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라크의 신분과 새로운 모험의 시작

by 현상

라크가 에스마와 카이르와 함께 지낸 시간이 어느덧 삼 년이 되었다.

그 시간 동안 그는 변했다.

에스마로부터는 별 문자, 고대 언어, 에일런 말, 그리고 마법의 기초 등을 배웠다.

이제는 간단한 주문쯤은 스스로 펼칠 수 있을 만큼 성장해 있었다.


카이르에게는 검술을 배웠다. 하지만 처음부터 검을 쥘 수는 없었다.

첫해는 오로지 기초 체력 훈련에 전념했다.

근력, 지구력, 반사 신경, 그리고 무엇보다 집중력. 카이르는 그것들이 모두 다져졌을 때 카이르는 비로소 라크에게 검을 건넸다.


훈련만 한 것은 아니었다.

라크는 카이르를 따라 사냥하러 다니고, 에스마와는 밭을 일구었다.


카이르를 따라 숲을 누비는 시간은 ‘살아있는 적’을 대하는 법을 배우는 실전이었다.

나무 뒤에 숨어 숨을 죽일 때, 라크는 자신의 존재감을 지우는 법을 익혔다. 마른 낙엽 하나 밟지 않는 조심스러움은 훗날 적의 배후를 잡는 은밀한 보법이 되었고,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짐승의 체취를 맡는 감각은 상대의 살기를 감지하는 직관으로 변모했다.

"검술은 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숲의 흐름을 읽고 그 틈으로 네 몸을 던지는 것이다."

카이르의 말처럼, 라크는 화살이 시위를 떠나는 찰나의 타이밍을 통해 검의 '일격'이 가져야 할 무게를 배웠다.

빗나간 화살은 사냥감을 놓치게 하지만, 실전에서의 빗나간 검은 죽음을 의미한다는 냉혹한 진리를 그는 숲의 침묵 속에서 깨달았다.


반면 에스마와 함께하는 밭일은 검술의 ‘뿌리’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단단하게 굳은 땅을 괭이로 일굴 때, 라크는 깨달았다. 검을 휘두르는 위력은 어깨가 아니라, 단단히 지면을 딛고 있는 두 발과 허리에서 나온다는 것을.

뙤약볕 아래에서 수천 번 반복되는 괭이질은 화려하진 않지만 정직했다.

요령을 피우면 흙은 뒤집히지 않았고, 이는 곧 검술의 기본기인 ‘기초 체력’과 ‘반복의 힘’으로 이어졌다.


매일 아침 청소는 라크의 몫이었고, 아침 식사 준비 또한 자연스럽게 그의 손에 맡겨졌다.

때로는 점심이나 저녁도 함께 만들며 두 스승의 식탁을 차렸다.

그는 땀 흘리는 노동 속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꼈고, 스승들은 그를 한 사람의 식구로 여겼다.


라크의 하루는 쉼이 없었다.

새벽에 일어나 한 시간은 책을 읽고, 또 한 시간은 체력 훈련에 쏟았다.

청소하고 아침을 차린 뒤에는 카이르에게서 검술을 배우고, 오후에는 에스마의 언어와 마법 수업이 이어졌다.

밤이 되면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며 다시 책을 펼쳤다.

라크는 이곳에 온 첫날 부모님과 하이델 마을의 그림을 그려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밑에는 '라짐'이라는 글씨를 썼다.


이 집 안에는 ‘작은 도서관’이라 불릴 만큼 책이 많았다.

그중 삼분의 이는 에일런 문자로, 나머지는 별 문자로 적혀 있었다.

라크는 지금까지 절반 가까운 책을 읽어냈다.

역사, 경제, 문화, 수학, 철학, 전략과 병법—분야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알면 알수록 더 알고 싶어졌다.


그뿐만 아니라, 카이르와 에스마는 왕족이나 귀족들과 식사할 때의 예법, 연회에서의 춤과 대화, 궁중 예절까지 빠짐없이 가르쳤다.

라크는 처음에는 어색했지만, 차츰 몸에 익혔다.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마치 본래 그 안에 잠들어 있던 본성을 하나하나 되찾아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어느 날, 저녁 후 에스마가 라크를 조용히 불렀다.

“라크, 이 정도면 이제 준비가 된 것 같구나.”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부드러웠지만, 표정은 평소보다 훨씬 진지했다.

그 자리에 카이르도 함께 있었다.

그의 얼굴 역시 굳어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 무언가 무거운 기류가 흘렀다.

라크는 순간 심장이 뛰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에스마는 잠시 라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조용히 말했다.

“라크, 너는 이제 혼자 여행을 떠나야 해.”


라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저… 혼자서요?”


“그래. 이번 여정은 아무도 너를 도와줄 수 없어.

힘든 길이 될 거야. 어쩌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어.”

에스마는 목소리를 낮추며, 더는 피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히 말했다.

카이르도 묵묵히 그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는 숨을 삼켰다.

‘혼자…?'

그동안 혼자였던 적이 거의 없었다. '에스마와 카이르, 두 사람의 손길 안에서 성장해 온 삼 년.

이제 그 울타리를 벗어날 차례라는 것인가?'


에스마는 마법 지팡이를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루벤하르와 드라모니아 왕국 사이에는 에일런에서 가장 크고 높은 산이 있단다.

그곳에는 과거 갈릴로스 제국이 남긴 유산이 잠들어 있어.

왕만이 가질 수 있는, 그리고 그 후손만이 열 수 있는 그것을…

너는 반드시 찾아와야 해.”


라크는 놀라서 에스마를 바라보았다.

“저는… 갈릴로스 왕가의 후손이 아니에요!

저 같은 사람이 어떻게…”


에스마는 미소를 지으며 라크의 손을 잡았다.

“아니다, 라크. 사실 너의 어머님… 이사벨이 바로 그 후손이야.

그리고 이제 그 피를 이어받은 사람은, 너밖에 없어.”


라크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어머니가… 왕가의 후손…?’


라크의 펜던트를 품속에서 꺼내 손에 쥐어 보았다.

하이델 마을을 떠난 후 계속해서 목에 걸고 있었고 한순간도 내려놓지 않은 펜던트였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손바닥에 와 닿았다.

“이 펜던트가 이미 그것을 증명해 주었어.

하이델 마을에서 그리고 추격자들에게 쫒길 때.

갈릴로스 제국의 유산이 있는 곳을 찾고 문을 열기 위해서는 그 후손이 이 펜던트를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해.”


카이르가 옆에서 낮고 단단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라크, 이제 너는 훈련을 마쳤다.

우리가 줄 수 있는 모든 것은 다 주었다.

앞으로는 네가 직접 네 길을 찾아야 해.”


라크는 펜던트를 꼭 움켜쥐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무언가가 뜨겁게 일렁였다.

두려움, 기대, 혼란, 그리고… 희망.

‘나 혼자서… 과연 할 수 있을까?’


하지만 바로 그때, 스승들의 눈빛에서 그가 본 것은 단 하나였다.

믿음.


라크는 한참 동안 말을 잃고 있다가,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빛은 흔들림 없이 단단했다.

“이것이 제가 해야 하는 일이고, 스승님들이 저를 가르쳐온 이유라면… 저는 그 운명을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두 스승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에스마는 미소를 띠며 책장으로 가더니 큰 지도를 꺼내 왔다.

탁자 위에 펼쳐진 지도는 에일런 대륙 전역을 담고 있었다.

에스마는 손가락으로 한 지점을 짚었다.

“우리는 지금 여기, 알두레스와 칼디아가 맞닿은 접경지대에 있어.”

그녀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이 협곡을 따라 동북쪽으로 조금 더 가면 비토르 지역이 나와.

알두레스, 칼디아, 벨사레인 세 왕국이 만나는 곳. 강의 마지막이 지나가는 곳.

그곳은 대륙에서 가장 풍요로운 땅이고, 세 왕국 모두가 중립지대로 놔두었지.”


라크는 숨을 죽이며 그녀의 설명을 따라갔다.

에스마는 다시 손을 옮겨 지도 위를 짚었다.

“그리고 거기서 북서쪽으로, 알두레스의 동남쪽에서 북서쪽으로 쭉 가면… 이 산이 나타나.

이곳이 바로 ‘데보르산’이야.”

지도의 산 표식 위에 손이 멈췄다.

“들어간 자는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고 해서, ‘악마의 산’이라는 이름이 붙었어.”


‘악마의 산….’

라크의 목 안이 말라왔다. 아직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정체불명의 두려움이 그를 감쌌다.


에스마는 조용히 말을 이었다.

“그곳에는 고대의 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강력한 결계가 쳐져 있어.

사실 이런 사실조차, 네 어머니 이사벨이 목숨을 걸고 지켜낸 ‘갈릴로스 제국, 별의 이야기’ 책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단다.

그리고 그 유산은 오직 후손만이 찾을 수 있고, 이 펜던트가 그 열쇠라는 것도…”


그녀가 카이르를 바라보자, 카이르는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야.

그곳에 도달한다고 해서 곧바로 유산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후손이라 해도, 펜던트를 가진 자라 해도…

그 앞에는 가혹한 시험이 기다리고 있어.

용기, 지혜, 인내, 그리고… 네 마음속 깊은 곳까지 시험할 거야.”


라크의 손이 본능적으로 펜던트를 움켜쥐었다.

그 손끝에 약간의 떨림이 섞여 있었다.


카이르는 무겁게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죽을 수도 있다.

강력한 힘에는 언제나 그만한 책임이 따르지.

고대 갈릴로스 제국은 멸망하면서, 이 유산을 잘못된 손에 넘기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누구도 가지지 못하도록 만들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라크를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평소 무뚝뚝했던 그의 얼굴에 드물게 드러난 따뜻한 미소였다.

“처음 널 봤을 때, 우리는 이 훈련에 십 년은 걸릴 거로 생각했단다.

하지만 라크, 너는 삼 년 만에 해냈어.

정말 대견하다.”


에스마가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데보르산까지는 대략 두 달 정도 걸릴 거야.

알두레스는 따뜻한 땅이지만, 산에 가까워지면 비, 바람, 눈… 어느 것이 올지 아무도 몰라.

그래서 이 옷을 준비했단다. 한번 입어보자.”


에스마는 부드러운 손길로 라크에게 옷을 건네주었다.

모자가 달린 긴 소매 외투, 발목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회색 천.

라크가 그 외투를 걸치자, 마치 따뜻한 포옹에 감싸인 듯 온몸이 포근해졌다.

에스마는 어깨선을 다듬어주며 다정히 말했다.

“이건 비, 바람, 눈, 그리고 추위에서 너를 지켜줄 거야.”


라크는 팔을 움직여보며, 모자를 살짝 눌러쓰며 웃었다.

“에스마가 저를 처음 데려왔을 때 입고 계셨던 옷이랑 비슷하네요.

색깔만 검은색에서 회색으로 바뀌었네요”

그 말에 에스마는 살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 옷은 알두레스 왕국의 사제들이 먼 여행을 떠날 때 입는 옷과 비슷해.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큰 의심을 받지 않을 수 있단다.

알두레스 사람들은 낯선 외지인에게 특히 경계심이 심하거든.”


에스마의 표정이 한층 진지해졌다.

“가면서 되도록 말은 아끼렴.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잠은 될 수 있으면 외딴곳에서, 마법으로 만든 텐트 안에서 자야 해.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주문을 한 번 더 거는 거 있지 말고.

네가 향하는 곳, 그리고 네 정체가 새어나가서는 절대 안 돼.

그곳에 가는 건, 네 목숨만이 아니라 더 큰 운명을 건 일이니까.”


에스마의 목소리에는 걱정과 애틋함이 뒤섞여 있었다.

라크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나가고 있었다.


카이르가 무겁게 한숨을 내쉬더니 말했다.

“자, 이것도 가져가야 해.

너를 위해 우리 둘이 한 달간 만든 것이야.”

그는 검은색 지팡이를 조심스럽게 건넸다.

끝에는 별 모양 장식이 달려 있었고, 고요한 빛을 머금은 듯 은은히 반짝였다.

라크는 두 손으로 공손히 지팡이를 받았다.

“지팡이 머리 쪽과 중간을 쥐고 머리를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어 머리를 당겨 보렴.”

카이르의 말에 따라 라크가 움직이자, 지팡이 안에서 칼날이 쓱— 하고 튀어나왔다.

예리하고도 단단한 칼날은, 보는 것만으로도 강한 힘을 느끼게 했다.


“위험이 나타났을 때 그 칼을 사용하면 돼.

검술로는… 이제 대륙에서 너를 당할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카이르는 처음으로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평소 무뚝뚝하던 그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에스마가 다정하게 말했다.

“내일 떠나야 하니 오늘은 일찍 들어가 쉬렴.

더 필요한 건 내일 아침에 챙겨주마.”

그녀의 목소리에는, 멀리 떠나보내는 어머니 같은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라크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오늘은 특별한 아침을 준비하고 싶었다.

그동안 부모님처럼 자신을 돌봐주고 가르쳐준 두 스승님께 작은 보답이라도 하고 싶었기에.

에스마도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라크에게 다가왔다.

“오늘은 내가 준비해 주려고 했는데, 네가 먼저 선수를 쳤구나.”

둘은 그 말에 함께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 식사가 끝나자, 에스마는 작은 지갑을 꺼내 라크에게 쥐여주었다.

“여기엔 알두레스와 루벤하르의 돈이 들어 있어.

중간에 분명 필요할 순간들이 올 거야.”

그녀는 잠시 눈을 감더니, 라크의 왼쪽 팔목에 작은 원을 그리고 주문을 외웠다.


“자, 이제 팔목 위를 한번 톡 치고, 오른손과 왼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동시에 작은 네모를 그리며 ‘라인헴’이라고 말해보렴.”

라크가 그대로 따라 하자, 눈앞에 작은 빛의 창이 열리더니 책 한 권이 공중에 떠올랐다.

“여기에는 우리 집에 있었던 책, 네 어머니가 남긴 책, 두루마리까지 모두 담겨 있어.
언제든 원할 때 꺼내어 볼 수 있단다.

어머니가 남긴 책과 두루마리에 유산을 찾을 수 있는 열쇠가 있단다.”

라크는 놀란 눈으로 에스마를 바라봤다.

“정말… 대단해요.”

에스마는 조용히 웃으며, 그의 어깨를 다정히 감쌌다.


출발할 시간이 다가왔다.

카이르와 에스마 앞에 선 라크는, 두 스승을 향해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두 사람을 꼭 껴안았다.

“라크,” 에스마가 작은 보따리를 주며 마지막으로 말했다.

“네가 앞으로 어떤 길을 걷든, 우리 마음은 늘 너와 함께일 거야.”

라크는 두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길을 나섰다.

이전 06화5화: 두번째 스승과의 만남과 새로운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