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으로서 최선을 다 한다는 것

by 남경훈

모든 세상의 일이 그렇듯, 좋은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은 없다. 의료도 마찬가지다. 모든 의학적 검사와 치료는 환자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시행되지만, 그에 반하는 부작용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중환자실에서 시행되는 치료들은 고위험인 경우가 많다. 죽음을 피하게 해주는 치료들이지만, 그만큼 심각한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중환자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혈압상승제'라는 약은 혈관을 수축시켜 저혈압 쇼크를 개선해 주지만, 말단 혈관들까지 과도하게 수축시켜 손가락, 발가락 등의 괴사가 발생하기도 한다. 호흡을 돕기 위한 기도 삽관과 인공호흡기는 새로운 폐렴을 발생시키기도 한다.


의사들은 어떤 검사나 치료를 결정할 때마다 그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머릿속으로 저울질한다. 이것이 이 환자에게 얼마나 이득이 될 것인지, 그리고 반대급부로 얼마나 위해를 가하게 될지를 판단한다. 가령 폐렴이 의심되는 환자에게 엑스레이를 찍을지, CT를 찍을지 결정할 때, 두 가지 검사 중 최소의 위해(방사능 노출)를 가하면서도 얻을 수 있는 이득(폐렴 및 다른 폐질환의 진단)이 최대인 방법을 선택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젊고 건강했던 환자들의 중환자실 치료는 위해에 비해 이득이 명확하다. 일종의 '하이리스크 하이리턴'이다. 중환자실에서 고위험 치료를 받고 후유증이 남더라도, 생존하여 재활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면 삶의 질을 유지하며 수십 년을 더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고령 환자나 말기 암 환자같이 기대 여명이 길지 않은 경우는 어떨까? 감수해야 할 위험에 비해 이득이 높지 않은 환자에게 고위험 검사와 치료를 시행할지 여부는 신중히 고려해야 한다.


기대 여명이 길지 않거나 여러 가지 이유로 삶의 질이 높지 않은 환자에게 중환자실의 힘들고 고통스러운 치료를 시작할 때, 과연 그 환자에게 이를 감내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특히 요양병원에서 응급실을 거쳐 중환자실로 입원하는 환자들이 그렇다. 80대, 90대의 환자들이 요양병원에 있다가 주로 폐렴이나 요로 감염으로 인해 패혈증이 발생한 경우이다. 이들 중 중증 치매까지 동반되어 의사소통이나 일상생활이 어려운 환자에게 중환자실 치료가 정말 필요한 것인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중환자실 입실은 대부분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발생한다. 그런 만큼 환자의 가족들은 당황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급작스러운 상황에서 대부분의 가족들은 신중한 의사결정을 내리기 어렵다. 게다가 의료진의 충분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의학적 지식이 많지 않은 가족들이 모든 검사나 치료의 부작용과 후유증을 정확히 이해하고, 동시에 환자의 평소 바람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하기는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은 그 순간, 중환자실 입실에 따른 고위험 검사 및 치료를 시행할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환자가 중환자실에 입실하고, 그 가족들과 면담을 할 때 당혹스러운 경우들이 있다. 첫 번째는 가족들과 중환자실 치료 방향에 대한 논의를 시작조차 할 수 없을 때이다. 예를 들어, 환자의 가족이 모든 검사나 치료를 무조건적으로 거부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 거부의 이유를 물어보면 주로 치료비에 대한 부담 때문으로 밝혀지기도 한다. 이럴 땐 병원의 사회사업팀이나 관계 기관을 통해 병원비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돕고 나면, 이후 치료 과정이 수월해지는 경우가 많다.


두 번째 경우는 나를 더 당혹스럽게 만든다. 고령의 부모를 둔 자녀나 회복이 불가능한 말기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의 가족들이 가능한 모든 검사와 치료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경우다. 환자의 상태, 치료의 리스크, 예상되는 결과와 그 한계, 중환자실 치료 이후의 삶에 대한 고려 없이, 그저 어떻게든 환자가 살아만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가족으로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행동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한국의 독특한 문화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물론 의사로서 환자와 가족의 바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환자와 가족이 비현실적인 치료 목표와 기대를 가지고 있을 때,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적절한 방식으로 설명해 주는 것 또한 의사의 역량이라고 생각한다. 기대 수명이 길지 않은 환자에게는 고통이 덜한 검사나 치료를 권하는 것이 환자를 위한 길일 수 있다. 최선의 치료는 아닐지라도, 생존 가능성은 조금 낮더라도 고통이 덜한 차선의 치료 말이다.


가족으로서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 정말 환자를 위한 것일까? 평소 “죽더라도 인공호흡기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이야기해 온 환자가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나에게 인공호흡기 치료를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런 경우는 흔치 않지만, 나는 되도록이면 환자의 평소 뜻을 존중해 가족들을 설득하려고 한다. 환자 본인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자기결정권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는 가족의 뜻에 반해 환자의 평소 바람을 지키기란 쉽지 않다. 특히 법적 분쟁의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서는 더욱 그렇다. 환자가 연명치료계획서를 작성했더라도, 혹은 유언까지 남겼더라도, 결국 어쩔 수 없이 기도삽관과 인공호흡기를 시행하게 되는 현실이다. 연명치료계획서와 유언만으로는 의사가 가족의 뜻에 반한 의학적 선택으로 인해서 환자가 사망하게 되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본인의 결정이 환자에게 해가 되지 않을지 신중히 판단한다. ‘해를 끼치지 말라(To do no harm)’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한 구절처럼, 환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최소한 해는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서양 의학의 기본 윤리이기도 하다. 의료진은 가족이 원하는 검사나 치료가 정작 환자 본인에게 해가 되지는 않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가족들은 평소 환자가 바랐던 바가 무엇이었는지를 되짚어보고, 검사의 진행과 치료 여부를 결정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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