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연명 셔틀’이라는 단어를 처음 들었다. 고령의 환자가 종합병원, 특히 중환자실에 입원해 치료를 받은 뒤 후유증이 남고 입원치료를 마무리하면서 요양병원으로 퇴원한다. 그러다 다시 같은 질환이나 혹은 또 다른 질환으로 종합병원에 재입원하는 일이 반복된다. 이 과정에서 사설 구급차로 응급실, 종합병원, 요양병원을 몇 주 혹은 몇 달에 한 번씩 오가게 된다. 이러한 모습을 마치 구급차를 셔틀버스처럼 타고 다니는 모습에 비유해 ‘연명 셔틀’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많은 고령 환자들은 가벼운 질환이 발생해도 중환자실로 오는 경우가 많다. 환자 본인의 면역력이 충분하지 않기도 하고, 기존의 만성 질환 등으로 인해 가벼운 질환이어도 상태가 곧잘 악화되어 중환자실로 오는 것이다. 가령 폐렴이나 요로 감염등이 발생하면 패혈증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중환자실로 이송되어 인공호흡기 등의 힘든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들이 발생한다. 운이 좋아 생존하더라도, 집중치료 후 증후군(post- intensive care syndrome)이 발생한다. 이로 인해 요양병원으로 퇴원할 수밖에 없게 되고 이런 과정이 반복된다.
현대 의학의 발전으로, 이제는 임종이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과정’이 되었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있다. 의학 기술이 발전하며, 이전에는 치명적이었던 질환들이 '관리'되면서 기대 수명이 점점 길어지고 있다. 예전에는 일상생활 중 중병에 걸려 며칠 앓다가 임종을 맞이했다면, 이제는 의료기관에서 치료를 받으며 죽음의 과정이 서서히 진행된다.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년씩 길어지는 것 같다. 이제는 죽음조차 기계의 힘으로 늦출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숨을 쉬지 못하면 인공호흡기를, 심장이 뛰지 않으면 에크모(ECMO)라는 기계로 환자를 ‘살아 있게’ 만들 수 있다.
처음 고령의 환자가 중환자실에 입원하고 치료를 받게 되면, 가족들은 당황하고 여유가 없다. 환자 또한 중환자실이 처음이라, 가족과 의료진의 결정에 맡겨진 채 치료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게 중환자실, 요양병원, 응급실을 반복하는 삶이 시작된다. 어떤 환자들은 본인도 모르게 ‘연명 셔틀’에 올라타게 되었다고 하소연한다. 1년에 두세 번씩 중환자실에 입원하는 환자들을 마주하다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가족들 또한 지쳐가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젠가부터 ‘웰다잉’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마도 죽음이 이제는 ‘과정’이 되어가며 생겨난 말인 것 같다. 어떻게 임종을 맞이하는 것이 ‘웰다잉’일까? 과연 ‘좋은 죽음’이라는 것이 가능할까? 중환자실에서 일하며 ‘존엄한 죽음’이란 어떤 것인가를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환자가 고통 없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일까? 기계에 연결되지 않은 채 자연스럽게 죽는 것을 의미하는 걸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환자 본인이 원하지 않는 ‘연명 셔틀’을 타고 의료기관을 전전하다가 끝내 기계에 연결된 채 임종을 맞이하는 것은, ‘웰다잉’과는 거리가 있다.
그래서 나는 때때로 초고령 환자들의 보호자(자녀)들에게 이번 중환자실 치료를 마친 후 다시는 중환자실로 오지 않는 것도 생각해 보기를 권유하기도 한다. 요양병원으로 퇴원하는 환자들에게는 요양병원에서 할 수 있는 치료까지만 받고, 종합병원에는 오지 않는 선택도 할 수 있다고 자주 이야기해주곤 한다. 보호자들 중에는 이러한 선택지가 있다는 것조차 들어본 적 없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때로는 그런 선택지를 알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받은 적도 있다. 어떻게 보면, 중환자실 밖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웰다잉’의 과정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떠한 치료를 선택할 권리가 환자에게 있듯이, 원하지 않는 치료를 거부할 권리 또한 환자에게 있다. 환자에게는 자신의 건강과 관련된 의사결정을 할 자기결정권이 있기 때문이다. 환자의 가족도 대리인으로서, 환자가 결정했을 법한 선택을 대신 내려줄 수 있다. 중환자실의 치료를 받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결과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나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중환자실 치료 또한 거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환자에게 '웰다잉'을 제공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말이다.
아직도 한국 사회에서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불편하게 여긴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은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내가 생각하는 중환자실 의사의 또 다른 역할은, 환자와 가족이 임종의 과정을 가능한 한 덜 고통스럽게 지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환자의 죽음이 존엄하고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환자도 그리고 그 가족들도 필요 없는 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용기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의료진이 더 많아지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