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
파리에서 스위스로 향하는 길. 우중충한 파리를 벗어나자 디종과 다른 마을들은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프랑스의 시골은 우리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더 넓고 고요하며 따뜻한 느낌이 들었다. 자전거를 타는 젊은이들과 아이들이 많아 더욱 활기차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젤에서 열차를 갈아타며 마주 앉은 스위스 아주머니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혼자 여행 중이냐며 어디를 다녀왔는지 묻고,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을 이야기하며 행복한 여행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조용한 열차 안, 창문으로 비춰오는 햇빛 속에서 미소 지으며 나눈 대화는 유독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 아주머니가 먼저 내린 후, 열차는 인터라켄으로 향했다.
베른에서 갑작스러운 열차 문제로 슈피츠를 거쳐 가야 한다는 안내가 나왔다. 유럽에서 기차가 연착되거나 고장 나는 일은 흔한 터라 당황스럽진 않았다. 기관사의 독일어 안내가 이어진 후, 영어로 빠르게 설명이 나왔다. 앞쪽 객실에서 동양인 가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마침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한대?”라고 묻는 순간 자연스럽게 말이 나왔다. “반대편 열차로 갈아타야 해요.”
혹시 같은 목적지일까 싶어 인터라켄으로 가냐고 물었고, 예상대로였다. 처음 와 본 길이었지만 아는 만큼 설명해주었고, 서로 길을 찾으며 이동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처음 온 곳에서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고 있다는 게 조금 우습기도 하다.
스위스에 도착한 첫날, 퐁뒤를 먹으러 간 식당은 마치 한국 속 작은 스위스 같았다. 사방에서 한국어가 들려왔고, 웨이터도 “퐁뒤에서 와인은 빼는 거지?”라며 익숙한 듯 물었다. 당연하다는 듯 “맞아”라고 대답하며 피식 웃었다. 숙소는 한인민박이었고, 저녁이 되자 주방에서 와인 파티가 벌어졌다. 또래들이 모인 자리였기에 자연스럽게 합류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텐션을 맞추려니 살짝 어색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자리도 여행의 일부라 생각하니 금세 적응되었다.
새벽 1시, 일행이 여권을 호텔 레스토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스키를 타려면 여권이 필요했기에 다시 호텔로 향해야 했다. 스위스에서는 아침 8시면 거리가 텅 비는데, 운 좋게도 잠시 밖으로 나온 투숙객 덕분에 호텔에 들어가 여권을 찾을 수 있었다.
스위스에 온 이유는 오직 스키를 타기 위해서였다. 많은 여행자가 융프라우 정상이나 리기산으로 향했지만, 우리는 스키를 타며 보는 경치에 더 관심이 있었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풍경보다 스키를 타면서 마주하는 산의 모습이 훨씬 멋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스위스 스키장의 코스는 펜스 없이 난이도가 상당했기에 길 안내를 해줄 가이드와 함께 스키를 탔고, 그는 가장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코스로 안내해 주었다. 융프라우산맥과 피르스트산맥, 각 산의 경치는 달랐지만 어느 하나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융프라우에서는 숲속 깊은 곳과 절벽이 어우러진 코스를, 피르스트에서는 정상에서 하늘과 산맥이 펼쳐지는 장관을 즐겼다. 가파른 경사 덕분에 스릴 넘치는 코스도 많아 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신이 날 수밖에 없었다. 스키를 마친 후, 그린델발트 정류장으로 내려와 글루바인을 마시며 피로를 풀었다. 따뜻한 와인이 몸을 녹여 주었고, 숙소로 돌아가는 열차에서는 깊이 잠들었다.
그날 밤, 숙소에서는 바비큐 파티가 열렸다. 스위스 와인은 수출되지 않아 현지에서만 맛볼 수 있다고 했다. 저렴하지만 훌륭한 와인을 곁들인 저녁. 서로 처음 만난 사이였지만, 여행지에서의 우연한 만남은 금방 익숙해졌다.
세 번째 날, 그린델발트의 온천으로 향했다. 산맥을 바라보며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전날의 피로가 사라졌다. 온천을 마치고 마트에서 장을 봐 돌아오니, 전날 함께 파티를 한 친구들이 저녁을 준비하고 있었다. 각자 가져온 음식들을 나누며 소소하게 와인을 곁들였다. 첫날과 둘째 날의 와인 파티가 열정적이었다면, 이날은 조용히 대화를 나누며 마무리하는 느낌이었다.
스위스에서의 마지막 밤, 밖은 여전히 조용했고, 숙소 창가에선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낯선 곳에서의 만남이 어색할 줄 알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만남들은 자연스럽게 흘러갔고, 낯선 환경에서도 스스로를 적응시키는 일이 익숙해졌다. 여행이 단순한 ‘새로운 경험’이 아니라, 그 속에서 함께 흘러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