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 장례가 지나고 며칠 뒤, 결혼식이 열리는 곳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섬의 산간 마을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통코난의 지붕이었다. 양쪽 끝이 하늘로 치켜 올라간 곡선. 배 모양 지붕이 능선을 따라 줄지어 서 있어, 길을 잘못 들어도 저 지붕만 따라가면 마을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통코난, 이곳 토라자족의 전통 가옥이다. 집이라 부르기엔 담고 있는 이야기가 많고, 상징이라 부르기엔 지금도 사람이 살아 숨 쉰다. 이곳에서 집은 거주 공간이기보다, 조상과 후손이 동시에 드나드는 자리다.
지붕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장식이었다. 층층이 세워진 물소의 뿔. 가까이 다가가 보니, 그것은 장식이 아니라 장례 의식에서 바쳐진 실제 물소의 뿔이었다.
토라자족에게 물소는 재산이자 힘이고, 삶과 죽음을 이어주는 존재다. 망자가 저세상으로 가는 길에 반드시 필요한 동반자라고 믿는다. 그래서 이 뿔들은 부의 과시라기보다, 떠나는 이를 끝까지 책임졌다는 기록에 가깝다.
집 앞에 쌓인 뿔은 그 가문의 경제력과 위상을 보여준다. 장례에 바쳐진 물소의 수만큼, 이 집이 감당할 수 있었던 책임과 헌신이 드러난다. 햇살을 받아 단단하게 빛나는 뿔들은 세월의 층처럼 겹겹이 쌓여 있었다. 굽은 곡선은 위로 치켜들 린 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마치 "우리는 여기까지 왔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카메라는 본능처럼 그 선을 따라 움직였다. 구조를 먼저 이해하려는 사람의 습관일 것이다. 나는 그 아래를 보았다. 지붕 아래 모여 있는 사람들, 그림자 속에 앉은 노인, 기둥에 기대 선 아이들. 같은 장면이었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곳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 집은 잠을 자고 비를 피하는 공간이 아니다. 한 가문의 이름이 머무는 자리이고, 조상이 내려다보는 자리다. 탄생과 혼례, 장례와 제의 같은 삶의 중요한 순간들은 모두 이 집을 통과한다. 그래서 통코난은 '사는 집'이라기보다 '이어지는 집'에 가깝다.
마을에는 큰 장례가 열리고 있었다. 멀리 떠났던 가족들이 돌아와 앞마당을 가득 메웠다. 물소가 묶이고 북소리가 울렸다. 화면으로 보면 규모가 먼저 보인다. 제물의 수, 모여든 사람의 숫자, 정해진 의식의 순서.
하지만 조금 더 오래 바라보면 다른 장면이 보인다. 오랜만에 만난 형제가 어색하게 웃는 순간, 아이가 '장례식'이라는 말보다 '사촌'을 먼저 발견하는 표정. 슬픔과 웃음이 한 공간에서 동시에 존재하는 풍경.
이곳에서 죽음은 끝이 아니다.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도, 공동체는 다시 이어진다. 장례는 이별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관계를 재정렬하는 시간이다. 이곳에서는 슬픔을 과장하지도, 애써 누르지도 않는다. 그저 묵묵히 받아낸다.
며칠 뒤, 같은 마을에서 결혼식이 열렸다. 검은 옷 대신 붉은 옷이 모였고, 무거운 침묵 대신 웃음이 퍼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구조는 낯설지 않았다. 사람들이 다시 둥글게 모이고, 음식이 나뉘고, 한 쌍이 공동체의 중심에 섰다.
죽음과 결혼은 정반대의 사건이지만, 이 마을에서는 둘 다 '함께 있음'을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끝과 시작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다. 같은 마을에서 이어졌다. 이 반복이 이곳의 전통이고, 지속이다.
얼마 전, 딸도 미국에서 오래 산 베트남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화려한 장식과 서구식 편의가 가득한 공간 속에서도, 그들은 여전히 전통의 의례를 중심에 두고 시간을 쌓아가고 있었다. 요즘처럼 AI와 디지털 기술이 모든 것이 빠르게 바뀌는 시대에도, 공동체와 전통을 지키려는 손길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이 글을 쓰며 나는, 딸이 보내준 결혼식 사진과 영상을 보면서 통코난 아래 결혼식과의 공통점을 떠올렸다. 전통은 시대와 공간을 넘어 사람과 시간을 이어주는 끈으로, 지금도 단단히 이어지고 있었다.
결혼식이 끝난 뒤, 취재진이 신혼부부에게 물었다. 도시에는 더 편리한 집들이 많은데, 통코난은 불편하지 않겠느냐고.
계단은 가파르고, 방은 나뉘어 있지 않고, 바람은 잘 통하지만 사생활은 조금 덜 보장되는 집에서 신혼을 시작해도 괜찮겠느냐는 질문이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보더니 웃었다. 설명이 필요 없다는 웃음이었다. 통코난에서 살겠다고,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마치 "왜 숨을 쉬느냐"는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편리함을 두고 불편함을 선택하는 일은 겉으로 보면 비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들에게 통코난은 가장 확실한 자리였다. 물은 더디게 흘러도 기억은 깊게 흐르고, 벽은 얇아도 관계는 두텁다.
현대식 집이 개인의 안락함을 보장한다면, 이 집은 세대의 연속성을 지킨다. 속도 대신 방향을, 독립 대신 연결을 택한 선택이다.
배 모양의 지붕을 다시 올려다본다. 조상이 타고 왔다고 전해지는 그 배는 여전히 사람들을 태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고, 누군가는 새로 올라탄다.
배는 멈춰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세대를 실은 채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카메라는 계단을 오르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담았고,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어떤 집은 삶을 편하게 만들고, 어떤 집은 삶을 이어지게 만든다. 통코난은 분명 두 번째에 가까운 집이었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고, 또 누군가는 그 자리를 지키며 하루를 이어간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을 쌓고, 관계를 이어가며, 그렇게 서로의 삶을 조용히 지탱하고 있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 우리 역시 각자의 통코난 아래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곳에서는 오늘과 어제, 그리고 내일이 서로를 끌어안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