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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길 속에서 마주한 악몽(첫번째 이야기)

by 진 스토리 Mar 18. 2025

1985년 늦여름, 수원시 인계동의 밤은 짙고 무거웠다. 매미 소리만이 간헐적으로 정적을 깨뜨리던 그 밤, 고요를 찢는 굉음과 함께 붉은 악마가 솟아올랐다. 단독주택에서 발생한 가스 폭발이었다. 낡은 기와지붕은 힘없이 무너져 내렸고, 순식간에 불길은 집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날 밤, 수원소방서 소속의 젊은 소방관은 갓 임관한 햇병아리였다. 스물다섯, 패기와 정의감으로 가슴 벅찼던 그는 화재 경보가 울리자마자 망설임 없이 출동했다. 사이렌 소리가 귓가를 때리고, 붉은빛이 시야를 가득 채웠지만, 그의 마음은 오직 하나,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현장은 처참했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은 모든 것을 녹여 삼킬 듯 맹렬했고, 매캐한 연기는 숨쉬기조차 힘들게 했다. 선배들은 노련하게 호스를 잡고 불길을 향해 물줄기를 쏘아댔지만, 신입 소방관은 긴장한 탓에 호스를 움켜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는 무너진 잔해 속에서, 혹시라도 살아남은 사람이 있을까 필사적으로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그가 발견한 것은 살아있는 인간의 온기가 아닌, 검게 그을린 시체였다.


절망과 공포가 뒤섞인 감정이 그의 온몸을 짓눌렀다. 그는 애써 정신을 다잡고 잔해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때, 그의 발이 무언가를 밟았다. 푹, 하고 꺼지는 느낌과 함께 끔찍한 장면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다. 불에 타 검게 변한 시신의 복부가 마치 풍선처럼 부풀어 올라 있었다. 신입 소방관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쳤다. 그는 그 끔찍한 형상을, 뱃속에 가득 찬 메탄가스가 폭발 직전까지 팽창한 시체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었다. 그것은 그가 소방관으로서 처음 마주한 현실, 인간의 죽음 앞에서 느끼는 무력감과 공포 그 자체였다.


화재 진압 후, 경찰의 수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밝혀진 진실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화재는 단순한 사고가 아닌, 끔찍한 살인사건의 은폐 시도였다. 범인은 다름 아닌 그 집에 세 들어 살던 젊은 총각이었다. 그는 집주인 부인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사소한 다툼 끝에 그녀를 목 졸라 살해했다. 자신의 범행을 숨기기 위해 그는 가스통 밸브를 열어놓고 불을 지른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악행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날 밤, 집에는 네 살배기 어린 딸이 잠들어 있었다. 불을 지른 남자는 불길이 치솟는 집에서 뛰쳐나오면서 무의식적으로 아이를 안고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곧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아이는 그의 완전범죄를 위협하는 존재였다. 그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아이를 다시 활활 타오르는 불길 속으로 던져 넣었다. 네 살배기 아이의 짧은 생명은 그렇게 한 남자의 탐욕과 악마성에 의해 짓밟히고 말았다.


현장에 도착한 소방대원들은 무엇보다 먼저 아이를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그들은 뜨거운 열기와 유독가스를 뚫고 무너진 잔해 속을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은 헛수고였다. 무너진 집터 구석에서 발견된 것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탄 작은 시신이었다. 아이의 시신을 수습하는 순간, 모든 소방대원들의 마음은 무거운 슬픔과 분노로 짓눌렸다. 그들은 더 이상 아이를 구할 수 없었다는 죄책감과, 인간의 잔혹함에 대한 혐오감으로 고통스러워했다.


그날 이후, 신입 소방관은 더 이상 예전의 순수하고 패기 넘치던 청년이 아니었다. 그는 불길 속에서 인간의 추악한 민낯을 목격했고, 그 기억은 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세월이 흘러 그는 은퇴했고, 손자를 볼 나이가 되었지만, 그날 밤의 악몽은 그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활활 타오르는 불꽃보다, 그보다 더 뜨겁고 잔인했던 인간의 악마성이 그의 기억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퇴직 소방관은 평생을 화마와 싸우며 수많은 사람들을 구했지만, 그는 종종 불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지옥과 싸우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는 것은 단순한 잿더미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누군가의 소중한 삶이 있었고, 누군가의 끔찍한 비극이 놓여 있었다. 잿더미 속에서 발견되는 것은 희망의 잔재일 수도 있지만, 인간의 악행이 만들어낸 절망의 흔적일 수도 있었다.


그날, 젊은 소방관은 뼈저린 진실을 깨달았다. 불길은 언젠가 꺼지고 잿더미는 식어가지만, 그 속에서 본 인간의 악몽은 평생 동안 그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 악몽은 그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선과 악은 공존하는가? 그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는 알았다. 인간의 악마성은 불길보다 더 뜨겁고, 어둠보다 더 깊다는 것을. 그리고 소방관은 그 어둠과 싸우는 존재라는 것을.


"이 글은 전직(현직)소방공무원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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