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의 자기결정권

by 남경훈

중환자실에 입실하게 되면 다양한 종류의 의학적 동의서를 쓰게 된다. 입실 자체와 관련된 동의서를 시작으로, 각종 시술, 연명 치료 계획에 이르기까지 보통 4~5가지 이상의 동의서를 작성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병원은 왜 이러한 동의 절차를 요구하는 것일까? 누가 이러한 동의서에 서명하고 작성하는 것이 적절할까?


현대 의료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다. 말 그대로, 자신의 건강과 생명에 관련된 의료 행위에 대해서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뜻한다. 이에 따라 의사는 환자에게 법적으로 설명 의무를 가진다. 이는 심각한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는 고위험 검사나 치료에 앞서, 환자들이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환자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자기결정권을 실현하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동의서는 충분한 설명을 듣고 난 후, 환자 본인이 자필로 작성하고 서명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 특히 중환자실에서는 환자가 직접 설명을 듣지 못하고 동의서를 작성할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한다. 환자의 의식 저하, 인지 기능 저하, 심각한 질병 등으로 인해 실제 현장에서는 환자의 가족들이 동의서를 작성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료진이 환자 및 그 가족과 함께 적절한 치료 목표를 세우고, 올바른 선택을 함께 해 나가는 과정을 '공유 의사결정(shared decision-making)'이라 한다. 이는 환자의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기본적으로 존중하며, 의료진과 환자가 협력하여 최선의 결정을 도출하는 윤리적·임상적 접근 방식이다. 만약 환자가 이 과정을 진행하기 어렵다면, 법정대리인인 가족이 환자의 역할을 대신한다. 이때 가족들은 단순한 보호자가 아닌, 환자의 가치와 선호를 대변하는 대리인이다. 가족의 의사가 아니라, 평소 환자가 중시하던 바람과 신념을 반영하는 결정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 핵심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한국의 의료 시스템에서는 이러한 공유 의사결정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때도 많다. 외국처럼 주치의 시스템이 없어 한 명의 의사와 지속적으로 만나며 건강 문제를 포괄적으로 상의할 수 있는 관계가 형성되기 어렵다. 특히 5분 진료가 보편적인 한국의 의료 환경에서 의사가 환자(또는 환자의 가족)에게 충분한 설명을 하고 질문도 받으며 함께 치료 목표를 설정하고 결정하는 과정을 수행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나 부족하다. 병원에 입원하게 되면 또 어떨까? 비록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한국에서는 회진 외에는 의사를 만나기가 힘들고, 회진 시간조차 질문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분위기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내가 경험한 미국의 의료 시스템에서는 초진 환자에게 30분, 재진 환자에게 15분의 진료 시간이 배정되며, 그렇게 만난 의사와는 지속적인 주치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 형성이 가능하고, 환자가 자신의 건강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상의할 수 있었다. 또한 입원 환자에게도 의사는 자율성과 자기결정권을 지켜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다. 물론 이는 의료 소송에 대한 대비라는 방어적 진료의 성격도 있지만, 동시에 환자 중심 의료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고 있었다.


다행히 최근 한국에서도 환자 본인과 보호자들이 환자의 상태를 이해하고자 노력하며, 의사에게 질문하고 설명을 듣고자 하는 경향이 점차 증가하고 있다. 10년 전만 해도 많은 환자들이나 가족들이 모든 검사나 치료를 의사가 알아서 결정해 주기를 원했던 것 같다. 공유 의사결정 과정을 환자들과 시도해 보면, 어떤 경우에는 이를 의사의 책임 회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내가 가족들에게 환자의 상태를 자세히 설명하고, 어떤 검사나 치료를 함께 선택하자고 하면 불쾌감을 표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건 의사가 알아서 판단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혹은 “왜 우리한테 묻죠?” 하며 오히려 의사의 전문성을 의심하는 분위기가 발생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보호자들이 의학적 상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고, 환자의 상태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알고자 하며, 치료 방향에 대한 논의에 참여하려는 분위기가 늘고 있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경우에 따라 환자의 상태에 대해 설명한 후, 보호자에게 인터넷 등을 통해 추가 자료를 찾아보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예컨대 ‘패혈증’이라는 진단명을 들었을 때, 과거에는 그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지금은 그 위험성과 경과에 대해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앞으로도 한국 사회에서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보다 적극적으로 존중받고, 공유 의사결정이 일상화되기를 기대한다. 의사가 일방적으로 검사나 치료를 이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 효용과 한계를 환자가 이해하고 ‘선택하는 것’이 보편화되었으면 한다. 의료진이 주도하는 일방적인 결정이 아니라, 환자가 자신의 삶과 치료에서 주체적인 위치를 갖는 문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환자는 더 이상 조연이 아니라, 자신의 건강을 이끌어 가는 주연 배우가 되어야 한다.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7화가족으로서 최선을 다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