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와 순진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랑
영국의 테이트 미술관(Tate Modern Museum)을 방문하면, 수면 위에 가련하게 떠 있는 한 여성이 그려진 작품을 마주할 수 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이 여성의 드레스와 고운 손 그리고 흰 피부는 그녀의 신분이 중·상위층임을 암시한다. 그녀의 짙은 갈색 머리카락은 물에 퍼져있고, 얼굴을 자세히 살펴보면, 초점 없는 눈빛과 살짝 벌어진 그녀의 입술이 보인다. 혈색이 없어 보이는 그녀의 창백한 피부와 대조되는 붉은 손끝과 뺨은 그녀가 물속에 오랫동안 있었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동시에 붉으면서도 창백하고 반짝이는 그녀의 피부는 생사를 불분명하게 한다. 화관을 했었던 흔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목에는 보라색 꽃으로 엮은 장식품이 걸려있다. 이 외에도 그녀의 주변에 노란색·붉은색·푸른색·보라색·흰색·분홍색의 다양한 꽃들이 자리한다. 그녀의 오른손은 그 꽃들의 일부를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가 떠 있는 냇가 주변의 수풀에도 흰색 꽃이 자리하고 있다. 꽃의 형상들이 제각기 다르다는 것은 명확히 구분되어 사실적인 묘사임이 눈길을 끌지만, 꽃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꽃인지 그 종류를 가늠하기란 어렵다. 그녀가 입고 있는 고전적인 풍의 드레스 또한 눈길을 끄는데, 그 드레스 자체가 하나의 식물이라도 된 것처럼 얼기설기한 식물의 패턴으로 디자인되어 있다.
이 작품은 라파엘전파(Pre-Raphaelites)의 형성에 일조한 존 에버렛 밀레이(John Everett Millais, 1829-1896)의 <오필리아 Ophelia >(1851-1852)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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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 그녀는 누구인가?
윌리엄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햄릿 Hamlet 』(1601)에 등장하는 오필리아는 주변의 상황으로 인해 광증이 생긴 수동적이고 안타까운 인물이다. 오필리아는 전체 20장면으로 구성된 『햄릿』에서 5장면에만 등장한다. 오필리아는 햄릿을 사랑했다. 그러나 햄릿은 오필리아의 아버지를 죽였고, 그로 인해 오필리아는 정신분열을 겪으며 자살한다.
오필리아라는 역할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비평가에 따라 차이를 보이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순종적이고 이용당하는 여인’, ‘성적 욕망이 가득한 여왕 거트루드(Gertrude)와 다르게 순결한 여인’, ‘자기주장이 없는 여인’, ‘외부 요인으로 미친 여인’이다.1) 셰익스피어가 오필리아에 대해서 암시하는 것은 그녀가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정신분열을 겪고 익사로 죽었다는 것이 전부이기 때문에, 오필리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다.2) 이는 결과적으로 화가들이 오필리아를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발판이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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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필리아를 주제로 삼은 화가들은 많다.
그 중에서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어떨까?
밀레이의 작품에 묘사된 각종 꽃들은 텍스트에 직간접적으로 언급된 것이며 죽음, 사랑, 광기, 고독 등의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오필리아가 떠 있는 냇물의 형태의 표현 방식을 통해서 밀레이가 셰익스피어의 텍스트에 충실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면 밀레이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를 일종의 삽화처럼 시각화한 것이 전부일까?
밀레이는 오필리아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
밀레이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그는 작품에 부여한 각각의 요소를 신중히 고민해서 작업했다. 빅토리아 시대에는 작품에 묘사된 여성의 이미지가 ‘타락한 여성(fallen woman)’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제거하기 위해 익사 직전의 모습으로 표현하는 것을 선호하였다.3) ‘타락한 여성’은 빅토리아 시대의 중반기에 만연했던 개념으로, ‘fallen(떨어지다, 타락하다)’이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으며, 여성이 익사한 결과론적인 이미지로 은유되었다. 그래서 당시 화가들은 떨어지기 직전, 익사 직전의 모습을 통해서 ‘타락한 여성’으로 읽히는 것을 방지했다.
그러나 밀레이가 표현한 오필리아는 물에 빠져있다. 그렇지만 작품 속 오필리아는 아직 살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거트루드가 오필리아의 죽음을 ‘진흙 속 죽음’이라고 묘사한 것을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았다. 오히려 ‘진흙 속 죽음’이라는 대사와 대조적으로 빛나는 은색 드레스를 선택함으로써 그녀의 죽음을 고결하게 만들었다. 더 나아가 팔을 벌리고 있는 오필리아의 기독교적 자세와 찬송가를 부르며 죽었다는 『햄릿』 속의 텍스트처럼 입을 벌리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성모 마리아를 떠올리게 한다.4) 이는 빅토리아 시대에 오필리아는 참회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성녀 막달렌과 연결되어 은유적인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하였음을 떠올리게 한다.5)
치밀하고도 세심한 관찰과 작업을 통해 완성된 밀레이의 오필리아는 물속에 떠 있으나 눈을 감지 않은 모습을 보이는데 동시에 그녀에게서는 마치 시간이 멈추기라도 한 듯이 그 어떠한 움직임도 느껴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밀레이는 기독교 도상과 자연환경의 사실적이면서도 자세한 묘사를 통해 각 의미를 명확히 들어냄으로써 오필리아의 순수성에 영원성을 부여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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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밀레이는 죽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오필리아의 마지막 순간을 경건하게 묘사하며, 당대 빅토리아 시대와는 다른 방식으로 그녀의 죽음과 그녀를 아름답게 묘사하였다. 밀레이의 작품은 오필리아라는 역할에 대한 빅토리아인들의 관념과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셰익스피어 작품의 일러스트 형식 그리고 아카데미에 대한 도전으로 읽힌다.
결과적으로 이 작품은 전통적인 아카데미즘에 대항한 일종의 그의 선언서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밀레이는 오필리아에 성녀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일까.
성녀 하면 고결하고 순수한 이미지가 떠오르고는 한다.
주변 누구에게도 돌려받지 못할 사랑을 한 오필리아의 모습은 그녀가 순수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아니면 순진한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일까.
순진과 순수. 그 경계에서 오필리아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당신의 사랑은 어떤가요?”
과연 셰익스피어는 오필리아라는 여성에 대해 무슨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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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열을 겪기 전까지는 수동적이고 미숙한, 어찌 보면 처음 사랑을 시작하는 모두의 모습을 담아냈다고 볼 수도 있는 오필리아였다. 오히려 정신분열을 겪으며 자신의 생각을 좀 더 드러내게 된 오필리아의 모습도 인상 깊게 볼 부분 아닌가.
나는 오필리아를 동정하지도 않으며, 그녀의 맹목적인 사랑의 결과가 죽음이라는 것이 안타깝지 않다.
오필리아가 물에 빠지게 된 것은 사고였으나,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느긋하게 찬송가를 부르며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을 보낸 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수동적이던 그녀가 온전하게 자신의 자의로 선택한 것이 죽음이었다. 그런 그녀의 삶과 선택을 안타깝게 여기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끝까지 ‘비운의 여자’로 낙인찍는 것은 아닐까?
1) 오필리아에 대한 해석은 Guilfoyle, Cherrell. “‘Ower Swete Sokor’: The Role of Ophelia in ‘Hamlet.’” Comparative Drama 14:1 (1980): 3–17. Ronk, Martha C. “Representations of ‘Ophelia.’” Criticism , 36:1 (1994): 21-43. Parker, Patricia. et al., eds. Shakespeare and the Question of Theory. Routledge, 2004. Webster, Jamieson. et al., eds. The Hamlet Doctrine: Knowing Too Much, Doing Nothing. Verso Books, 2013. Falchi, Simonetta. “Re-mediating Ophelia with Pre-Raphaelite Eyes.” Interlitteraria 20:2 (2015): 171-83 참고.
2) A.C Bradley, Shakespearean tragedy : Hamlet, Othello, King Lear, Macbeth (Toronto: Macmillan, 1971), 129.
3) 당시의 ‘타락한 여성’이란 가질 수 없는 것에 욕심을 보이는 여인, 음란하고 추잡스러운 여인 등을 일컫는다. 이들은 죄인이지만 회개를 통해 스스로 만회할 수 있었다. 용서를 구함에 있어서 그 중심에는 가족이 있었다. 이 용어에 암묵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의미는 젊은 여성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명예로운 위치가 누군가의 딸, 어머니, 아내라는 것이다. Nochlin, “Lost and Found: Once More the Fallen Woman,” 141. ; Kimberly Rhodes, Ophelia and Victorian visual culture : representing body politics in the nineteenth century (Burlington, Vt.: Ashgate, 2008), 94.
4) Lavinia Hulea, “Pre-Raphaelites Painting Shakespeare’s Women,” Gender Studies 11:1 (2012): 131.
5) Bridget Gellert Lyons, “The Iconography of Ophelia,” ELH 44:1 (1977): 60-64. Guilfoyle, "Ower Swete Sokor," 165.
2021년에 소논문으로 다루었던 주제를 다시 꺼내어, 제 생각과 마음을 더해 새롭게 풀어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