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 많은 은행일수록 위험하다? – 유동성의 역설

은행의 돈은 ‘보관’이 아니라 ‘운용’된다

by LIFOJ

“예금이 많으니까 그 은행은 안전한 거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예금이 많다는 건 신뢰가 높다는 뜻이고,
고객이 많다는 건 튼튼하다는 증거야.”

언뜻 맞는 말처럼 들린다.
하지만 이 말은 ‘은행의 논리’가 아니라,
‘고객의 감정’에 가깝다.

은행의 본질은 돈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은행은 돈을 굴리는 곳, 즉 레버리지를 활용해 수익을 내는 회사다.
예금이 많다는 건 곧, 많이 굴려야 할 돈이 많아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예금은 은행의 자산이 아니라 ‘부채’다

회계의 시선으로 보면 은행의 예금은 자산이 아니다.
은행이 나중에 반드시 돌려줘야 할 부채다.

즉, 고객 입장에서 예금은 '내 돈'이지만,
은행 입장에선 언젠가 상환해야 할 '빚'이다.

그래서 은행은 예금을 그저 보관하지 않는다.

기업에 대출하거나

프로젝트 파이낸싱에 투자하거나

유가증권이나 파생상품으로 운용하거나

해외 대출 상품에 재투자하거나

이렇게 예금을 수익화해야만 살아남는다.


예금이 많아지면, 오히려 ‘위험해질 수도 있다’

은행 입장에서 예금은 고정 비용이다.
특히 단기 예금일수록,

언제 빠질지 모르기 때문에

그에 맞는 단기 운용처를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고객은 언제든 돈을 빼갈 수 있고

시장 상황은 언제든 뒤집힐 수 있으며

유동성 위기는 한순간에 온다.

그 결과,
‘예금이 많다’ = ‘부채가 많다’ = ‘운용 압박이 커진다’
즉, 예금이 많다고 무조건 안전한 게 아니라
더 공격적인 운용이 필요해질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유동성의 역설'이란 무엇인가?

은행은 대부분 ‘부분지급준비제도’를 따른다.
예를 들어, 고객이 1,000억 원을 예치해도
그 중 100억만 실제로 보유하고,
나머지 900억은 시장에 ‘굴린다.’

그러다 문제가 생기면?

고객이 한꺼번에 예금을 인출하려고 할 때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손실이 발생했을 때

금리가 급격히 변동해 자산 가치가 하락할 때

은행은 ‘현금이 있지만 못 꺼내는’ 상황이 된다.
이것이 바로 유동성 위기, 그리고 뱅크런이다.


예금자보호는 만능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안심한다.
“예금자보호가 되잖아. 5천만 원까지는 안전하대.”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보호 절차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법정관리 상태로 넘어가면 계좌가 동결된다

회사, 사업자, 단체 명의 계좌는 보호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전에 예측할 수 있는 징후는 없다

예금자보호는 ‘최후의 안전망’일 뿐,
은행 자체의 위험 구조를 보완해주지는 않는다.


은행은 언제나 ‘신뢰’로 운영된다

모든 금융 시스템은 ‘신뢰’로 유지된다.
고객이 인출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시장 상황이 유지될 것이라는 가정 위에 서 있다.

그런데 신뢰는 늘 한순간에 무너진다.

실적이 좋던 은행이 갑자기 흔들릴 수도 있고

소문 하나에 고객이 대거 인출을 시작할 수도 있으며

금융당국이 뒤늦게 개입할 수도 있다

뱅크런은 언제나 “안전하다고 믿은 은행”에서 먼저 시작된다.


마무리 – 예금이 많다는 건 '운용 책임이 크다'는 뜻이다

은행이 안전해 보이는 이유는 ‘겉보기 신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신뢰를 만드는 건
실적이 아니라 유동성과 운용능력이다.

예금은 많을수록 좋은 게 아니다.
예금을 얼마나 유동적으로 운용할 수 있느냐,
그리고 위험이 왔을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관건이다.

예금이 많아서 안심된다는 말은
사실상 ‘부채가 많아져서 더 공격적으로 굴려야 한다는 뜻’일 수 있다.
은행은 고객의 안심을 기반으로 수익을 만든다.
그 구조를 아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돈은 더 안전해질 수 있다.


Reflection Question

내가 맡긴 예금은
정말 ‘보관’되고 있는 걸까,
아니면 ‘굴려지고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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