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1화
4월.
긴 겨울의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하는 달.
겨울이 사과하고, 봄이 슬슬 사과를 받아주기 시작하는 달.
슬금슬금 태양이 기어 나와 은근히 제 존재를 뽐내기 시작하는 달.
서울에는 그 기온을 꽤 높은 곳에서 미리 맞이하는 동네가 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가장 꼭대기에는 얼마 전 그 동네로 이사 온 한 어린 남자가 있다.
굽이굽이 굴곡진 동네에서 얼마 전 삐죽한 동네로 이사 온 여훈이 있다.
여훈은 왜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까.
자신이 살던 동네와 닮았다고 느낀 것일까.
저 아래에서부터 여훈은 낑낑대며 올라와 자신의 옛집과 닮은 그 집으로 들어온다.
여훈의 전화가 울린다.
여훈은 현관문을 닫고, 전화가 온 자신의 핸드폰을 본다.
여훈은 조금 시간을 갖고 전화를 받는다.
“저 지금 들어왔어요. …
아직은요. 아르바이트도 바로 구해지지 않네요. …
밥은 잘 먹고 다니죠. 엄마, 저 서울 올라온 지 이제 2주 됐어요. …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서른이에요.”
여훈은 침대에 걸터앉아 은은하게 미소 띤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얇게 들어온다.
전화를 받던 여훈은 햇빛에 눈을 찡그리더니, 블라인드를 내린다.
드르륵- 드르륵-
“블라인드 내리는 소리예요. 남향으로 잘 구했나 봐요. 해가 너무 들어와요. 이럴 줄 알았으면 북향으로 구할 걸 그랬어요. …
아빠가 올라오셔도 소용없어요. 월세여서 손대면 큰일 나요. …
괜찮아요. …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
엄마, 저도 이제 서른이에요. …
엄마는요? …
잘됐네요. …
아빠가요? 의외네요. …
원래 안 좋아하시잖아요.”
어두운 방에서 여훈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다.
작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흐른다.
여훈은 옷소매로 땀을 닦는다.
몸에 열기가 올랐는지, 에어컨을 튼다.
띠리링-
“에어컨 튼 소리예요. 좀 덥네요. …
여긴 더워요. …
집에서 잘 안 틀어주셨으니까 여기서라도 틀고 살아야죠. …
오래 틀어 놓지는 않아요. …
아, 엄마. 저도 서른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에어컨 바람이 추운지, 여훈은 얇은 셔츠를 입는다.
“취업 준비는 원래 오래 걸려요. …
이번 주 안에 1차 서류 보내야 해요. 요즘에는 AI가 다 해줘요. …
AI한테 말하면 알아서 써 줘요. 엄마 세상 많이 좋아졌죠? …
아빠가요? 그런 건 어디서 들으셨대요? …
상철이 형이요? 그 형이 왜 거기 있어요? …
전 상철이 형처럼 안 돼요.”
여훈은 하얀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했으면, 문제없을 거예요. 늘 그렇게 탔잖아요. 내일모레에도 안 들어오면 저한테 말하세요. 전화해 볼게요. …
네, 뭐. 잘됐네요. …
엄마, 저 이제 서울 올라왔어요. “
갑자기 여훈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여훈은 신경질적으로 에어컨 온도를 낮춘다.
“그건 제가 잘하는 일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에요. …
저는 누나 하나로도 충분해요. 남들까지 돌보기 싫어요. …
엄마,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요. …
네? 그 말은 또 누가 했어요? …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
그런 소리 믿지도 마요. 누나가 결혼을 어떻게 해요. …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얘기죠. …
아빠한테도 그 아저씨 만나지 좀 말라고 해요. 왜 자꾸 정신 나간 소리 하면서 …”
여훈은 셔츠를 벗어던진다.
“엄마, 그런 이상한 말에 넘어가지 마요. 만약에 누가 누나랑 결혼하겠다고 오면, 저 그 사람 때려서 누나랑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알겠어요? …
엄마, 알겠냐 고요!”
여훈 격한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벽을 친다.
퍽-
엄마는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을 보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떤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노이즈에 미세한 숨소리 마저 들리지 않는다.
여훈은 그녀가 보낸 침묵에 강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 죄책감은 여훈이 아주 엉망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대변한다.
“저 이제 다시 취업 준비해야 해요. 내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
여훈 도망치듯 전화를 끊는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숙여 한숨을 뱉는다.
벽을 어찌나 세게 쳤는지 주먹은 금방 붓고 피도 흘러나온다.
자신의 붉어진 주먹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때린 벽을 본다.
붉은 핏자국이 생겼다.
여훈은 휴지에 물을 묻혀 핏자국을 닦아 보려 하지만 흰 벽지에 더 넓게 번진다.
닦으려고 할수록 더 번진다.
붉은 핏자국은 벽의 때와 섞여 검붉게 얼룩진다.
손에서 피가 흘러 손목을 지난다.
여훈은 벽을 닦던 휴지로 자신의 피를 닦는다.
“무슨 일이야? “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훈은 문밖에 대고 별일 아니라고 답한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집주인의 옥탑방을 얻은 여훈은
집을 빼는 날이 올 때 행여나 작은 흠집으로도 벽지 전체를 바꿔줘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애지중지하며 옥탑방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어딜 뭐로 친 거냐고.”
여훈은 집요하게 묻는 집주인에게 어쩔 수 없이 복싱 연습을 하다 실수로 벽을 친 거라고 말했다.
어찌 됐든 주먹으로 벽을 친 건 마찬가지니까.
“다치진 않았어?”
집주인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정작 집주인이 궁금한 건 여훈의 상태가 아니라 집에 하자가 생겼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벽에 피가 조금 묻었어요. “
“다친 거야? 상태가 어떤 지 설명해 줄래?”
뭔가 이상했다.
원래 같았으면 집주인은 방에 들어와 확인해야겠다고 노발대발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낯선 남자의 음성이 문밖이 아닌 집 안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다. 카메라 렌즈에 다친 손을 보여줘. “
낯선 남자의 음성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못 눌려 전화가 걸린 건지 확인해 보았지만, 누구 와도 통화 중이지 않았다.
“발등 말고 손을 보여달라고.”
“누구세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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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