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아진 골목길에 남은 큰 기억

박제된 시간의 풍경

by 정온



남해 바닷가 끝자락, 웃몰·안몰·간뎃몰·건뎃몰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은 바다를 호수처럼 감싸 안았다. 계절마다 다른 빛으로 물드는 풍경은 삶의 일부였고, 마을 사람들은 주로 고기를 잡으며 살았다.


어린 시절, 골목길은 거대한 용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통로였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놀던 그곳은 우리의 해방구이자, 모험이 가득한 놀이터였다. 술래잡기의 숨 가쁜 추격전이 펼쳐지고, 구슬 굴러가는 소리 청량하게 울리던 그 길 위에서 굴렁쇠를 굴리며 우리는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놀았다. 아이의 눈에 비친 골목은 가장 넓은 세상이었고, 미지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었다. 그 속에 자리한 논과 밭은 끝없는 상상의 배경이 되어주었다.


시간의 강물이 흘러 어른이 되어 다시 찾은 고향의 골목길은, 놀랍도록 작고 작아져 있었다. 아랫마을로 이어지는 길목에 서니, 어릴 적 거대했던 세상은 내 키만 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좁은 골목으로 변해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골목길이 작아진 것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커버린 것이라는 것을. 골목길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지만, 그 길을 쿵쾅거리며 뛰어다니던 어린 나는 이제 없었다. 대신 그 자리에 서서, 작아진 골목길을 아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옛 추억의 파편들을 주워 담는 어른이 서 있을 뿐이었다.


작아진 골목길을 걷다 보니, 어린 시절의 소박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컸던 행복이 물밀 듯 밀려왔다. 골목길은 어른이 된 나에게 잃어버린 동심과 순수한 기쁨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시간의 통로였다. 마을 중턱의 빨래터는 어릴 적엔 작은 수영장만큼이나 드넓어 보였다. 아주머니들의 구수한 노랫가락과 함께 거품을 일으키며 빨래방망이로 삶의 고뇌를 두드리지 않았을까. 그 곁에 조잘대는 아이들은 바가지로 물을 떠 첨벙첨벙 물장난을 치며 깔깔거렸다. 어른이 되어 다시 보니, 고작 장독대보다 조금 큰 크기에 왠지 오래 간직해 온 추억의 크기마저 줄어든 듯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해졌다.


친구들 생일은 늘 소박했다. 친구 집에 모여 앉아 과자를 펼쳐놓고, 어머니가 가끔 해 주신 음식을 함께 나누며 '인디언밥'같은 게임을 하며 놀았다. 벌칙으로 이불을 뒤집어 씌어 숫자를 세며 등을 맞는 놀이를 했다. 케이크는 초코파이를 탑처럼 쌓아 대신했으며 시시콜콜한 수다와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는 어두운 밤을 밝혔다.


중학교 시절 남자아이의 생일날,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친구의 얼굴이 이상했다. 하얀 밥알 모양의 꽃이 얼굴 가득 만개해 있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혼자 밥을 먹으려다 밥이 다 된 줄 알고 압력솥뚜껑을 잘못 열었고, 튀어 오른 밥알이 얼굴에 온통 달라붙은 것이었다. 걱정은커녕 우리는 배를 잡고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한참을 웃고 눈물까지 흘리고 나서야 “야, 괜찮아?” 하고 물었지만, 그 친구의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보는 순간 또다시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참을 놀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캄캄한 신작로를 따라 걸었다. 시골이라 밤에는 차 한 대 다니지 않는 고요한 길이었다. 순간 갑자기 산에서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바위가 우리를 덮칠 것 같은 소리가 '우루루루' 하고 들려왔다. 우리는 "야, 귀신이다?" "엄마야!" 하며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날벼락같은 굉음에 놀라 제일 앞에 서있던 친구가 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도 제일 달리기를 잘하는 친구였다. 나도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지만, 그 친구를 따라잡을 수 없었다. 한참을 달려 집 위 버스정류장까지 왔을 땐 정신을 차리고 살았다는 안도감에 웃음이 터졌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연유로 한동안 밤에는 무섭다며 잘 나가지 않았으나, 시간이 흐르자 다시 밤길을 쏘다니곤 했다.


우리의 젊은 날은 고함 소리로 가득한 천국이었다. 그 모든 소란과 웃음, 고요한 밤길과 발자국 소리까지 생각해 보면, 그 모든 것이 작아진 골목길 어딘가에 아직도 선명하게 박제되어 있는 것만 같다. 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 골목은 어른이 된 나에게 시간이 지나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골목으로 영원히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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