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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녹슨 칼 07화

토(土)속신앙

by 고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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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찬란한 식민 시민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킨 적이 없지만 그렇게 되어버렸다.






땅이 놀면 천벌받는다.


아버지 누가 천벌을 준다고 그래요. 아무도 아무도 천벌 주지 않아요.


농부가 노는 땅을 만들어 땅에게 아무런 임무도 부여하지 않는 것은 큰 죄악이야.


그렇다고 왜 하루 일당도 안 나오는 농사를 몸 축내면서 왜 그렇게까지 해요.



너는 평생 이 땅에서 먹고 자고 학교도 다니고 일도 하고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그렇게 해도 알 수 없는 것이면, 알 필요도 없는 겁니다. 그냥 팔고 남은 생 편안히 지내세요.






아니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를 잡으러 온 거야. 그래서 소리를 꽤애애액 질렀지 나가라고, 여기가 어디라고 들어오냐고, 그랬더니 나를 한참을 째려보더니 나갔어.



아니 난 엄마가 한밤중에 소리를 지르길래 거실로 뛰어나갔지. 아버지도 놀래서 나오셨더라고. 엄마 얼굴이 창백해서 나도 엄청 놀랐고 아버지도 놀랬어.



할아버지가 그러고 며칠 뒤에 간암 판정을 받으셨구나. 아니 이 노인네 술 좀 줄이지. 간암 말기라니. 할아버지. 근데 1년 시한부 판정받고 거기서 3년 더 사신 거면, 확실히 할머니가 저승사자를 쫓아낸 게 맞네요. 역시 할머니는 우리 집 수호신이라니까.






가족묘가 있다. 원래는 공원 주변에 풀이 엄청나게 우거진 숲 안에 있었는데, 그걸 한 10년 전에 이장했다. 가족묘도 아니었다. 그냥 증조할아버지의 묘였다. 그걸 시골집 뒷산 양지바른 곳에 가족 납골묘를 만들어서 증조할아버지를 가장 첫 번째 주민으로 모셨다. 앞에 신정호가 보이고, 해가 잘 들어오는 아주 좋은 곳이었다. 난 풍수 따위는 볼 줄도 모르고 관심도 없지마는 여기 집이 있으면 참 따듯하고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근데 여기까지 들어오기가 힘들어서 뭐 그건 문제겠지만, 그런 거지 뭐.



아무튼 파묘라는 경험을 이 이장을 하면서 처음 보게 되었다. 백골이 되어버린 증조할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해서 화장을 해서 요강만 한 항아리 안으로 넣어 납골묘로 모시는 뭐 그런 과정이었는데, 어쩐지 아빠는 백골 시신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백골 시신이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곱게 잘 있다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말만 생각난다.



이 납골묘의 두 번째 이주민은 증조할머니였다. 남편이 죽은 지 거진 60여 년 뒤의 일이었다. 장례식장에서는 요상한 싸움이 벌어졌고, 결국 승자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였는데, 그때 왜 싸웠는지는 아주 나중에 알게 되었다.






할머니께 내 가장 친한 친구가 철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할머니께서는 철학박사였던 집안 어르신의 이야기를 꼭 해주신다. 풍수와 지리 그리고 천문 일기에 능통했던 그 박사님은 우리 집안의 묘의 위치가 이상해서 집안에 망조가 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할머니는 본인은 김 씨임에도 불구하고 이 씨 집안의 어르신들을 어느 좋은 절에 명패를 두고 모셨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은 일어났다.



증조할아버지가 빚을 많이 진 것은 본인의 능력 밖의 부를 갑자기 결혼과 함께 쥐게 되어서라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나마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은 그의 능력이 부족했음에도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착하게 살았기 때문이라고 집안 어르신들은 다들 그렇게 말했다. 그 복이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으니 착하게 살라고 했다. 착하게 성실하게 맡은 바 뭐든 일을 즐겁게 최선을 다해서 해라. 그게 우리의 길이자 신조이자 비전이었다.






쉬지 않고 농사를 짓지 않으면, 다들 배가 고파질 것이고, 내 자식도 농사를 지어야 할 수도 있다는 공포심.



인질이었다. 나를 가꾸지 않으면 너의 자식을 내가 취하겠다는 엄중한 경고이자, 협박이었다. 땅에서 살았다. 풀도 뽑아주고, 물도 주고, 씨도 심고. 때가 되면 수확을 하고 겨울에는 쉬게 해주고. 땅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미래를 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람의 피를 먹고 자라고 있었다. 이 농사에 어울리지 않는 작고 약한 몸을 가진 사나이는 땅이 주는 기초 영양분만 먹으며 땅을 평생을 가꾸었다. 우리는 누군가의 피를 먹고살고 있다.



나는 어릴 때 밥을 잘 먹지 않았는데, 밥을 남길 때마다 아빠는 네 할아버지가 피 땀 흘려서 지은 농사의 결과물을 남기면 쓰겠냐고 했다. 나중에 학교에 들어가서 밥을 남기는 친구들에게 똑같이 말했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농부 아닌데



라고 했다. 난 모든 할아버지가 농부인 줄 알았다. 그래서 쌀을 사 먹는다는 게 이해가 안 갔다. 우리는 시골에 가면 쌀을 주셨거든. 어떻게 사람이 평생 농사만 지을 수 있지?






피범벅이 되어버린 땅을 가지기 위해 결국 모두가 싸우게 된다. 땅은 그렇게 매력이 있다.



어떤 사람은 자기 서있을 만한 땅조차도 없는데 어떤 사람은 모두가 서 있을만한 크기의 땅을 혼자 가지고 있다.



신이 우리에게 동물, 식물 및 땅을 맡겼다. 땅을 놀리는 것은, 그것은 신의 부름에 응하지 않는 일인데, 그걸 돈 받고 판다는 일은 과연 신을 판다는 것과 진배가 없는 신성 모독일 것이다. 사람들이 요즘 땅의 돈으로 사고팔고 땅 위에서 농사를 짓지 않고 건물을 올리는 것은 이런 전근대적 신앙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아직 전근대의 사람들이 많이 남아있는 세계에 살고 있어서, 전근대인과 근대인의 갈등을 보고있다. 이런 신기한 현상을 목도하고 있음에 신비감을 느낀다.






경자유전



농사를 짓는 사람이 농지를 소유할 수 있는 법칙. 소작을 금지하는 원칙이지만, 요즘 땅 주인은 대부분 농사를 짓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노동을 돈으로 사서 관리한다.



땅은 이제 농사만 짓는 용도가 아니기에, 경자유전은 낡은 법칙이 되었다. 다들 농장으로부터 탈출했다. 이 무시무시한 토지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인질 잡기 전에, 대부분 도시로 도망쳤다. 그런데 거기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몸 빼고는 아무런 재산이 없는 재주꾼들은 어차피 뭔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잡혀서 일하기 마련이었다. 경자유전은 없지만, 비슷한 무언가가 그 원칙을 대체하였다. 인간의 잔혹함과 잔인함은 땅을 닮아있었다. 땅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노력한 만큼 무엇인가 나온다. 이건 모두가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을 때의 이야기이다.






땅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혈혈단신 몸 빼고는 없다. 자신의 생명의 시작과 끝이 세계의 시작과 끝이라고 본다면, 땅은 영원을 가지고 있다. 사실 땅은 가꾸어도 가꾸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인간은 땅을 가꾸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우리는 땅에게 식민 지배를 당하고 있다. 그런데 땅은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냥 받은 대로 돌려줄 뿐이다. 그게 가장 무서운 점이다.



우리는 종교인이다. 땅은 신이다. 도시인은 이교도다.


땅은 사이비다. 우리는 청교도인이다. 농부는 바보다.






아들 당근이 어떻게 생기는지 알아?



어...... 당근은 마트에서 생기는데



너 그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알아올 때까지 밥 처먹지 마



어 당신 누구야?



그러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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