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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

연재소설

by 지진창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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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4월.

긴 겨울의 한기가 사라지고, 따뜻한 기운이 맴돌기 시작하는 달.

겨울이 사과하고, 봄이 슬슬 사과를 받아주기 시작하는 달.

슬금슬금 태양이 기어 나와 은근히 제 존재를 뽐내기 시작하는 달.

서울에는 그 기온을 꽤 높은 곳에서 미리 맞이하는 동네가 있다.

그리고 그 동네에서 가장 꼭대기에는 얼마 전 그 동네로 이사 온 한 어린 남자가 있다.

굽이굽이 굴곡진 동네에서 얼마 전 삐죽한 동네로 이사 온 여훈이 있다.

여훈은 왜 이곳으로 이사를 왔을까.

자신이 살던 동네와 닮았다고 느낀 것일까.

저 아래에서부터 여훈은 낑낑대며 올라와 자신의 옛집과 닮은 그 집으로 들어온다.

여훈의 전화가 울린다.

여훈은 현관문을 닫고, 전화가 온 자신의 핸드폰을 본다.

여훈은 조금 시간을 갖고 전화를 받는다.


“저 지금 들어왔어요. …

아직은요. 아르바이트도 바로 구해지지 않네요. …

밥은 잘 먹고 다니죠. 엄마, 저 서울 올라온 지 이제 2주 됐어요. …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이제 서른이에요.”


여훈은 침대에 걸터앉아 은은하게 미소 띤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얇게 들어온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전화를 받던 여훈은 햇빛에 눈을 찡그리더니, 블라인드를 내린다.


드르륵- 드르륵-


“블라인드 내리는 소리예요. 남향으로 잘 구했나 봐요. 해가 너무 들어와요. 이럴 줄 알았으면 북향으로 구할 걸 그랬어요. …

아빠가 올라오셔도 소용없어요. 월세여서 손대면 큰일 나요. …

괜찮아요. …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

엄마, 저도 이제 서른이에요. …

엄마는요? …

잘됐네요. …

아빠가요? 의외네요. …

원래 안 좋아하시잖아요.”


어두운 방에서 여훈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전화를 받고 있다.

작은 땀방울이 이마에서 흐른다.

여훈은 옷소매로 땀을 닦는다.

몸에 열기가 올랐는지, 에어컨을 튼다.


띠리링-


“에어컨 튼 소리예요. 좀 덥네요. …

여긴 더워요. …

집에서 잘 안 틀어주셨으니까 여기서라도 틀고 살아야죠. …

오래 틀어 놓지는 않아요. …

아, 엄마. 저도 서른이에요. 걱정하지 마세요.”


에어컨 바람이 추운지, 여훈은 얇은 셔츠를 입는다.


“취업 준비는 원래 오래 걸려요. …

이번 주 안에 1차 서류 보내야 해요. 요즘에는 AI가 다 해줘요. …

AI한테 말하면 알아서 써 줘요. 엄마 세상 많이 좋아졌죠? …

아빠가요? 그런 건 어디서 들으셨대요? …

상철이 형이요? 그 형이 왜 거기 있어요? …

전 상철이 형처럼 안 돼요.”


여훈은 하얀 노트북의 전원 버튼을 누른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했으면, 문제없을 거예요. 늘 그렇게 탔잖아요. 내일모레에도 안 들어오면 저한테 말하세요. 전화해 볼게요. …

네, 뭐. 잘됐네요. …

엄마, 저 이제 서울 올라왔어요. “


갑자기 여훈의 표정이 상기되었다.

여훈은 신경질적으로 에어컨 온도를 낮춘다.


“그건 제가 잘하는 일이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에요. …

저는 누나 하나로도 충분해요. 남들까지 돌보기 싫어요. …

엄마, 그 얘기는 안 하기로 했잖아요. …

네? 그 말은 또 누가 했어요? …

누가 그런 소리를 해요? …

그런 소리 믿지도 마요. 누나가 결혼을 어떻게 해요. …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가능한 얘기죠. …

아빠한테도 그 아저씨 만나지 좀 말라고 해요. 왜 자꾸 정신 나간 소리 하면서 …”


여훈은 셔츠를 벗어던진다.


“엄마, 그런 이상한 말에 넘어가지 마요. 만약에 누가 누나랑 결혼하겠다고 오면, 저 그 사람 때려서 누나랑 똑같은 사람으로 만들 거예요. 알겠어요? …

엄마, 알겠냐 고요!”


여훈 격한 감정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벽을 친다.


퍽-


엄마는 수화기 너머에서 침묵을 보낸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어떤 음성도 들리지 않는다.

노이즈에 미세한 숨소리 마저 들리지 않는다.

여훈은 그녀가 보낸 침묵에 강한 죄책감을 느낀다.

그 죄책감은 여훈이 아주 엉망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대변한다.


“저 이제 다시 취업 준비해야 해요. 내일 다시 연락드릴게요. “


여훈 도망치듯 전화를 끊는다.

침대에 걸터앉은 채 고개를 숙여 한숨을 뱉는다.

벽을 어찌나 세게 쳤는지 주먹은 금방 붓고 피도 흘러나온다.

자신의 붉어진 주먹을 본다.

그리고 자신이 때린 벽을 본다.



브런치 글 이미지 2


붉은 핏자국이 생겼다.

여훈은 휴지에 물을 묻혀 핏자국을 닦아 보려 하지만 흰 벽지에 더 넓게 번진다.

닦으려고 할수록 더 번진다.

붉은 핏자국은 벽의 때와 섞여 검붉게 얼룩진다.

손에서 피가 흘러 손목을 지난다.

여훈은 벽을 닦던 휴지로 자신의 피를 닦는다.


“무슨 일이야? “


낯선 남자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여훈은 문밖에 대고 별일 아니라고 답한다.

부동산 중개업을 하는 집주인의 옥탑방을 얻은 여훈은

집을 빼는 날이 올 때 행여나 작은 흠집으로도 벽지 전체를 바꿔줘야 하는 일이 생길까 봐 애지중지하며 옥탑방을 관리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어딜 뭐로 친 거냐고.”


여훈은 집요하게 묻는 집주인에게 어쩔 수 없이 복싱 연습을 하다 실수로 벽을 친 거라고 말했다.

어찌 됐든 주먹으로 벽을 친 건 마찬가지니까.


“다치진 않았어?”


집주인은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정작 집주인이 궁금한 건 여훈의 상태가 아니라 집에 하자가 생겼는지 알고 싶은 것이다.


“벽에 피가 조금 묻었어요. “


“다친 거야? 상태가 어떤 지 설명해 줄래?”


뭔가 이상했다.

원래 같았으면 집주인은 방에 들어와 확인해야겠다고 노발대발할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보다 낯선 남자의 음성이 문밖이 아닌 집 안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아니다. 카메라 렌즈에 다친 손을 보여줘. “


낯선 남자의 음성은 휴대폰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잘못 눌려 전화가 걸린 건지 확인해 보았지만, 누구 와도 통화 중이지 않았다.


“발등 말고 손을 보여달라고.”


“누구세요?”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

.

.

.

.


“유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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