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우리 집은 꽤 잘 살았다. 처음부터 유복했던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고향 친구들과 시작한 사업이 단 기간에 성공한 덕이었다. 해마다 이사를 가고, 갈 때마다 집 크기가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걸 본 내게 '이사'란 긍정적인 행위였다. 얼마나 더 좋은 집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생각에 설렜다. 가끔 심심할 때면 부모님께 '우리 또 이사 가면 안 돼?'하고 묻곤 했다. 이삿날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부모님을 졸라 이사 갈 집을 미리 보고 온 날엔 신나서 내 이삿짐을 먼저 싸두고 날짜를 셌다.
내가 가장 좋아했던 집은 종합체육시설 앞에 있는 한 빌라의 가장 꼭대기 층이었다. 당시 나는 'S보드'라고 불리는 양발을 움직여 탈 수 있는 보드를 갖는 게 소원이었다. 한 번은 아버지와 함께 집 근처 스포츠 용품 판매점 간 적 있는데, 20만 원이라는 가격을 듣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어린 내가 생각하기에도 비싼 가격이었다. 당시 내가 타고 다니던 마을버스의 초등학생 버스비가 200원이었으니 말이다. 현재 물가에도 그리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어느 정도 경제관념은 있는 초등학생으로서 그 가격을 듣고도 사달라고 조르는 짓은 하지 못했다.
여전히 S보드를 마음에 품고 있던 어느 날, 학교 운동회가 열렸다. 학교 구령대에 앉아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운동장 한쪽에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호피무늬 선글라스를 쓰고, 금 목걸이를 하고 있는 아버지는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보다 눈에 띄는 것은 아버지가 한쪽 어깨에 메고 있는 기다란 가방이었다. 그 속에 S보드가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린 나는 곧장 뛰쳐나갔다. 자리를 이탈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속에 내가 원하는 것이 있는 게 맞는지 당장 확인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좀처럼 쉽게 원하는 것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내 것이냐 묻는 내게 시치미를 뚝 떼면서 잠깐 맡아주는 것이라고 능청을 떨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가 거짓말할 때의 습관을 잘 알았고, 아버지의 입술이 씰룩이는 것을 확실하게 보았다. 자리로 돌아온 내게 주변 친구들이 부러워하는 눈빛을 보냈다. 친구들도 그게 S보드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난 그때 우리 학년에서 유일하게 S보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얼른 운동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청팀이 이겼는지, 백팀이 이겼는지 기억은 나질 않는다. 다만 아버지가 내리쬐는 태양을 맞으며 한쪽 어깨에 보드 가방을 메고 있던 장면만큼은 생생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거실에서 보드 타는 연습을 했다. 거실이 보드 연습을 하기에 충분히 넓었던 덕이다. 장식장을 거치대 삼아 붙잡고 균형 잡는 연습을 했다. 그 장식장은 아버지가 새로운 집에 맞춰 엔틱풍으로 가구를 바꾸면서 새로 구매한 장식장이었다. 아버지의 양주와 다양한 곳에서 사모은 기념품들이 즐비했다. 아버지는 장식장을 제일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 장식장을 붙들고 연습을 한 끝에, 어느새 난 거실과 주방을 자유롭게 오갈 만큼 보드에 익숙해졌다. 저녁마다 가족들과 함께 가는 산책로 자전거용 도로에서 나는 물 만난 물고기처럼 보드를 탔다.
투명한 실리콘 바퀴가 새까매졌을 무렵, 문방구에서는 저렴한 버전의 S보드가 나왔다. 고작 4만 원. 동네 문방구 곳곳에는 'S보드 사만 원'라고 적힌 종이가 붙어있었다. 급격히 떨어진 보드의 가격처럼, 아버지의 사업도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새로 이사 간 집은 전에 살던 곳의 절반도 안 되는 크기였다. 거실에 놓여있던 러닝머신은 처분했고, 크다고 생각한 적 없는 장식장은 거실의 양쪽을 차지해서 답답했다. 소파에 앉으면 TV가 너무 가까워 눈이 아팠다. 방이 4개에서 3개로 줄어 동생은 부모님과 함께 안방을 써야 했다. 처음으로 '이사'라는 것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나는 더 이상 보드를 타지 않았다. 이미 한 차례 유행이 지났고, 중학교에 입학했으니 애들 장난 같은 놀이에 쏟을 시간이 없었다. 이사를 가면서 체육시설과 멀어져 마땅히 탈만한 곳도 없었다. 우리 가족은 이사를 온 뒤로 저녁에 산책을 가지 않았다. 보드를 볼 때마다 넓었던 거실이 생각났고, 달라진 처지를 비관하게 됐다. 나는 보드를 가방에 넣어 베란다 한쪽 구석으로 치웠다.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이사가 지긋지긋했다. 살고 있던 집을 팔고 전세로. 전세에서 월세로. 그리고 결국 반지하로 이사했을 때가 되어서야, 고작 보드 하나 때문에 달라진 처지를 비관했던 것이 얼마나 복에 겨웠던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다. 정말로 집이 망했다는 게 실감 났다. 대놓고 불평하는 짓은 하지 못했다. 내가 누린 것과 비교도 안 될 만큼 유복했던 환경에서 자란 어머니는 그 빌라에서 본인 집에 세 들어 살던 고향 사람을 마주쳤다고 했다. 창피함으로 물든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고등학교는 걸어서 십분 거리에 있는 학교 대신 멀리 떨어진 학교에 지원했다. 학군과 친구 등 여러 이유가 있지만, 집을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있던 것도 분명했다. 버스비가 모자라 한 시간 정도 걸어 돌아오는 일이 잦아졌을 땐 이 결정을 살짝 후회하기도 했다.
아버지의 장식장은 반지하까지 따라왔다. 세트로 맞추었던 가구 중 대부분은 버리거나 지인에게 처분을 했지만 장식장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반면에 내 보드는 이사 중에 잃어버렸는지 버렸는지 알 길이 없었다.
정말 잠깐만 살 거야. 부모님에 내게 했던 그 말을 믿으며 현실에 순응했다. 하지만 순응했다고 해서 반지하에 사는 것이 창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한창 남들 시선이 중요할 때였으니까. 가끔 학교 선생님이 '그런 애들이 그러니까 반지하 사는 거야.'라는 발언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작아졌다. 그 발언에 맘 편하게 웃는 주변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다. 반지하의 삶을 고작 농담이나 조롱거리로 쓸 수 있는 그들의 무지함이 부러웠다. 집에 들어갈 땐 늘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사람처럼 걸음을 빨리 했다.
반지하의 단점은 여럿 있지만 그중 최악은 장마철에 있다.
며칠 째 장마가 이어졌다. 그 해 장마가 유난히 심했다거나, 많은 양의 강수량이 단기간 내에 쏟아졌다거나 한 것도 아니다. 보통의 장마였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고, 나는 혼자 거실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물소리가 나는 것은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꼈다. 문을 열었을 때, 변기에서 하수구에서 물이 역류해 쏟아지는 광격을 목격했다. 그리고 그 역류한 물은 곧 거실로 흘러나와 온 장판을 적셨다.
정신없이 물을 퍼냈다. 뒤늦게 연락을 받고 집에 온 아버지는 화났다는 말로 표현하기엔 조금 더 복잡한 얼굴로 거실을 닦고 또 닦았다. 가장으로서 느끼는 책임감, 수치심, 모멸감. 그런 감정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한바탕 난리가 끝난 뒤에 아버지는 숨을 크게 내쉬며 '다 됐다.' 하고 수건으로 몸을 툭툭 털었다. 그게 전부였다. 아버지와 나는 약속한 것처럼 그날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나는 비가 싫어졌다. 비가 오면 고작 '우산 없는데.' 따위의 걱정을 하던 내가 '집에 물이 역류했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을 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언젠가 반지하를 벗어나 다시 지상층으로 이사를 했을 때. 공교롭게도 이삿날 장대비가 쏟아졌다. 아버지는 주변에 떨어진 먼지를 쓸다 말고 창문을 활짝 열고 외쳤다.
'시원하게 와라. 시원하게.'
그렇게 말하는 아버지의 표정은 그렇게 후련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제야 난 그날의 기억이 아버지에게도 상처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는 동안 이사는 계속 이어졌고 아버지의 장식장은 늘 따라다녔다. 그리고 마침내 지금의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면서 아버지는 장식장을 버렸다. 오래된 것들을 다 버리고 깔끔하게 새로 사고 싶다는 이유였다. 엔틱과는 거리가 먼 화이트 톤의 가구로 집을 채우면서 나는 그 장식장이 지금 집에 어울렸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더 이상 과거의 영광 속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택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주거 환경을 옮기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진정한 의미의 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몇 년째 지금 집에서 사는 중이고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여전히 난 그 반지하를 떠올린다. 다시는 반지하로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때의 기억이 없었다면 나는 자연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는 것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나의 무지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줬을지도 모른다. 진부한 말이지만 아무리 힘들고 끔찍한 기억이라 했을지라도 모든 경험에는 배울 점이 있다는 걸 알게 해 준 곳도 그곳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