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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힘

by 연스스

달달한 간식이 너무나 좋았던 어렸을 적에 어머니의 손을 잡고 교회를 갔다. 어머니는 어린 필자에게 간식을 먹으려면 예배를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 교회에서 들었던 말들은 참 달콤했다. 신이 날 기다리고 있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난 신에게 사랑받는다고 했다. 그때부터 신의 존재를 믿고 싶었다. 기도를 통해 신을 만나는 내가 자랑스러웠고, 어린 나이에 성인부 예배의 설교를 이해하는 내 스스로가 뿌듯했다. 이런 특별해지고 싶은 마음에 '방언'도 하고 싶었다. 방언을 하면 한국어를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 한국말로 기도를 한다거나, 전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통해 기도를 한다고 하더라. 21세기 현대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초현실적인 현상이었기에 더욱 방언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몇번 횡설수설하며 기도해보고 방언을 받았다며 혼자 좋아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믿음은 수많은 의심을 동반한다. 중학교 때의 이 의심이 지금의 무신론자인 나를 만들었다. 처음에 기독교를 믿게 된 이유도 그랬다. 신을 등에 업은 나라면 무엇이든 헤쳐 나갈 수 있을거라고 확신했었다. 교회에서 지겹도록 등장하는 기적의 간증들이 그런 생각을 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웬걸, 신을 믿는다고 상황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교회에 꾸준히 나가다 보니 설교 내용도 전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어려서부터 논쟁을 사랑하던 필자는 애꿎은 중등부 선생에게 난감한 질문들을 퍼붓곤 했다.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하지만 종교인다운 대답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질문들 말이다.




개신교가 아닌 모든 종교들은 대개 신도들에게 전도라는 과제를 주곤 한다. 어린 필자 또한 전도를 열심히 하려고 했다. 당시엔 신을 믿고 교회를 나가는 것이 너무나 재미있고 행복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이런 즐거움을 얻길 바라면서 전도를 했다. 하지만 그들의 벽은 단단했다. 누군 단칼에, 누군 이야길 열심히 들어주면서도 거절했다. 후자를 생각하면, 안타깝고도 불편하지만 재미있는 상황이다. 들떠있는 필자를 실망시키지 않으면서 거절하려고 얼마나 진땀을 뺐을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십수 년이 지난 이제서야 깨닫는다. 그들은 전도를 받기도 전에 교회를 가지 않기로 결정했었다는 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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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이러한 노력들이 무색하게, 이제는 신이 있다는 증거를 모조리 반박하려는 사람이 되었다. 기독교를 버리게 된 원인들이 기억난다. 신실한 기독교도가 되어갈 수록 악화되는 가정환경이 그 첫 번째 원인이었고, 둘째로 교회 중등부 목사는 비논리적인 설교만 일삼았으며, 셋째론 신이 없어도 스스로 해낸다는 자신감이었다. 세 이유 모두 성격은 다르지만 신에 대한 의심을 갖기엔 충분했다.



믿음의 힘은 강력하다. 허구한 날 어느 종교에서든 심심하면 튀어나오는 말이다. 필자도 전적으로 동의한다. 믿음의 힘은 너무나도 강력하다. 어렸던 필자지만 신을 한 번 믿기로 결정하니, 이후론 모든 것을 성경적으로 납득하려 했다. 아마 어렸을 적의 필자가 하는 말을 그대로 하는 사람을 요즈음에 만나게 된다면, 궁금하다. 모든 걸 반박해주려는 장난기를 참을 수 있을 지.


지금의 필자도 마찬가지다. 신이 없다고 믿기 시작하니 모든 것이 반박 가능해진다. 이 생각을 하면, 상당한 두려움이 엄습한다. 잘못된 믿음이 나를 무너뜨리지는 않을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의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내가 가진 믿음이 모두 허상이 아닐지? ...



믿음으로 이겨내야 한다. 교회를 다닐 때 끝없이 들은 말이자, 기독교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말이다. 뿐만아니라 모든 종교에도 해당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예상해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강력한 말이다. 저 말을 통해서 연약한 믿음이 강력한 믿음이 되지 않겠는가? 이 강력한 믿음은 맹목적인, 융통성이 없는, 고착화되는 특징을 갖는다. 믿으려고 하기 때문에 믿어지고, 그렇게 생긴 비이성적인 믿음을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그럴듯한 이유를 만들어낸다. 인지부조화로 잘 알려진 인간의 특징이다. 믿음의 힘이 파멸적이지 않은가?


믿음으로 이겨낸다는 세뇌는 뇌를 고착화시키고 융통성을 잃도록 한다. 기독교가 그렇게도 혐오하는 이단, 사이비의 특징과 완벽히 같다. 이 대목에선 넌더리가 나곤 한다. 그도 그럴게, 세뇌라 함은 너무도 달콤하기에 받을 땐 기쁘게 받으며, 풀려나면 과거의 세뇌시킨 자들을 혐오하게 되지 않겠는가. 필자만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융통성없는 노인들을 볼 때면 꼭 다짐하곤 했다. 세월이 흐르면 절대로 귀만은 닫지 말자고.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으나, 믿음이란 단어를 얘기하기에 종교만한 주제가 또 없다. 그들의 신앙심은 믿기로 결정했기에 흘러나오는 것이다. 신기한 건 생각에 관한 모든 것들이 비슷하게 닮아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희망 또한 희망을 가져보기로 했기에 생긴 게 아닐까? 절망도 그렇다.


난 발전하고 싶고, 내 믿음이 나를 발전시킨다고 믿는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원하는 방향으로 내 자신을 보내지 못하고 있을 때, 내 믿음을 하나하나 의심해보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면서 내 믿음을 고착화시키는 과거가 내 자신을 끈질기게도 괴롭히는 법 아니겠는가?


그렇게 내 믿음들을 하나하나 다시 마주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정말정말 아픈 일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회피하는 것일지 모른다. 회피하고 하던대로 믿어버리면 너무나 편했기에. 그러면서 떠나보낸 좋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글을 쓰는 내내, 그들이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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