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의 아픈 기억을 간직한 채 둘은 아무 말도 없이 걷고 있었다.
북쪽으로…
라크는 어디로 가는지 묻지 않았다.
묻지 않는다는 건, 이미 마음속 어딘가에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크는 간간이 목에 걸린 펜던트를 만졌다. 어머니와 하이델 마을의 마지막을 기억하며…
에스마는 쉴 때마다 두루마리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사흘이 지났을 때 에스마는 입을 열었다.
“별의 문자는 얼마나 배웠니?”
“아주 조금이요”
“여기서 내가 사는 곳까지 열흘 정도 걸릴 거야.
가는 동안 내가 아는 별 문자와 언어를 가르쳐 주마.”
“그럼… 나도 마법을 쓸 수 있는 거예요?”
라크는 희망찬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 그것은 많은 훈련이 필요해.
너는 어머니가 남겨준 이 ‘갈릴로스 제국, 별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야 해.
모든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해 주마.”
라크는 ‘이유가 있겠지.’라고 생각하곤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내가 사는 곳에 가면 너를 가르쳐줄 또 한 사람이 있어.
내 남편. 이름은 카이르 누르.
그는 너에게 칼을 쓰는 법, 전쟁하는 법 등을 가르쳐줄 거야.
너는 나에게서 마법, 경제, 역사, 궁중 예절 등을 배워야 해.”
“왜 그런 것을 배워야 해요?”
“왜냐하면 너는 세상을 다스려야 하니깐.”
그 말에 라크는 무엇인가 가슴에 일어났다.
밤이 깊어지자, 모닥불 옆에서 에스마는 별 문자의 기초를 그려 보였다.
부드러운 모래 위에 손가락으로 그린 선은, 단순한 글자가 아니었다.
기억을 불러오는 부호였고, 잊힌 문명의 호흡이었다.
“이건 ‘라’야. 빛이라는 뜻이지.
그리고 이건 ‘크’. 중심이라는 뜻이야.
너의 이름 ‘라크’는 우연히 만들어진 게 아니란다.”
라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소리로 되뇌었다. “라… 크…”
어머니가 지어준 이름, 그것이 빛의 중심을 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묘하게 저렸다.
그때 펜던트가 미세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마치 위험을 알리는 것처럼…
펜던트는 남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라크는 사막의 바람에 쇠 냄새와 비릿한 피 냄새가 섞여 있는 것을 느꼈다.
하이델 마을의 지하실에서 맡았던 그 냄새였다.
라크는 위험을 느끼며 “에스마!” 라고 소리쳤다.
“라크… 어서 텐트 안으로…” 에스마는 라크를 텐트 안으로 서둘러 밀어 넣고 본인도 들어왔다.
그리고 에스마는 최대한 몸을 작게 만들었다.
라크도 따라했다.
에스마가 작은 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텐트 바깥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깥에서는 이게 바위로 보일 거야. 그리고 바위처럼 딱딱해” 에스마가 나지막히 속삭이듯 말했다.
조금 있으니, 땅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말발굽 소리와 함께 그 진동은 더 커져갔다.
남쪽에서 공중에 떠 있는 듯한 10개의 횃불이 모래 먼지와 함께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검은 갑옷을 입고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다.
두 마리의 검은색 개가 선두에서 달리고 있었다. 매우 큰 개였다.
그들은 텐트 앞에서 갑자기 멈추었다.
“분명 흔적이 여기까지 이어졌는데…” 거친 목소리로 한 사내가 말했다.
“여기 모닥불이 꺼진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내가 말에서 내려 모닥불을 가리키며 말했다.
“음… 여기서 잠시 머물고 새벽에 계속 추적한다.
남은 장작에 불을 붙이고 음식을 데워라.
그들은 얼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화려한 망토를 한 사내가 지시를 내렸다.
“네! 장군님!”이란 소리와 함께 모두 말에서 내려 모닥불 주위를 둘러앉고 모닥불 위에 음식을 데우기 시작했다.
장군이라 불리는 사내는 에스마가 위장을 한 바위 위에 앉았다.
“장군… 우리가 어디까지 추적해야 하나요?” 한 병사가 물었다.
“하이델 마을의 생존자는 하나도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다 죽인지 알고 돌아갔지만 결국 누군가 살아있었고 마을 사람들 장례까지 치르고 떠났지.
내가 라짐 공작님께 볼 명목이 없구나.
우리가 그 일을 마치고 공작님께 가서 보고할 때 공작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어.
어젯밤 꿈에 한 아이가 자기를 죽였다고.
그래서 소수의 인원만 꾸려서 다시 마을에 가보라고 하신 거야.”
라크는 그 말을 듣자 ‘헉’하는 신음이 나왔다.
그 순간 에스마의 손이 번개처럼 라크의 입을 틀어막았다.
손바닥에 느껴지는 아이의 숨결이 뜨겁게 떨리고 있었다.
모닥불 너머에서 개 두 마리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귀가 쫑긋 세워졌다.
검은 눈동자가 어둠을 찢으며 라크와 에스마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개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모래를 밟는 발소리.
사막의 모래가 스르륵 밀리는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들렸다.
한 발.
또 한 발.
라크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자신의 심장 소리가 텐트 밖까지 들릴 것만 같았다.
에스마의 손이 더 세게 라크의 입을 눌렀다.
다른 손은 모래 위에 ‘만약 들키면 북쪽 협곡으로 재빨리 뛰어가’라는 메시지를 쓰고 지웠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개 한 마리가 위장된 바위 앞까지 다가왔다.
콧등이 바위 표면에 닿았다.
라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개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소리에 병사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러지?”
“뭔가 맡은 것 같습니다.”
장군이라 불린 사내가 일어나 바위를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은 매서웠다.
“다들 이리 와 봐.”
개가 발톱을 세우고 바위를 긁기 시작했다.
사각… 사각… 그 소리에 라크의 이마에서 땀이 비 오듯 쏟아지기 시작했다.
라크의 오른손이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에스마는 ‘지금은 안 돼… 아직은…’ 하며 속으로 말하며, 지팡이를 움켜쥐고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개가 더욱 거칠게 짖었다.
장군이 바위 위에 손을 얹고 만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그가 발로 바위를 세차게 찼다.
딱딱한 충격이 텐트 내부까지 전해지며 흔들렸다.
라크의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냥 바위 같긴 한데… 좀 이상하군.”
그는 잠시 더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개가 흥분한 모양이다.
모래 속에 숨은 짐승 냄새일 수도 있다.
새벽에 다시 찾는다.”
개들은 여전히 낮게 으르렁거렸지만, 한 병사가 목줄을 잡아끌었다.
모닥불 옆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장군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빛이 바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순간, 라크는 느꼈다.
그는 의심하고 있다.
장군은 칼을 뽑았다.
“이얍!” 하는 기합과 함께 칼로 세차게 바위를 내리쳤다.
칼과 바위가 부딪히는 순간 바위가 살짝 들어갔다가 나오는 것을 장군은 보았다.
“여기 있는 나무들을 모두 모아 바위 주위에 두르고 불을 붙여라.”
갑자기 장군이 병사들에게 명령했다.
병사들이 모닥불에 타다 남은 나무 조각과 앙상하게 서 있는 작은 나무 하나를 도끼로 찍어 넘긴 후 조각을 내어 바위에 두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을 붙였다.
바위 모양의 텐트 안은 뜨거운 열기로 가득 찼다.
“라크! 눈 감아” 에스마가 작게 말하며 왼손으로 라크의 눈을 막았다.
그리고 중얼거리듯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라크는 볼 수 없었지만, 눈 앞에 섬광이 강하게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에스마는 라크의 손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눈을 떠도 돼. 저들은 십 분간 눈을 뜰 수 없을 거야.
그동안 최대한 멀리 도망가야 해.
빨리 따라와!”
뒤에서 “아… 내… 눈… 내… 눈…” 하는 외침과 개들의 컹컹거리는 소리, 말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조금만 가면 더 가면 협곡이 있어. 그곳에 숨을 곳이 있을 거야.”
잠시 얼마의 시간이 지나자 “저들을 잡아라!”라는 소리와 함께 말발굽 소리와 개들의 컹컹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리기 시작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에스마를 지켜야 해!’ 라고 생각하며 라크는 윗니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라크의 이마에서 흐르는 땀은 입술에서 흘러나온 피와 함께 라크의 몸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땀에 섞인 피가 펜던트의 별 모양에 이르자 펜던트는 협곡의 한 방향을 가리켰다.
라크와 에스마는 무의식적으로 그 방향으로 달렸다.
협곡에 다다르자 어떤 곳으로 빨리듯 두 사람은 들어갔다.
그곳엔 아무런 빛도 없었다.
추격자들에겐 그 둘이 공중에서 사라진 듯 보였다.
“갑자기 이놈들이 어디로 사라진 거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군.
흩어져서 어서 그들을 찾아라.” 장군이 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더 이상 추격자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혹시 바깥에 그들이 있을까 염려되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에스마가 낮은 소리로 주문을 외자 지팡이 끝에 달린 별장식에서 희미한 빛이 나왔다.
그리고 앞을 비추었다. 그곳이 작은 동굴임을 알 수 있었다.
둘은 안으로 조심스레 한 발짝씩 걸어 들어갔다.
어느덧 동굴의 끝에 다다랐다.
에스마는 빛을 더 밝게 만들었다.
그곳의 벽에는 그림과 함께 별의 문자로 적힌 다섯 문장의 글이 있었다.
왕관을 쓴 사람이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왼손에는 책을 들고 있었고 불을 뿜는 용을 타고 있고 그 아래에는 세 개의 별이 벽에 그려져 있었다.
“아! 갈릴로스의 전설이군” 그림을 본 에스마가 큰 소리로 외쳤다.
“라크! 갈릴로스라는 제국이 세 개의 별을 통치했다는 고대 전설이 있어.
이 그림은 그것을 나타내는 것 같구나.” 에스마가 라크를 보며 말했다.
에스마는 벽에 다가가 글을 한참동안 읽었다.
에스마는 라크에게 지팡이를 들라는 말과 함께 종이와 펜을 꺼내 벽화를 종이에 그리고 글을 옮겨 적었다.
“어떤 말이 적혀 있어요?” 라크는 차분히 물었다.
“시로 적혀 있는데 무척 난해해… 마치 수수께끼 처럼.
나중에 때가 되면 같이 연구해 보자.” 에스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답했다.
“라크 잠시 앉아서 쉬자.”라고 하며 에스마는 품에서 음식을 꺼냈다.
“이게 마지막 남은 것이구나.
급하게 도망치느라 이것밖엔 챙기지를 못했구나.
이 빵을 나눠 먹자” 에스마는 빵을 둘로 나눠 라크에게 주었다.
둘은 어느새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는 사이 라크는 잠에서 깨었다.
에스마는 평온한 얼굴로 계속 잠들어 있었다.
라크는 일어나 다가가서 그 그림을 자세히 쳐다보았다.
용을 탄 왕이 마치 자신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그림속의 왕이 든 책에 라크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더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책 표지에 라크가 가진 펜던트와 동일한 문양의 별이 새겨져 있었다.
놀람을 뒤로한 채 동굴 입구로 걸어간 라크는 동굴 입구에서 손을 밖으로 내밀어 보았다.
따뜻한 햇살이 느껴졌다.
하지만 동굴은 아무런 빛도 들어오지 않았다.
라크는 동굴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환한 햇살이 비치는 바깥과 컴컴한 동굴은 완전히 다른 세상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동굴 안은 적당한 온도와 습도로 아늑하게 느껴졌다.
다시 동굴밖으로 나온 라크는 오열과 함께 큰 소리로 외쳤다.
“라짐! 기다려라… 내가 갈 것이다… 그때는 너의 피로 억울하게 죽어간 부모님과 하이델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지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