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을 거의 내 집처럼 갔던 나는 어느샌가 학교에서 이상한 소문의 주인공이 되어있었다. 90년대에는 인터넷이라는 게 없었기에 혹시라도 전염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인지 내가 뇌전증으로 쓰러질 때면 처음에 걱정해 주던 아이들도 점점 나를 멀리하는 게 느껴지기 위해 시작했다.
하루는 병원에서 담임선생님이 ‘ 아이들에게 뇌전증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전염되지 않고 우리들이 잘 챙겨줘야 한다고 얘기를 했다‘고 하며 그런데도 아이들이 모질게 굴면 꼭 얘기하라고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리 녹록지 않았다.
나와 항상 함께하던 친구들도 쑥덕거리며 나를 멀리했고 나는 어느새 혼자가 되었다. 하루는 뇌전증으로 쓰러지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선생님께 병원 가겠다고 말하고 학교를 나온 적이 있었다. 몸 상태는 너무 멀쩡했는데 혼자라는 생각에 너무 힘들었다. 선생님에게 이 상황에 대해서 말할 수 있었지만 그럼 어머니 귀에도 그 얘기가 들어갈 것을 생각하니 너무 부모님께 죄송해서 말하지 못했다. 이미 부모님은 나 때문에 충분히 많은 눈물을 흘렸었다.
점심시간에 병원에 가자 간호사 선생님이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는 '지금 식사하시는데 잠시만' 말하고는 의사 선생님에게 갔고 나는 환자 대기용 소파에 앉아 만화책을 읽었다. 어느새 여기가 학교보다 내 집처럼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의사 선생님은 가운을 입은 채로 대기실로 나와 퉁명스럽게 얘기하셨다.
'왔냐? 짜장면 좋아하지? 간호사 짜장면 하나 더 가져다 달라고 해 만두도 좀 챙겨달라고 하고'
의사 선생님은 손을 까딱까딱하며 진료실로 들어오라고 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뛰듯이 일어나 의사선생님을 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여느 때처럼 과자나 음료를 나한테 건네주셨고 내 학교생활에 관해 물어보았다. 나는 왜 그랬는지 선생님과 어머니에게는 말하기 힘들었던 얘기를 의사 선생님께 다 얘기했다. 뇌전증으로 맨날 쓰러지면 애들이 나를 병균 보듯이 한다고 얘기하며 화를 내자 의사 선생님은 전처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해답을 주셨다.
'그건 모르니까 그러는 거야 원래 모르면 무섭거든 네가 저기 앞에 있는 천에 갔는데 바닥이 보이지 않아 깜깜해 그럼 넌 천이 얇다고 한들 물에 들어갈 수 있겠냐?'
'모르면 그럴 수 있어 그걸 나쁘다고 말할 필요도 없고 어차피 졸업하면 다시 안 볼 사이야 신경 쓰지 마'
전혀 내 감정에 대해서 공감을 못 해준다는 느낌을 받았겠지만 나한테는 큰 위로가 돼준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괜찮다는 얘기를 듣고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가면서 우리 집은 이사를 했고 자연스럽게 나는 의사 선생님과 멀어졌다. 그 당시에는 핸드폰도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방학 때마다 한 번씩 놀러 가서 의사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는 게 전부였지만 의사 선생님은 언제나 나를 친자식처럼 잘 챙겨주셨다.
아마 내가 이 글을 끝까지 쓰면 얘기하겠지만 내가 결혼할 때 의사 선생님이 내 주례를 서주셨다. 그러고는 잘 살라며 거금의 축의금도 내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어린 시절은 뇌전증이라는 고난이 닥쳤지만 그걸 이겨낼 수 있게 주위에 많은 사람들이 나를 도와줬던 것 같다.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지금 나는 예전에 나를 챙겨주셨던 의사 선생님 같은 어른이 되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면 대가 없이 도와주는 그런 어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