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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유를 빕니다

봉제인간이 빌어주는 [12가지 말들]

by 신정박동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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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3월 작성글


손에 쥐고 싶은 음악이 있는가. 귓구멍을 타고 흘러 사라지는 게 아까워 어떻게든 만져보고 싶은 음악. 바쁜 하루에 밀려 잊고 지낼까 두려워 곁에 붙잡아두고 싶은 음악. 내겐 자취방 한구석 유리 진열장 속 음반들이 그런 음악이다.


그런 음악을 골라 하나하나 채워 넣으니 어느새 첫 번째 칸이 다 찼다. 첫 번째 칸을 채우는 사이 손에 쥐고 싶다는 욕심은 한 단계 이동했다. 이제는 먹고 싶다. 내 안에 두고 싶다. 두고두고 영양제처럼 챙겨 먹고 싶다는 욕심. 그건 두 번째 칸에 처음 들어선 앨범, 봉제인간의 [12가지 말들]에서 시작했다.


‘술탄 오브 더 디스코’와 ‘파라솔’에서 지윤해를, ‘혁오’에서 임현제를, ‘장기하와 얼굴들’에서 전일준을 떼어내 이어 붙이면 봉제인간이 된다. 그들은 ‘뮤직테라피 그룹’을 표방한다. 누군가의 병을 고쳐주거나 누군가에 의해 병이 고쳐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듣고 싶은 음악으로 서로를 보듬는다는 점에서 봉제인간의 음악은 치료보다 치유에 가깝다.


 남이 아닌 본인들을 치유하기 위한 밴드라지만 치유도 전염이 되는 듯하다. 듣고 있자면 함께 나아지는 기분이다. 아무것도 소화할 수 없을 때 [12가지 말들]은 챙겨 먹어도 될 것만 같다.


그 속에 평화와 명상, 휴식과 안정 같은 고요한 심상은 없다. 오히려 소음을 동반하는 방해꾼 같은 곡들로 그득하다. 찢어지는 듯한 기타와 화난 듯한 드럼, 하소연하는 듯한 보컬. 세 명의 방해꾼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나는 그것이 방해로 느껴지지 않는다. 평화의 탈을 쓴 염세를 깨뜨리는 것이 반가울 뿐이다.


그 이유는 봉제인간이 치유의 방식을 너무나 잘 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련한 의사의 수술 과정을 지켜본 환자처럼 그들이 권하는 치유를 나는 안심하고 맞이하게 된다.


치유는 내 안의 고름과 마주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마주하기 위해선 고여 있던 세상을 찢고 나와야 한다. 그렇게 봉제인간의 우주선은 익숙한 행성을 떠난다. 그 과정에서 낯선 언어와 부딪히고 장이 뒤틀리고 뼈가 부러지고 결국엔 처음 보는 조그만 푸른 별에 불시착할지라도 봉제인간은 그들을 가두던 테두리를 절개하기를 선택한다. (‘12가지 말들’)


낯선 별에 착륙한 봉제인간은 그 별에 발붙이고 사는 이들의 삶에 다가간다. 삶만큼이나 아프고 낫는 일들로 가득한 것은 없을 테니. 걸어 다니는 의학 서적인 셈이다. 치유의 영감을 얻고자 펼쳐 볼 만하다.


들여다보니 사람들은 늙는다. 둥그렇게 늙는다. 어른의 품에 안기던 아기는 어른이 되고 그 어른은 또 다른 아기를 번쩍 안아 올린다. 그 순환 속에서 어른이 된 아기는 잘 울지 않게 되고 손도 잘 안 씻게 되지만 소중한 존재를 보며 웃게 되는 것만은 여전하다. (‘BABY’) 그 구심점이 있기에 사람은 삶이라는 원을 탈주하지 않을 수 있다. 야속하게 흐르는 시간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마음을 묶어둘 수 있다.


그 구심점은 대충 사랑이라고 불리는 듯하다. 봉제인간은 사랑이라는 마음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본다. 사랑을 품은 사람들은 당당해진다. 하찮고 더럽고 비좁은 곳도 무대로 쓴다. 부러지고 넘어져도 허름하지 않다. 어디서든(공공장소는 자제하자) 너랑 나는 기꺼이 입을 맞출 수 있다. (‘KISS’) 입을 맞추는 순간 배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변할 테니까. 사랑은 이렇게나 조용하게 변신하는 것. 곱씹을 때마다 다른 맛이 느껴지는 것. 본질을 알 수 없는 것. 다층적인 것. 박쥐 같은 것. (‘박쥐’는 그 이름에 맞게 들을 때마다 다른 부분에 꽂히게 된다.)


결국 또 사랑인가. 뻔하다고 생각할 때쯤 봉제인간의 시선은 예쁘기만 한 사랑 너머로 이동한다. 일그러진 감정을 찾아낸다. 선홍빛 사랑에 잿빛 감정을 이식하기 시작한다. 허리가 꾸부렁 휘어버린 노인의 후회 섞인 조언. (‘꾸부렁 할머니’) 사명은 휘발된 지 오래인 의사의 피곤 섞인 처방. (‘지난 이야기’) 영원한 잠이 필요한 어느 밤의 울음 섞인 자장가. (‘Good Night’) 봉제인간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희망만으로 채워진 사랑을 지어내지 않는다. 사소하지만 선명하게 존재하는 추악한 마음들을 못 본 체하지 않는다. 재치 있는 바느질로 후회와 권태와 우울을 덕지덕지 이어 붙인다. 실제로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희망과 절망이 교차할 때 가장 촘촘한 사랑이 매듭지어짐을 우리는 안다.


그 매듭의 끝을 잡고 봉제인간의 치유는 절정으로 내달린다. 추악한 사랑의 끝으로 질주한다. 꿈도 많고 화도 많은 사람처럼 그들은 멈출 수 없다. (‘Guitar Hero : Dreams Come True’) 질주의 끝에는 복합적인 절망이 있다. 내게 없는 행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마음. 저편의 넘치는 행복을 끄집어내어 내 주머니에 넣고 싶은 마음. 겨우 닿기라도 하면 내 것이 되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마음. 그러다 다시 날 지나치면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마음. 잊을 수 있다고 발악하는 마음. (‘밤의 달리기’) 이런 것들은 후회나 권태 따위의 절망과는 다른 차원이다. 나 혼자서 어쩔 수 있는 절망이 아니다. 너의 존재가 개입된 절망이다. 너로 인한, 너를 향한 절망이다. 이 대목에서 봉제인간은 사랑에 이식될 마지막 쪼가리는 증오임을 예고한다.


너의 존재가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면 나는 네가 없길 바라게 된다. 네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게 된다. 어쩌면 가장 순수한 형태의 절망이다. 네게 어쩌지는 못하니 그저 네가 없길 바라기만 하는 것. 집어 던질 것이 상상밖에 없는 무력한 감정이지만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마음. (‘너만 없으면’) 봉제인간은 인간의 가장 나약한 마음을 주워 사랑에 쑤셔 넣는다.


이 정도면 이식은 충분하다. 이제 잘 봉합하는 일만 남았다. 이것저것 집어 담은 마음들이 밖으로 툭 튀어나오지 않도록 꿰매 줄 차례. 치유의 막바지에 이르러 봉제인간은 다시 본래의 행성으로 돌아갈 준비를 한다. 옷을 입고 머리를 자르고 잠시 누워 재정비한다. 재정비는 길어진다. 항상 마무리가 가장 어려운 법. 마냥 눕고만 싶은 법. 절개도 했고 이식도 했는데 봉합은 좀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싶은 법. 하지만 봉제인간은 안다. 그건 좀 아니지. 비틀어야지. 고이지 않고자 시작한 여정이니까 당장 일어나서 몸을 비틀어. (‘비틀어’)


비틀비틀 일어난 봉제인간은 히든 트랙 ‘발소리’에서 성공적인 봉합을 해낸다. 마음껏 누빈 별의 문을 잘 닫아주고 이제는 정말로 돌아갈 차례. 지윤해의 슬픈 기억이 담겼다는 ‘발소리’는 그새 정든 별을 떠나는 이별의 마음을 그리는 듯하다. 울적하지만 단단한 ‘발소리’의 마무리를 들으며 나는 웃을 수밖에 없다. 만지고 싶고 먹고 싶어서 구매한 음반이 정말로 손에 쥐어야만 완성되는 것이었을 때의 쾌감이란! 히든 트랙 ‘발소리’를 위해서라도 [12가지 말들]은 꼭 피지컬 앨범을 구매해서 듣길 권한다.


한바탕의 치유 여정은 이렇게 마무리된다. 곪아버린 속을 찢고 뛰쳐나온 세 명의 외계인이 푸른 별에 내려와 사랑 증오 희망 절망 이것저것 주워 담은 후 자기 몸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기괴하고 차갑고 낯선 감각의 이야기.


피비린내 나는 그들의 이야기는 듣기 편한 음악은 절대 아니다. 변주와 질주로 가득해서 당황스럽고 시끄럽다. 이상한 것은 그럼에도 듣고 싶어진다. 친절하지 않은 그들의 치유를 묵묵히 들어낼 수 있는 것은 앨범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들의 연주 역시 <절개-이식-봉합>을 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잘 흘러가던 곡의 등허리를 별안간 찢어 끝내버리고(절개) 뜬금없는 분위기의 멜로디를 떼어다 곡의 후반부에 심어 넣으며(이식) 마음껏 내달리는 곡들이 탈장되지 않도록 천천히 잠수하는 곡들로 잘 묶어두는(봉합) 것.


내용과 형식이 궤를 같이하는 예술은 사람의 심장박동에 맞추어 걷는다. 손은 잡아주지 않지만 같은 보폭으로 걸어준다. 내용도 형식도 자연스럽게 내 옆에 온다. 어느 것 하나 앞서 걷지 않는다. 여기까지가 내가 [12가지 말들]을 진열장에 꽂아 넣은 이유이다. 하나하나 떨어져 존재하면 안 되는 12가지 곡들. 하나의 앨범에 꾹꾹 눌러 담겼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12가지 말들. 하나의 주제를 향해 이야기와 테크닉이 합치되는 [12가지 말들]. 나는 이런 것들을 보면 손에 쥐어 입에 넣고 싶어지는가 보다.


오늘도 봉제인간을 섭취하며 내 몸의 쾌유를 빈다. 봉제인간의 쾌유를 빈다. 모두의 쾌유를 빈다. 봉제인간의 치유 여정을 따라가며 각자의 고름이 조금은 치유되길 바란다. 아마도 다 듣고 난 후 우리의 배에는 바늘자국이 한 줄 생기겠지만 뭐 어떤가. 꿰맨 흔적이 남을지라도 흉터가 아물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분명 살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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