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라크의 옆에 에스마가 서 있었다.
에스마는 라크를 꼭 안아주었다.
라크는 에스마의 품에서 어머니와 같은 느낌을 받았다.
“라크! 이제 출발하자…
이 협곡을 따라가면 우리가 갈 곳이 나와”
에스마와 라크는 협곡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붉은 바위 절벽이 양옆으로 병풍처럼 솟아 있었고, 협곡 안을 스치는 바람은 낮게 윙윙 울려 퍼졌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바람과 메마른 초원만 보며 걸어온 라크에게, 바위 그늘에 자라는 작은 식물들, 좁게 흐르는 물줄기 하나하나가 놀라움이었다.
라크는 숨을 고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런 곳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에스마는 부드럽게 웃었다.
“세상은 넓어. 라크, 우리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이제 이틀만 더 가면 나와 카이르가 사는 곳이 나와.”
여정 내내, 쉬는 틈마다 에스마는 별 문자와 언어를 차근히 가르쳐주었다.
라크가 그날 배운 것을 되뇌며 복습할 때면, 에스마는 조용히 두루마리와 책을 펼쳐 들고 깊은 생각에 잠기곤 했다.
협곡안은 열매들이 있어 그것을 먹어가며 걸어갈 수 있었다.
둘은 혹시 모를 추적자에 대한 경계도 멈추지 않았다.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라크는 걸으면서 머릿속으로 새로운 스승의 모습을 그려보았다.
‘검술과 병법을 가르친다면, 분명 무섭게 생겼겠지.
얼굴에 흉터라도 있지 않을까? 목소리도 무서울까?’
생각할수록 그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에스마는 말없이 그를 좁은 협곡 끝, 막다른 골목 같은 바위벽 앞으로 데려왔다.
라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여기… 길을 잘못 든 거 아니에요?”
에스마는 빙긋 웃으며 대답 대신 지팡이를 들었다.
낮고 빠른 목소리로 별의 언어를 읊조리더니, 지팡이 끝의 별 장식으로 바위를 ‘톡, 톡, 톡’ 세 번 두드렸다.
바위를 세 번 두드리자, 떨리는 듯한 진동이 발끝을 타고 전해졌다.
라크는 숨을 죽였다.
바위벽 중앙에 가느다란 금빛 선이 생겨나더니, 천천히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돌가루가 사르르 흘러내렸고, 마치 오래된 문이 오랜만에 열린 듯 먼지 냄새가 퍼졌다.
라크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중얼거렸다.
"마법의 장소군요…."
에스마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라크. 여기부터는 너가 준비한 마음으로 들어가야 해."
금빛 문틈이 완전히 열리자, 안쪽에서 서늘한 공기가 밀려왔다.
문 너머에는 좁은 동굴 같은 통로가 이어졌고, 저 멀리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이고 있었다.
라크는 긴장한 채 에스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따라 걸어가자, 바닥엔 단단한 돌이 깔려 있었고, 벽에는 오래된 별 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라크는 호기심에 손을 뻗어 만져보았다.
"이것들은 언제 새겨진 거예요?"
"수백 년,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단다."
통로의 끝, 불빛이 점점 가까워졌다.
마침내 넓은 공간에 도착했을 때, 라크는 숨을 삼켰다.
그곳은 작은 지하 전당처럼 보였다.
벽에는 별 모양의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고, 천장에는 마법으로 떠 있는 듯한 빛 구슬이 공간을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길고 검은 머리를 뒤로 묶은 채, 강철빛 눈동자를 가진 남자.
단단한 체격에 검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고, 허리에는 양날의 검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모은 채 조용히 라크와 에스마를 바라보고 있었다.
라크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저분이, 카이르 누르?"
카이르 누르는 천천히 다가왔다.
그의 걸음은 무겁고도 조용했다.
라크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소리를 온몸으로 느꼈다.
카이르는 잠시 라크를 바라보더니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누구니?"
라크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라크예요."
에스마는 카이르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아이의 이름은 라크, 이사벨의 아들이에요.
이사벨과 이 아이가 살던 마을의 모든 사람이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몰살을 당했어요.
이사벨을 만나러 가던 중 사막에서 죽어가던 이 아이를 발견하고 함께 오게 되었어요.
자세한 것은 나중에 이야기해 줄게요.
이제야 씻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겠네요.
왔다가 갔다가 하는 동안 가져갔던 빵과 물 그리고 협곡의 열매만 먹었거든요.
라크 나를 따라오렴.
앞으로 네가 지낼 방으로 데려다줄게.”
에스마는 라크의 손을 살짝 잡고 조용히 이끌었다.
‘내 방이라고?’ 라크는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이델 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작고, 가족이 한 공간에서 함께 지내는 구조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맨 안쪽에 침대가 있고, 문 옆에 부엌이 있고 식탁이 집의 중앙에 있었다.
결혼 전에는 부모와 함께 살고, 결혼하면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새집을 지어주는 것이 전통이었다.
이제 그가 서 있는 공간은 완전히 달랐다.
바닥은 부드럽게 다듬어진 흙과 돌로 이루어져 있었고, 양옆 벽에는 고대 문자와 별 문양이 새겨진 타일들이 은은히 빛났다.
천장 위에는 작은 빛 구슬들이 별처럼 박혀 있어, 공간 전체가 마치 하늘 아래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천장 중앙의 작은 창을 통해 밤낮을 알 수 있었다.
큰 공간의 안쪽에는 둥글게 솟아오른 두 개의 방이 있었다.
마치 돔처럼 둥근 지붕이 달린 두 방은, 마을에서라면 독립된 작은 집처럼 보였을 것이다.
에스마는 오른쪽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른쪽 벽에 있는 작은 돌에 손을 얹었다.
순간 천장에 박힌 빛 구슬들이 빛나기 시작하며, 대낮처럼 밝아졌다.
방 안은 아늑하고 포근했다.
깔끔히 정돈된 침대, 단정한 나무 책상, 그리고 작지만, 세련된 옷장이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닥에는 별무늬가 수 놓인 작은 카펫이 깔려 있어, 라크는 순간 자신이 꿈속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방금 내가 만진 돌에 손을 대면 방안을 환하게 하거나 어둡게 할 수 있어.
한번 해보렴.”
에스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라크는 조심스레 돌에 손을 대보았다.
방 안이 서서히 어두워졌다.
다시 손을 대자 방이 밝아졌다.
라크는 신기해하며 껐다 켜기를 세 번 반복하였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다주마.”
에스마는 라크에게 미소를 짓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라크는 자신만의 공간에 홀로 남아, 아직 믿기지 않는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조금 있으니 똑똑, 하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라크는 잠시 멈칫하다가 작게 “네…” 하고 대답했다.
방문이 열리자, 에스마가 미소를 띠며 서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깨끗하게 접힌 옷 한 벌이 들려 있었다.
“씻고 옷을 갈아입는 게 좋겠지? 따라오너라.”
라크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갔다.
‘이런 곳에 물이 있을까? 나는 정말… 잘 적응할 수 있을까…?’
낯선 장소, 낯선 사람들,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모든 것들이 라크의 가슴을 긴장과 기대감으로 가득 채웠다.
에스마는 라크를 그녀의 방 옆에 연결된 작은 동굴로 이끌었다.
입구에는 하얀 작은 돌이 박혀 있었는데, 에스마가 그 돌에 손을 대자 동굴 안이 은은한 빛으로 물들었다.
발밑은 자잘한 조약돌로 덮여 있어 발걸음 소리조차 부드럽게 삼켰다.
조금 더 들어가자, 천장에서 맑은 물이 졸졸 흘러내리는 곳이 나타났다.
깨끗한 물줄기가 작은 웅덩이로 모이고 있었다.
공기에는 미세한 물방울이 퍼져 있어, 라크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시원하고 상쾌한 물 내음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며, 그제야 마음 한쪽에 쌓였던 긴장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여긴… 따뜻하고 안전한 느낌이 들어…’
그는 잠시 물 흐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서 씻으면 돼. 수건과 옷은 여기에 두마.”
에스마는 작은 돌 탁자 위에 수건과 옷을 놓으며 라크에게 따뜻한 눈길을 보냈다.
‘하이델에서는 물이 귀해서 제대로 씻지 못했는데… 여기는 다르구나.’
맑은 물줄기 아래 서서 몸을 씻던 라크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차가운 물줄기가 따뜻한 모래 먼지를 씻어내자, 오래도록 눌려 있던 긴장이 풀리는 듯했다.
샤워를 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자, 에스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곧 저녁을 먹을 거야. 방에서 잠시 쉬고 있으렴.
카이르가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고 있단다.”
그녀는 환한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어 보였다.
라크는 방으로 돌아왔다.
부드러운 담요로 덮인 침대에 몸을 누이자, 마치 구름 위에 누운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하이델의 거친 매트리스와 삐걱대던 침상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모든 것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야…’
따뜻한 감각에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
그러다 누군가 살짝 어깨를 흔드는 감각에 눈을 떴다.
“피곤하지? 밥 먹을 시간이 되었어. 저녁을 먹고 다시 자거라.”
눈앞에는 에스마의 얼굴이 있었고, 그녀는 빙긋 웃고 있었다.
라크는 그녀의 웃음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식탁으로 향하면서 에스마가 덧붙였다.
“카이르는 좀 무뚝뚝해. 그래도 정은 많은 사람이야.”
라크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편으로는 긴장감에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식탁 앞에 섰을 때, 라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눈앞에 펼쳐진 음식들—노릇노릇 구운 고기, 신선한 채소, 따끈한 빵들.
하이델에서라면 절대 한 끼에 볼 수 없는 풍성함이었다.
‘아버지, 어머니와 여기에서 함께 살았으면 얼마나 좋을까…’
문득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저렸다.
눈가가 시큰해지고, 뜨거운 감정이 목 안까지 차올랐다.
“잘 먹겠습니다. 이런 음식은 축제할 때만 먹을 수 있어요.”
“우리도 매일 이렇게 먹는 건 아니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 만찬을 준비해 보았다.
라크 너에 대한 이야기는 에스마에게서 들었다.
쉽지 않은 길을 건너왔지…
자, 오늘만은 마음껏 먹어라.
에스마 당신도 힘들었을 텐데 많이 먹어요”
카이르는 딱딱하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부드러움도 함께 있었다.
세 명은 먹기 시작했다.
라크는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있구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카이르가 물었다.
“라크, 아버지의 성함은 어떻게 되시니?”
라크는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언노운이요.”
“성은?”
“…. 성은 몰라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하이델 마을에서는 성이 없는 사람도 많아요.
그래서 저도 이름만 있어요.”
카이르는 잠시 눈빛을 가늘게 좁히더니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라크, 너의 왼쪽 어깨를 보여줄 수 있겠니?”
라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소매를 걷어 올렸다.
카이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와 자세히 살펴보았다.
거기에는 북두칠성 모양으로 일곱 개의 점이 있었다.
카이르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말했다.
“에스마, 여기로 와서 이것 좀 보시오.”
에스마도 다가와 라크의 왼쪽 어깨를 살폈다.
두 사람의 얼굴에 놀라움과 기쁨이 번졌다.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후 고개를 끄덕였다.
라크는 점점 더 궁금해졌다.
“왜 그러시나요?”
카이르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낮게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다. 차차 알게 될 거야.
내일부터 공부와 수련이 시작될 거야.
이제 마저 먹고 들어가 쉬렴.”
라크가 방으로 돌아가자, 카이르와 에스마는 식탁에 마주 앉아 조용히 속삭였다.
“그분의 후손이 틀림없는 것 같소.
왼쪽 어깨의 북두칠성 표식은 잃어버린 왕족에게만 전해지는 징표니까.”
둘의 목소리에는 긴장과 설렘, 그리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예언의 무게가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