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심한 밤에 남편과 둘이 카페에, 상상이 현실이 되다
결혼 25주년은 은혼, 30주년은 진주혼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나는 그 이름들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지나왔다. ‘은혼’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익숙함과 신뢰의 단계라고 하고, ‘진주혼’은 시간과 인내로 빚어진 깊고 귀한 관계를 뜻한다고 한다. 나는 수십 년간 ‘은혼’이었는지 ‘진주혼’이었는지도 모른 채 지나칠 만큼 바쁘게 살았다. 서로에게 작은 선물 하나 챙겨줄 여유도 없었다. 별 탈 없이 지내는 것만으로도 인생의 과제를 해결하는 일이라 여기며 묵묵히 살아왔다.
올해 우리 부부는 ‘산호혼’을 맞이하였다. 결혼 37주년을 일컫는 말이다. 산호는 바닷속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자라나는 생물이다. 산호처럼 긴 세월 속에서 더 깊어지고 아름다워진 부부의 인연, 우리에게 꼭 맞는 말이다. 그렇게 바쁘게 살아온 시간 속에서 우리에게도 작은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37주년 결혼기념일은 19일이었다. 남편은 회사 일이 바빠 당일에는 시간을 잘 내지 못한다. 요즘 모든 일이 안정적으로 흘러가다 보니 이제 제법 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조금은 여유로워졌다. 이틀 앞당긴 지난 17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남편과 오랜만에 소확행을 누리기로 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 그게 집이 아니라 바깥이라면 더 좋다. 회사 일로 밤낮으로 바쁜 남편에게 장시간 외출은 큰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쉬는 날은 쉬어야 하고 일하는 날도 쉬어야 업무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별한 ‘산호혼’을 보내기 위해 우리 부부는 깨끗한 옷을 입고 외출했다. 가장 먼저 요즘 화제가 된 영화 ‘왕사남’을 보기 위해 영화관을 찾았다. 평일이어서 사람이 별로 없었다. 우리를 포함해 총 세 명이 영화를 관람했다. 마침 영화관 옆에 백화점이 보였다.
“자기야, 우리 서로에게 필요한 물건을 각자 돈으로 선물해 주는 거 어때?”
“당신은 뭐 받고 싶은데?”
나는 평소에도 향수를 좋아한다. 향수는 기분이 우울할 때 뿌리면 기분이 좋아져서 가끔 사용하는 편이다. 지금 쓰는 향수도 있지만 여러 개 있어도 기분에 따라 뿌리면 되니까 고민할 필요도 없이 “향수”라고 답했다.
“자기는 신발 사 줄까?”
몇 달 전부터 신발을 사야겠다고 중얼거리는 모습이 떠올라 그렇게 물었더니 금방 오케이 사인이 왔다.
갑자기 배가 고파왔다. 오래간만에 백화점에서 맛있는 것도 먹고 선물 고를 생각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다가 바로 옆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다. SUBWAY. 한 번도 가보지 못했지만, 아들이 사다 준 그 맛이 생각나서 들어갔다. 처음 먹어본 남편도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백화점 입구에서 그만 탈이 생겨버렸다. 바깥에서 통화를 마친 남편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던 나를 보고 들어오려다 그만 큰 통창에 부딪히고 말았다. 창이 너무 깨끗해 입구인 줄 착각했다니, 안경이 휘어진 걸 보고 웃을 수도 없었다. 시력이 나쁜 남편은 안경을 쓸 수 없었고 어지러움까지 호소했다. 결국, 백화점 매장에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남편을 부축해서 차로 갔다.
혹시 안경원이 문을 닫을까 노심초사하며 차를 몰고 익숙한 동네로 갔다. 마침 문을 연 안경원 사장님이 테를 바로 잡아주셨다.
비록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지는 못했지만, 주변에는 신발가게도 있었고 화장품 가게도 있었다. 먼저 남편의 신발을 사러 갔다. 남편은 신발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직업 특성상 바닥에 미끄러지지 않아야 하고 발을 잘 잡아주는 기능이 있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신중하게 신발을 고른 남편에게 내가 말했다.
“자기야, 한 켤레 더 골라봐. 나 아직 글로소득 남아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비 올 때 신는 신발도 있는지 찾아봐.”
나는 그날 남편의 바퀴를 두 개나 선물했다. 그 바퀴는 누리와 함께 도로 위를 달릴 소중한 동반자가 될 것이다. 그러고도 글로소득 통장에 잔액이 남아 있으니 나는 여전히 부자다.
신발을 차에 넣어두고 우리가 간 곳은 어린 학생들이 많이 가는 화장품 가게였다. 샌드위치 가게처럼 처음 가보는 곳이었다. 오만가지가 다 있어서 놀랐지만, 내 눈은 오로지 향수 판매대로 향했다. 나는 살 게 있으면 딱 그거만 사서 나오는 성향이 있다. 다른 것은 아예 쳐다보질 않다 보니 충동구매라는 말은 남의 나라 이야기나 다름없다. 내가 좋아하는 향은 달콤하고 시원한 향이다. 향수를 뿌려가며 향을 맡은 뒤 두 사람이 좋아하는 것으로 선택했다. 결제는 남편이 했다. 내가 받을 선물이니까.
밖으로 나오니 바로 앞에 스타벅스 매장이 눈에 보였다. 원래 카페에 잘 가지 않는 남편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저기에 가서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 먹고 싶다.”
‘오호라, 나한테 쿠폰 있는 걸 눈치챈 건가?’
얼마 전 지인에게 받은 쿠폰이 있어서 내가 쏘겠다고 큰소리 뻥뻥 치며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야심한 밤에 남편과 둘이 카페에 앉아있는 모습은 늘 상상으로만 해 봤다. 그걸 하게 되다니! 그 시간이 너무 행복했다. 행복이 뭐 별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양쪽 입꼬리가 쓰윽 올라갔다.
처음 먹어본 서브웨이 샌드위치가 패밀리 레스토랑에 가서 우아한 식사를 하는 것보다 좋았다. 오래간만에 서로에게 선물도 하고, 커피를 마신 그날 하루는 특별한 우리의 ‘산호혼’이었다. 별거 없는 것 같은 특별함,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으로 채운 산호혼, 앞으로도 이런 날들이 오래 이어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