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연애와 결혼
결혼기념일을 잊은 남편은 사형수다.
그 말이 농담처럼 들리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그날 밤,
나는 정말로 사형선고를 받는 심정이었다.
그날 아침,
모든 일정은 평소처럼 구글 캘린더에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기술에 의지하는 사람이다.
약속도, 회의도, 기념일조차도 알람이 울려야 움직이는 존재.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은 어떤 알림도 오지 않았다.
프로젝트 마감이 겹쳐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나는
그저 ‘평범한 하루’라 믿고 있었다.
보고회를 마치고,
저녁엔 직장 동료들과 회식이 있었다.
삼겹살에 소주 한 잔, 웃고 떠들다 보니
어느새 밤 11시.
집에 들어선 순간,
불 꺼진 거실 한가운데 낯선 케이크가 배달되어 있었다.
“결혼기념일 축하해요, 엄마 아빠! – 이쁜 딸이”
그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결혼기념일?’
나는 황급히 폰을 열었다.
캘린더엔 분명히 기념일 표시가 되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알림이 꺼져 있었다.
오류였던 걸까. 아니면 내가 실수로 지운 걸까.
이유가 뭐든, 결과는 똑같았다.
나는 오늘, 그 중요한 날을 잊은 것이다.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3대 기념일!
아내의 생일, 결혼기념일, 처음 만난 날.
방 안에 불이 꺼져 있었다.
아내는 이미 잠들었거나,
아니면… 실망 속에 등을 돌렸겠지.
나는 조용히 케이크를 들고 식탁에 앉았다.
촛불도 켜지 않은 케이크 앞에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 문득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딸아이는 독립해 나간 노처녀다.
자기 먹고살기도 바쁠 텐데...
하지만 그 아이는 우리 부부의 ‘오늘’을 기억했다.
회사의 바쁜 일상 속에서도,
엄마 아빠의 기념일을 챙겨줄 마음의 자리를 남겨두었던 것이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아, 내가 이 아이를 키운 보람이 이런 것이구나.
딸아이에게 받은 이 조그만 케이크 하나가,
내가 저지른 큰 실수를 덮어주는 대통령의 사면장처럼 느껴졌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아내에게 조심스레 사과를 건넸다.
“구글이 날 배신했어.”
그녀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사형은 면제야. 딸 덕분에.”
그러곤 덧붙였다.
“그래도… 그 아이를 이렇게 키워낸 건 당신이야.
오늘만큼은 칭찬해 줄게.”
나는 그날 이후로,
캘린더보다 먼저 내 마음에 날짜를 새기기로 했다.
기계가 울리지 않아도,
내 가슴이 먼저 기억하게 말이다.
사랑은 기술로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돌보는 것이라는 걸
딸아이가 내게 가르쳐주었다.
결혼기념일을 잊은 남편은 사형수다.
하지만 사랑을 배운 아빠는,
때론 딸의 케이크 한 조각으로도 사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