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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마음껏 부유하기

by 신정박동 Mar 18.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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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년 5월 작성글


삶과 닮은 단어를 보면 국어사전에 검색해 보는 습관이 있다. 단어를 해부하는 마음 같은 거다. 어제는 ‘정처 없다’를 검색했다. 정한 곳 또는 일정한 장소가 없다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그 정의가 ‘집이 없다’라는 말로 읽힌다.


지금 자취 중인 빌라 2층에서는 맞은편 빌라의 집주인 할아버지가 매일 담배꽁초를 줍는 광경이 내려다보인다. 현관문을 나서면 옆집 사람이 복도 구석에 쌓아둔 단백질 음료가 며칠에 한 팩씩 줄어드는지도 보인다. 2주가 지나도 팩의 배열이 그대로일 때면 역시 다이어트는 작심삼일이군 하며 그의 실패를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문득 할아버지의 얼굴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고 옆집 사람의 통화 소리가 언뜻언뜻 들릴 때가 있다. 그들과 너무 가깝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나는 집을 잃은 기분을 느낀다. 벽 하나를 두고도 이름을 모르는 옆집 사람이 꿈에라도 침범할까 두려워진다. 매트리스에 마음대로 늘어진 몸과 달리 마음은 조금도 편안할 수 없다.


집이란 그런 것이다. 마음을 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마음을 두지 못하는 곳을 어떻게 집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자주 집이 없다고 느낀다. 아마 많은 도시인이 그렇게 떠돌 것이다. 헬륨이 든 풍선처럼 떠버리는 마음을 어디에 묶어두어야 하는지 모른 채로.


떠버리는 것은 곧 가라앉는 것. 마음이 너무 높게 날면 사람은 깊은 곳으로 잠겨버리고 만다. 그럴 땐 재빨리 몸이라도 일으켜야 한다. 6평짜리 상자에서 뛰쳐나와야 한다. 떠밀리듯 그렇게 집 아닌 집을 나서면 세상은 말없이 나를 안아준다. 어제는 그 품이 새삼 따뜻해졌음을 느꼈다. 올해도 봄은 왔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들 사이에서 올해도 봄만은 정직하게 왔다. 겨우내 옷장 냄새를 머금은 반소매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옷이 얇아진다는 것은 세상과 한 겹 더 가까워진다는 것. 봄이 들뜨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까. 피부에 느껴지는 공기가 이젠 차갑지 않구나 하고 변화를 느낄 때면 괜히 세상의 품속에 더 깊이 뛰어드는 기분이 든다. 티셔츠 소매를 두어 번 접어 올리며 집 밖에서야 집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날씨 앱에서는 미세먼지 나쁨이라는 소식을 전했지만 불쾌하지 않았다. 가장 생명력 넘치는 계절에는 늘 먼지들이 함께한다는 아이러니. 희망과 절망의 교차점에 있는 기분이었다. 그 교차점을 밟아가며 미세먼지를 머금고 온 봄의 한복판에 나는 일 년 내내 황사가 부는 곳으로 향했다.


젊음으로 북적거리는 서울대입구역의 거리를 타고 죽 걷다 보면 작은 골목 안에 숨겨진 빈티지 샵이 있다. 그곳에는 집을 잃고 버려진 것들이 모여있다.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네 시간씩 나는 그곳에서 버려진 것들과 함께한다. 작년 여름과 겨울을 거쳐 올해 봄도 그곳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보내고 있다.


황사만큼 먼지가 자욱해 사계절이 봄 같은 그곳. 활기를 뭉친 샤로수길 귀퉁이에 고개 숙이고 있는 그곳. 음악을 아무리 크게 틀어도 고요한 그곳. 얼룩과 때와 주름을 머금고 옷걸이에 추욱 처져 있는 옷들이 한숨을 내쉬는 듯한 그곳.


몇 번을 버려졌을지 모를 각자의 시간을 거쳐 그곳까지 온 가지각색의 옷들은 어쩐지 풀이 죽어있다. 그 옷들이 최대한 당당해 보이도록 하는 것이 나의 주된 업무. 버려진 것들이 단 한 번도 버려진 적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것. 옷들은 어느 기준으로도 분류되지 않은 채 포대에 담겨 내게로 온다. 포대에 잠들어 있는 옷들을 하나씩 꺼내고 먼지를 턴다. 테이프 클리너(돌돌이)로 다시 한번 먼지를 없애고 스팀 다리미질을 하고 섬유탈취제를 흠뻑 뿌린다. 일련의 단계를 의식처럼 거친 후에야 옷은 매장에 진열될 수 있다.


그 과정이 어쩐지 낯설지 않다. 포대에 뒤섞인 옷들을 보면 내 이름 석 자가 아닌 지원자 1번으로 불리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먼지를 털 때는 쌓인 감정 없는 척 애써 웃어넘기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스팀 다리미질을 하고 있자면 구김살 없는 사람인 척 연기하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섬유탈취제를 마구 뿌려대면서는 멋진 사람의 취향을 내 것인 척 훔쳐 오던 나날들이 떠오른다. 마침내 행거에 진열된 옷들이 하루빨리 새 주인에게 선택받기를 기다리게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일까. 선택받은 옷들을 비닐봉지에 담아 손님에게 건넬 때면 마치 옷들을 새집에 넣어주는 기분이 든다. 마음에 드는 옷을 구매해 기분이 좋아 보이는 손님들의 마음이 영구히 변하지 않길 바라게 된다. 그 옷들이 다시는 버려지지 않길 빌어주며. 약간은 부럽다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새집을 찾아간 옷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또 다른 포대를 들고 오고, 그 옷들을 누군가에게 떠나보내고, 다시 다른 옷들을 매장에 걸고, 그 옷들은 또 새로운 집으로 걸어 나가고… 이 둥그런 순환을 반복해서 겪다 보면 왜인지 수호신이 된 것만 같다. 죽음의 직전에서 겨우겨우 살아남아 포대에 담겨온 옷들이 새로운 삶으로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그런 중간자가 된 것만 같다. 매장에 있는 4시간 동안 나는 삶으로 가는 강 위의 뱃사공으로서 최선을 다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지울 수 없는 자국이 있고 아무리 털어보아도 달라붙는 어둠이 있다. 어느 스포츠 브랜드의 저지 재킷은 3개월째 팔리지 않고 똑같은 자리에 걸려있다. 지퍼도 고장 나지 않았고 구멍 난 곳도 없고 색깔도 화사하고 나름 깨끗한 상태를 유지한 덕에 매장에 방문한 손님들의 8할은 그 저지를 한 번씩은 걸쳐보곤 한다. 저번 월요일에도 한 손님이 “오!” 하며 저지를 집어 들었다. 3초 뒤 “아…” 하며 다시 걸어두는 것을 보고 ‘오늘도 너는 여기 머무르겠구나’ 생각했다. 그 이유는 목 부분에 네임펜으로 휘갈겨진 이름 석 자 때문이다. 안쪽도 아니고 바깥쪽에 대놓고 적힌 그 이름은 저지가 새로운 집으로 향하는 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번졌지만 또렷한 그 이름이 그 옷의 원래의 집 주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사람들은 선뜻 자기 집으로 데려가지 않는다. 괜히 속상한 마음에 물티슈로 이름을 벅벅 문질러도 보았지만 물이 묻은 검은색 글씨는 더 선명히 보일 뿐이었다.


원래의 집에서 내몰린 이들은 그 증거를 없애야 하는 걸까. 버려진 적 없는 척 묵묵히 흔적을 지워야만 하는 걸까. 어느 날 친한 언니는 내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약점을 내보이지 말고 비밀을 알려주지 말고 아픈 가정사를 고백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을 다 믿을 수는 없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을 들었을 땐 이미 취한 채로 서로 비밀을 두어 개 주고받은 이후였다. 언니의 말이 이해되었지만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나 혼자 언니를 집이라고 생각했구나 싶어 수치스럽기도 했다. 섬유탈취제 향이 코앞에 감도는 듯했다. 칙칙. 정신 차려. 네임펜처럼 진하게 새겨진 치부를 감싸듯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알겠다고 답했다. 또 한 번 집이 없는 기분이 들었다. 숙취와 함께 출근한 그다음 날 저지는 새 주인의 품에 안겨 갔다. 손님은 봉투에 옷을 담아주려던 나를 저지하며 그냥 입고 가겠다고 말했다. 매장을 나서는 손님의 목뒤에는 여전히 검은 글씨가 지워지지 않은 채로 박혀 있었다. 손님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친한 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지퍼가 고장 난 재킷임에도 마음에 들어 그냥 고쳐 입겠다던 손님. 구멍이 난 스웨터임에도 그게 멋이라며 유쾌히 웃어 보이던 손님. 사이즈가 작아 달라붙는 여성용 티셔츠를 입어보곤 흡족해했던 남자 손님. 깨끗하지도 완벽하지도 딱 맞지도 않은 그런 버려진 옷들을 새 옷처럼 들뜬 마음으로 사 가는 손님들을 보면 마음 한구석이 데워지는 듯하다. 망가진 것들도 누군가에겐 가장 튼튼한 기쁨이 될 수 있구나. 버려진 것들은 그렇게 또 다른 삶으로 풍덩 뛰어드는 것이다.


꽤 많은 옷이 매장을 나선 날에는 승모근은 딱딱하지만 마음만은 말랑거린다. 퇴근 후에는 곧장 버스에 올라탄다. 나는 어디로 가는가. 자취방으로 향하지만 여전히 집에 간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나도 차라리 누군가의 비닐봉지에 담겨 그의 집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도 든다. 퇴근길의 버스는 가라앉기 쉬운 공간. 말랑하던 마음은 두 정거장도 가지 못한 사이에 뻣뻣해지려 한다. 나는 또다시 잠겨버리지 않기 위해 얼른 네임펜의 그 저지를 떠올린다. 저지를 입고 간 손님을 떠올린다. 마음은 금세 다시 녹는다. 둘 곳 없어 여기저기로 흐르면서도 고이지 않는다. 그렇게 흐르듯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집을 찾기 위해 집주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어떤 모양으로 굳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의 모양대로 흘러가는 삶. 목덜미에 낙서 된 치부를 지우지 않은 채로도 밖을 쏘다니는 삶.


내일 오후에 맞은편 빌라 할아버지는 또 담배꽁초를 줍고 있겠지. 옆집 사람의 단백질 음료는 또 줄지 않은 채 그대로일 것이다. 화장실에서는 웅얼거리는 전화 소리가 들리고 그 소리를 들으며 한숨을 내쉬는 하루하루가 계속될 것이다. 매트리스에 누워서도 불안은 불쑥 찾아올 것이고 마음은 자주 긴장 상태일 것이다. 집에 있으면서도 집이 없다고 느낄 것이다. 친한 언니를 만나면 더 이상 나의 비밀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매장을 나선 옷들은 언젠가는 또 한 번 버려질 것이다. 어쩌면 그 옷과 나는 다시 만나게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절망의 가능성 사이에서 하나 확실한 것은 나는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 담배꽁초를 줍는 할아버지와 어색하게 나누는 목례. 옆집 사람이 택배를 잘못 가져갔다며 붙여둔 죄송하다는 쪽지에 그려진 곰돌이. 화장실 너머 들려오는 우렁찬 웃음소리에 나 역시 가끔 터뜨리게 되는 실없는 웃음. 깊은 속마음은 말하지 않는다고 해도 친한 언니와 만나면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농담과 말장난과 유머. 그리고 월요일과 목요일마다는 창고에서 날 기다리는 옷들. 그 옷들의 집이 되어주는 손님들. 이 작은 희망들이 나를 절망 속에서도 살게 할 것임을 안다.


그 작은 사실을 곱씹으며 창밖을 바라본다. 묵묵히 굴러가는 버스에 몸을 맡긴 채 창문 너머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사람들과 나무들과 간판들을 구경한다. 누군가 살짝 열어둔 창문으로 불어오는 얇은 바람을 맞으며 그렇게 이동의 순간을 음미한다. 나는 지금 어디론가 가고 있다. 집은 없지만 집으로 가고 있다. 움직이고 있고 또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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