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리토볼(burrito bowl)

조화라는 것.

by 하늘꽃

미국 여행 자체가 급작스러웠지만, 여행 전 짧은 준비에도 확실히 해 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먹거리였다. 언제나 그렇듯 자료 조사를 통해 먹고 싶은 메뉴를 기준으로 일정을 짰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여행이었다. 그런 여행에서 맛이 정말 궁금했던 음식이 있었는데, 바로 미국 서부식 멕시코 요리, '부리토볼'이었다. 수많은 유학생은 물론 미국에서 살다 온 한국인들이 그리워하며 국내 진출을 기다린다는 내용은 미국 여행을 준비하다 보면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었다(찾다 보니 심지어 기사로도 나왔다. https://naver.me/FrAw5XI2). 가기 전 먹어야 할 메뉴 목록에 적으며 한 솔직한 생각은 이랬다. '얼마나 맛있기에? 보기에는 그렇게 그리움이 남을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먹기 전 뚜껑을 덮어 잘 섞은 뒤 먹는 게 좋다는, 먹는 방법 노하우까지 잊지 않고 챙긴 사람이 나다.


시끄럽고 번잡한 뉴욕을 떠나 다른 의미로 번잡한 라스베이거스로 넘어온 첫날은 먹는데 진심인 나에게 대단한 착오가 생긴 날이었다. 미국이라는 큰 땅덩어리에서 동부와 서부를 가로지르는 비행을 하면서, 식사를 해결하지 않은 큰 실수를 한 것이다! 새벽 출발 비행기였기에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러다 비행기 탑승을 몇 분 안 남기고 화장실을 다녀오며 목격한 수많은 미국인들의 아침 식사 장면! 순간 싸한 느낌이 들었지만, 무언가를 먹을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렇게 6시간 가까이 이동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전날 저녁을 먹은 시간을 계산해 보면 언뜻 봐도 거의 12시간 이상 공복이 지속된 참사였다. 그렇게 주린 배를 움켜쥐며 라스베이거스 도착하자마자 호텔에 짐만 맡기고 찾아간 식당이, 바로 그 유명하다는 "치폴레(Chipotle)"였다. 유명세 덕인지 꽤 많은 지점이 보였고, 호텔에서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향했다. 태어나 처음 마주한 라스베이거스는 더위가 새로웠다. '덥다' 라기보다는 '따갑다!'가 어울리는 날씨였다. 그 따가움을 견디며 지도상에 표기된 18분을 걷는 일은 솔직히 쉽지 않았다. 여행 중에는 2만 보 정도는 뚝딱 걷곤 하는 나였음에도, 5분이 지나자 '힘드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순 없었다. 극도의 공복으로 나에게는 음식이 절실했다. 무엇보다 이 예상치 못한 오랜 공복을 위로해 줄 맛있는 음식 말이다.


그렇게 마주한 치폴레의 첫 부리토볼 모습은 지극히 평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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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진짜 그렇게 맛있다고?라는 의문이 다시 한번 드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주문하면서 넣은 재료들을 생각하면, 기본은 하겠다 싶었다. 제법 맛있는 녀석들을 한데 모아뒀으니 말이다. 밥부터 시작해서 큐브 스테이크와 찢은 형태의 두 종류 소고기(기본적으로는 한 종류를 선택하거나 반반으로 섞지만, 나는 굳이 추가금을 내고 더블로 주문했다), 삶은 콩, 소스, 옥수수, 과카몰리에 신선해 보이는 야채까지 넣었으니 웬만한 건 다 들어갔다 싶다. 주저하지 않고 미리 학습해 온 방법으로 뚜껑을 덮어 내용물을 섞었다. 그렇게 다시 마주한 음식 생김새는 나의 의심을 증폭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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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푼과 포크를 이용해 야채까지 고루 다시 섞으며, 개밥? 느낌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걸 억지로 눌렀다. 잔뜩 화가 나 있는 나의 배를 달래고자, 주저 없이 한 스푼 크게 떠서 입에 몰아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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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 뒤부터는 별 설명이 필요 없다. 감탄과 감탄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왜 그리도 사람들이 극찬을 하고, 미국 살던 많은 이들이 한국에 돌아가 왜 그리도 그리워했는지 너무도 잘 알 것 같았다. 무엇보다 고기 종류를 두배로 올린 나의 선택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양은 물론이고, 한데 어우러진 재료와 소스의 궁합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음식계의 오케스트라? 뮤지컬?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맛있었다. 한식이 아닌데 어느새 미국 음식에 지친 나에게 한식인 듯 위로를 주는 맛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렇게 연속 3일 내내 나는 브런치로 부리토볼을 먹게 되었다. 솔직히 그 이후에도 매일 먹으러 갈 수 있었지만, 미국까지 와서 너무 한 종류만 먹는 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조금 참고 있는 중이다. 미국에 살지 않고 잠시 다녀간 여행객임에도 한국에 돌아가면 나는 부리토볼을 그리워하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한다. 살면서 한데 어우러져 사는 게 참 중요하다고. 하지만 이 세상에서 살다 보니 많은 이들과 어우러져 산다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는 걸 나는 알아버린 것 같다.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누적되고, 나이라는 것을 먹으며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자연스레 알게 된 사람의 무서움. 그 두려움에 지레 겁먹고 도망치는 일이 많아졌다. 무엇보다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고 섞이는 일이 내겐 너무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부리토볼은 그 어려운 걸 참 쉽게 해내고 있었다. 어떻게 그러지? 처음 든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그리도 사랑받는 건가? 싶은 생각이 뒤따랐다.


하지만 삼일 연속으로 찾아가 음식을 즐기며 주위를 보다 보니 생각이 바뀌었다. 부리토볼도 모두 똑같지 않다. 주문하는 사람의 입맛이나 취향에 따라 내용물이 추가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여러 가지 맛의 소스도 하나, 또는 두 개, 때로는 모두 선택되기도 한다. 같은 부리토볼이라는 메뉴지만 주문하는 사람에 따라 양도, 맛도 달라진다. 같은 사람이 주문할지라도 어제와 오늘의 부리토볼이 달라진다. 누가 어떤 형태로 주문하든, 부리토볼은 그저 그 안에서 어우러지면서 각자의 맛있음으로 조화된다. 모두 다르지만 모두 제 안에서 하나 됨의 미학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 우리네 인생도 그러는 게 아닐까? 각자의 취향이나 성향에 따라, 모습과 형태, 규모의 차이가 있을 뿐 우리는 이미 순간순간 다양한 곳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사람을 피해 떠난다고 하지만, 결국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연들과 어우러져 크고 작은 조화를 이루며 살게 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너무 부담 갖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내가 어딘가에 어우러지기 위해 너무 애쓰다 보면, 내가 가진 나만의 맛을 잃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조금은 편안하게, 있는 모습 그대로 살다 보면, 우리네 인생도 제법 맛깔나게 어우러져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게 누군가에겐 그리움의 대상으로 남겨질 것이다. 그래.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우리네 인생이다!


■● 미국 서부식 멕시코 요리 프랜차이즈: 치폴레 멕시칸 그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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