다는 그 어떤 작위조차 까맣게 지워져 버린 채, 그저 지금 이 순간, 바로 이 공간에서 각자의 자리를 지키며 담담한 숨을 쉴 뿐이라는 초연한 공생. 그 서늘한 거리 두기가 유지되어야만 비로소 이 작고 예민한 영물과 진심으로 맞닿을 수 있는 것이었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나는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의 몫을 묵묵히 살아갈 뿐이다'라는 그 무던한 태도. 애정을 갈구하는 끈적한 집착도, 무언가를 억지로 쥐어짜 내어 자기를 증명하려는 의향적인 몸부림도 없는 그 투명하게 텅 빈 상태. 그것이 바로 남전 스님이 말한 '평상심'이자, 완벽한 무위의 실천이었다.
탱고는 그 어떤 무언의 압박도 흘러나오지 않는 어머니의 그 '텅 빈 무릎'이 가장 안전하고 편안해서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내가 뿜어내는 이 이기적이고 지독한 유위의 에너지를 스스로 걷어내지 않는 한, 억지로 깨달음에 닿으려 발버둥 치다 어긋나 버린 조주처럼 고양이의 진정한 곁에는 평생 가닿을 수 없다는 뼈아픈 자각이 밀려왔다.
6. 내 삶을 박살 낸 처절한 헛주먹질과 폭력적인 '의향'
녀석이 내게 시퍼런 이빨을 드러냈던 건 나를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그 징그러운 정서적 빚 독촉을 이제 그만 거두고, 제발 너 스스로 자책과 후회의 늪에서 빠져나와 이제 그만 편안해지라는 아주 아프고도 정직한 충고였다.
그 서늘한 경고음 앞에서, 문득 고양이에게 들이밀었던 이 폭력적인 집착이 실은 아주 오래되고 징그러운 내 악습이었음을 깨달았다. 수취인만 달랐을 뿐, 나는 늘 내 안의 시궁창 같은 결핍을 타인이 대신 메워주길 바라며 무거운 기대를 강요해 오지 않았던가. 그제야 내 삶을 이토록 처참하게 박살 낸 원인이 수면 위로 서서히 떠올랐다.
전처가 둘째를 임신했을 때 내가 느꼈던 그 이기적인 우울감과 답답함. 돌이켜보면 그것 역시, 내 못난 자아의 공허함을 아내가 알아서 위로하고 채워주길 바랐던 폭력적인 의향이었다. 새 생명을 품고 입덧과 피로에 지쳐가던 아내에게, 나는 가장의 무게와 외로움을 알아달라며 끝없이 유위의 청구서를 들이밀었다. 내가 밖에서 이렇게 힘들게 돈을 벌어오니, 너는 내 고단함을 알아주고 완벽한 안식처가 되어달라는 지독한 인정 욕구였다.
내 텅 빈 구멍을 타인이 채워주기만을 바랐던 그 끈적한 통제욕이 뜻대로 충족되지 않자, 나는 홧김에 나간 술자리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값싼 위로를 구걸하다 끝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에 빠지고 말았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내놓으라며 숨 막히는 빚 독촉을 하다 내 손으로 가정을 파탄 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그 오만한 버릇을 버리지 못했다. 전처에게 들이밀던 그 폭력적인 계산서를 이제는 수백만 원짜리 캣타워와 비싼 사료로 이름만 바꾼 채, 이 말 못 하는 작은 짐승의 목줄을 쥐고 똑같은 짓을 답습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인에게서 내 존재의 위로를 쥐어짜 내려는 이 천박한 작위는 집 밖이라고 다를 리 없었다. 직장에서 책상이 밀려날까 봐 매일 밤 식은땀을 흘리며 짐승처럼 벌벌 떨었던 이유도 이 유위의 덫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나는 과장이라는 허울뿐인 타이틀과 매달 통장에 찍히는 월급봉투가 내 존재 가치 자체라고 착각했다. 내 젊음과 건강을 갈아 넣고 상사의 눈치를 보며 기여했으니, 회사 역시 내 자리를 영원히 보장하고 나의 쓸모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지독한 집착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일 자체에 온전히 머무르는 평상심은 애초에 없었다. 오직 자리보전과 생존이라는 목적을 쟁취하기 위해 억지로 나를 욱여넣고 위악적으로 포장하는 숨 막히는 몸부림뿐이었다. 내가 이만큼 희생했으니 조직도 나를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 대우해야 한다는 그 알량한 대차대조표를 회사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들이밀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억지로 나를 증명하려 애를 쓰면 쓸수록, 내면의 불안은 도리어 눈덩이처럼 커져갔다. 향하려고 애쓸수록 어긋난다는 남전 스님의 말처럼, 그 옹졸한 타이틀이 사라지는 순간 남겨질 텅 빈 껍데기가 너무도 두려워 밤마다 스스로를 갉아먹었던 것이다.
결국 밖에서는 회사에, 안에서는 아내와 고양이에게, 나는 평생을 징그러운 빚 독촉만 하며 살아온 비루하고 가여운 빚쟁이였다.
무언가를 끊임없이 성취하고 나의 쓸모를 확인받아야만 비로소 세상에 내 자리가 생기고, 살아갈 가치가 있다는 강박. 평상심이라는 고요한 자리에 가만히 머물지 못하고, 억지로 무언가를 쥐어짜 내어 보상을 거머쥐려 했던 그 인위적인 몸부림이야말로 내 숨을 막히게 하고 주변의 모든 관계를 파괴해 버린 비극의 씨앗이었다
도(道)는 애초에 무언가를 증명해 내려는 헐떡거림이 아닌데, 나는 벼랑 끝으로 내몰린 이 초라한 일상 속에서조차 어떻게든 내 존재 가치를 변명해 보겠다고 허공에 대고 헛된 발버둥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7. 애쓰지 않는 사랑, 수백만 원짜리 마음의 캣타워를 부수다
그 처절한 자해극의 실체를 깨닫자, 나는 녀석에게 들이밀던 그 무거운 일방적 장부를 북북 찢어버리기로 했다. 억지로 녀석을 끌어안으려던 비루한 손을 거두고, 스마트폰 장바구니에 녀석의 환심을 사기 위해 '흑심을 잔뜩 품은 정성'으로 채워 넣었던 간식과 장난감들도 미련 없이 비워버렸다.
그것은 순수한 선물이 아니라, 어떻게든 녀석의 마음을 굴복시켜 내 허함을 채우려 했던 비굴한 뇌물이었음을 이제야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실 한가운데를 요새처럼 차지하고 있던 수백만 원짜리 '채권을 추심하는 마음의 캣타워'에서 내려와, 멸치 똥 냄새가 훅 끼치는 어머니의 곁, 그 거실 맨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는 녀석에게는, 내 알량한 자존감을 위해 애교를 떨어야 한다는 강박도, 비싼 밥값을 증명해야 한다는 눈치도 없었다. 그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완벽하게 태평한 존재 그 자체. 그 무심하게 오르내리는 뽀얗고 통통한 배를 멍하니 응시하던 순간, 내 안에서 쉼 없이 돌아가던 자책과 통한의 쳇바퀴가 스르르 멈춰 섰다.
아, 저것이구나. 끊임없이 무언가를 입증해야만 직성이 풀리던 내 어리석은 강박이, 아무것도 애쓰지 않는 저 작은 생명체의 초연한 숨결 앞에서 눈 녹듯 사라졌다. 어떤 목적이나 통제욕도 없이 그저 태고의 편안함으로 널브러진 저 모습이야말로, 세상의 잣대나 그 어떤 후회가 침범할 수 없는 가장 맑고 고요한 마음의 자리였다.
그 고른 숨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나 역시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녀석에게 위로를 갈구하던 마음도, 내 삶을 억지로 포장하려던 안간힘도 모두 거실 바닥에 툭 내려놓고 그저 그 고요한 흐름을 가만히 따라가보았다.
역설적이게도 내가 쥐고 있던 집착의 끈을 놓아버린 그 텅 빈자리는 허무한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충만했다. 세상에 내 흔적을 무겁게 새기려 애쓰지 않아도, 지금 이대로 온전하다는 압도적인 평온함. 이 팍팍하고 죄 많은 일상 한가운데서 나를 구원한 것은 작위적인 자기 연민이나 수십만 원짜리 캣타워가 아니라, 바로 배를 까집고 자는 내 고양이의 저 절대적인 평상심이었다.
그때, 거실 구석에서 어머니가 나직하게 흥얼거리는 찬송가 소리가 다시 귓가에 내려앉았다.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그 경건한 가사가, 멸치 똥을 떼며 "모든 것이 은혜, 주의 은혜였소"라고 읊조리는 그 무던한 고백이, 실은 남전 스님이 말한 평상심과 소름 돋도록 같은 자리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을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의 주께 모든 것을 온전히 내어 맡기고 억지로 내일을 통제하려 들지 않는 어머니의 그 단단한 믿음. 그것은 내가 닿고자 했던 의향이 지워진 텅 빈 마음과 결국 같은 것이었다. 십자가와 선문답이라는 껍데기만 다를 뿐, 내 못난 에고를 한없이 내려놓고 '오늘 하루'라는 평범한 기적에 흔적 없이 머무르는 그 자리에서 어머니의 예수와 나의 부처는 완벽하게 하나로 포개지고 있었다.
이 흔적 없는 충만함 속에 머물 때에야 비로소 나는, 내 뼈아픈 과거도,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멸치를 까는 늙은 어머니의 굽은 등도, 내 뜻대로 통제할 수 없는 녀석의 야생성마저도 있는 그대로 넉넉하게 품어낼 수 있는 여유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탱고가 사뿐사뿐, 내 발치에 스윽 몸을 비빈다. 내가 빚쟁이처럼 기를 쓰고 잡으려 할 때는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던 녀석이, 내가 마음의 억지스러운 손아귀를 풀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텅 빈 고요한 품'을 내어주자 제 발로 다가와 내 맨발 위로 따뜻한 턱을 괴고 눕는다.
가만히 내 발등에 닿은 녀석의 둥근 온기를 느끼며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진짜 사랑도, 삶의 진정한 위로도 애써 쥐어짜 내려하면 어긋날 뿐이라는 것을. 내 시궁창 같은 결핍을 타인에게 덧씌우지 않고, 그저 지금 여기에서 내 몫의 숨을 집착 없이 쉬며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오늘 밤, 멸치 냄새나는 늙은 어머니의 둥근 등과 배를 까집고 자는 고양이의 평온한 숨결이, 그 어떤 종교의 이름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가장 완벽하고 따뜻한 구원을 내게 안겨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