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은 이제 더 이상 마을이 아니었다.
사람이 머물던 자리도, 추억이 머물던 자리도 아니었다.
남은 것은 무너진 담과 재가 된 기둥 흩어진 기억들이었다.
라크는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생존에 필요한 먹을 것은 모두 불타 버리고 식수는 오염되어 아무것도 마을에서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
밤이되자 그는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왜 북쪽이었을까?
이유는 없었다.
다만 가장 빛나는 별 하나가, 늘 그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을 뿐이었다.
낮에는 뜨거운 땅이 발목을 물었다.
태양은 등짝을 태우고, 바람은 입술을 갈랐다.
밤에는 추위가 찾아왔다.
지하실에서 가져온 담요 한 장만이 그나마 라크를 밤의 추위에서 지켜주고 있었다.
간간이 하이델 마을에서 먹었던 사막의 풀을 발견하면 그것으로 허기를 약간 달래고 조금의 수분을 얻었다.
어느 순간 뜨거운 태양 아래 라크는 쓰러졌다.
라크는 뜨거운 모래 위에 얼굴을 묻은 채, 손끝조차 움직이지 못했다.
‘이대로… 끝나는 걸까…’
라크의 의식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정신 차려야 해! 난 이렇게 죽을 수 없어!’ 라크는 부모님을 떠올렸다.
모래 사이를 지나는 바람 속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살아야 해. 절대 멈추지 마.’
이 말을 되뇌며 의식을 차리려고 애썼다.
하이델은 사라졌다.
그곳에서 살아남은 아이는, 이제 다시 모래 위에 쓰러지고 있었다.
바람은 뜨거웠고, 숨은 짧았다.
죽음은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또각또각. 또각또각.
라크는 점점 커지는 발자국 소리를 통해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사람이다…’
하지만 동시에,
‘혹시… 또, 그들일 수도 있어.’
라크는 안도감과 함께 두려움도 엄습해 왔다.
라크는 있는 힘을 다해 등을 바닥에 두고 얼굴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렸다.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한 줄기 희망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자신이 살아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뜨거운 햇살과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가까스로 눈을 뜨고 지켜보았다.
그리고 혹시 몰라 옆에 있는 돌멩이도 오른손으로 쥐었다.
‘그가 만약 나쁜 사람이라면 내 마지막 힘을 다해 나를 지켜야 해.’
드디어 낯선 이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머리에 흰 천을 두르고 헐렁한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고 검은색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지팡이 위에는 하얀색 별 문양의 장식이 있었다.
별 문양의 장식을 보는 순간 라크는 안도하는 마음이 밀려왔다.
하지만 그는 나를 경계하듯 천천히 다가왔다.
내 팔이 닿지 않는 거리에 서서는 나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살고 싶으냐? 아이야!” 그 말을 듣고 라크는 놀라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인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마치 하늘과 모래 사이에서 솟구쳐 나온 바람 같았다.
“당신은… 누구시죠?” 라크는 간신히 말을 이었다.
여인은 다가와 라크의 손을 펴고 손안에 있던 돌멩이를 휙 던지고는 품 안에서 물병을 꺼내 라크의 입술에 조금 부어 주었다.
물 몇 방울이, 마른 입술을 적셨다.
그것은 단순한 물이 아니었다.
피와 먼지, 소금기와 절망으로 엉켜 있던 입안에 순간적으로 생기를 불어넣는, 작고 투명한 기적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정말 맛있어요…”
라크는 속삭이듯 말했다.
그녀는 다시 일어나서 라크를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목줄과 옷 사이로 살짝 빠져나온 펜던트의 일부가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흠칫 놀라며 말했다.
“펜던트를… 보여줄 수 있겠니?”
물을 조금 마시자, 힘이 생긴 라크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조심스럽게 목걸이를 꺼내 그녀에게 보였다.
금빛 금속 중앙에는, 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넌… 누구지? 그건… 어떻게…?” 그녀가 소리쳤다.
“하이델 마을의… 라크예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에 주셨어요.”
라크는 살짝 흐느끼며 대답했다.
“어머니의 이름이…?”
“이사벨이예요. 이사벨 게이지.”
“어머니가 죽으셨다고? 어떻게? 왜?”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요. 마을 사람들까지…”
라크의 목소리가 떨렸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었어요. 축제 날 밤에… 모두…”
그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손이 멈췄다.
지팡이 끝이 모래 위로 미끄러지며, 가는 선을 그었다.
에스마 자라는 허리를 굽히며 눈을 감았다.
숨을 길게 뱉은 후, 그녀는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 어머니의 친구란다. 에스마 자라.”
“에스마 자라” 라크는 어머니가 에스마 자라라는 친구가 오고 있다는 이야기를 기억해 내며 낮은 소리로 되뇌었다.
에스마는 지팡이의 별을 땅으로 기울이며, 낮고 부드럽게 별의 언어를 읊조렸다.
그녀가 그린 원 위에, 투명한 막이 퍼져나가 듯 텐트가 피어올랐다.
그곳엔 바람도, 열기도 닿지 않았다.
두 사람이 쉴 수 있는 넉넉한 크기였다.
그리고 에스마는 별 언어로 한가지 주문을 더 외웠다.
“자 여기로 들어가자.” 에스마는 놀라 쳐다보는 라크를 보며 얘기했다.
두 사람은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라크는 아늑함을 느꼈다.
사막의 뜨거운 햇살과 열기도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에스마는 품 안에서 물과 마른 빵을 꺼내 라크에게 주었다.
라크는 받아서 허겁지겁 먹었다.
목마름과 배고픔이 한꺼번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여기는 안전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법으로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했거든.”
“한숨 자렴”
에스마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라크에게 말했다.
라크는 스르르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라크가 눈을 떠보니 텐트 안은 깜깜했다.
텐트 안의 인기척은 없었다.
라크는 텐트 밖으로 나갔다.
에스마는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에스마 자라님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라크는 에스마에게 다가가면서 말했다.
“그냥 에스마라고 부르렴.”
에스마는 라크를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말했다.
둘은 나란히 서서 오랫동안 별을 쳐다보았다.
둘은 다시 텐트로 들어와 잠시 눈을 붙였다.
아침이 되었다.
에스마는 물과 빵을 라크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먹었다.
“라크, 하이델로 다시 가야 해”
에스마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왜… 다시 가야 하죠?”
라크가 놀라 쳐다보았다.
“이사벨… 너의 엄마를 만나서 나는 받을 게 있었단다. 그것을 찾아야 해.”
“하지만… 다 타버렸어요. 아무것도 안 남았다고요…”
“너의 어머니가 조치 해 놨을 거야. 그것은 우리별의 미래를 위해 매우 중요한 책이야.”
라크는 에스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에 어머니의 미소가 어렴풋이 겹쳤다.
“책… 어머니가 지켜냈을까…?”
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희 마을에 있었던 일은 이동하면서 이야기해 주렴. 이틀은 가야 할 테니.”
“자 출발하자.”
둘은 텐트를 나왔다.
에스마가 주문을 외우자, 텐트가 사라졌다.
“당신은 마법사시군요?”
“아니 그냥 조금 알뿐이야. 험한 땅을 지나오기 위한 몇 가지만 익혔지. 그렇지 않으면 여자 혼자 이 험한 땅을 어떻게 올 수 있겠니.”
에스마가 빙긋 웃었다.
둘은 하이델 마을로 함께 걸어갔다.
라크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학살의 기억을 털어놓았다.
에스마는 슬픈 표정으로 그것을 들었다.
“혹시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에스마는 아시나요?”
“나도 그것은 모른단다. 하지만 알려줄 만한 곳은 있을 것 같구나.”
“거기가 어디예요?”
“벨사레인 왕국. 거기는 상업을 중시하고 항상 정보를 모으지.
어쩌면 거기에서 학살자들에 대한 얘기를 들을 수도 있어.”
“그들이 우리를 죽인 사람들이라면요?”
“그럴 가능성은 작아. 그들은 분쟁을 좋아하지 않아. 안정적인 환경이야말로 상업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니깐.”
“그리고 하이델 마을은 칼디아 왕국 안에 있어. 만약 벨사레인 왕국이 뒤에 있다면 칼디아 왕국과 큰 갈등이 일어나서 두 왕국 간 전쟁의 빌미로 작용할 수 있어.”
라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쉴 때 에스마는 항상 텐트를 만들었다.
그때마다 라크는 ‘나도 이런 것을 알면 참 편하게 다닐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라크는 걸어갈 때 하이델 마을에서의 즐거웠던 기억을 들려주었다.
별의 축제에서 마을 사람들과 행복했던 순간도 함께.
두 사람을 하이델 마을에 도착하였다.
라크가 하이델 마을을 떠난 지 닷새 만에 돌아왔다.
마을은 라크가 떠났을 때 모습 그대로였다.
불타버린 집. 검게 그을린 제단. 피로 얼룩진 돌 들.
이를 본 에스마의 표정도 심하게 일그러졌다.
라크는 마을 사람들을 한꺼번에 묻은 무덤으로 향하였다.
라크가 꽂아 두었던 별의 장식들이 있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여기 어머니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묻혀 있어요. 아버지의 시신도 찾지 못했어요. 여기 차가운 흙 안 어딘가에 계세요.”
라크는 다시 흐느끼기 시작했다.
에스마는 라크를 꼭 안아 주었다.
라크는 에스마의 품 안에서 엉. 엉. 큰 목소리로 울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모든 슬픔을 토해내는 것처럼.
엉엉 울던 라크는, 그저 숨을 크게 들이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을 에스마의 품 안에 있은 후 라크는
“이제 어머니를 뵈러 가요.”
하면서 라크의 예전 집 쪽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주머니에서 어머니의 머리핀을 꺼내 에스마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내가 가진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에요.”
에스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그 핀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눈에도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어머니 제가 다시 돌아왔어요.”
어머니의 무덤 앞에서 라크는 눈시울을 적시며 말했다.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도 함께 떠올랐다.
앞서 모든 눈물을 다 토해 놓았는지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이사벨… 이사벨… 그리운 내 친구여. 내가 며칠 만 일찍 왔어도… “
에스마는 입을 막은 채 떨리는 어깨로 울음을 삼키다,
결국 주저앉아 참았던 통곡을 쏟아냈다.
통곡을 마친 후 에스마는 별의 언어로 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별의 언어를 조금 아는 라크에게는 이렇게 들렸다.
“나는 에스마 자라. 이사벨이 숨겨 놓은 것을 나에게 보여다오.”
하면서 지팡이의 별을 바닥에 치자 책과 두루마리 두 개가 나타났다.
“이사벨… 이사벨… 이것을 숨기느라 라크와 함께 숨지 못했구나…”
에스마는 한숨을 쉬며 나지막이 말했다.
라크가 보니 책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해독하고 있었던 ‘갈릴로스 제국, 별의 이야기’였다.
두루마리도 해독하면서 두 분이 기록을 해둔 문서였다.
“그런데… 그게 무슨 말이죠?”
“어머니가… 이 것들을 지키려다… 돌아가신 거예요?”
라크는 추궁하듯이 에스마에게 물었다.
“이 책은 이 땅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는 매우 중요한 책이야.
나는 한 달 전 이사벨부터 이 책을 해독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았단다. 그래서 너의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하이델 마을로 향했지.
함께 해독을 끝내기 위해.
그녀는 만약 자신에게 일이 생기면 마법으로 책을 숨겨 놓겠다고 했어.
이사벨은 마지막 순간에 책을 지키기 위한 마법을 부리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어.
그래서 너를 지하실에 먼저 숨겨놓고 책을 감춘 거야.
그 순간 누군가가 어머니를 죽였을 거야.
사실 이 책은 너를 위한 것이란다.
그래서 끝까지 지킬 수밖에 없었어.
자 이제 너는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해.
나를 따라가지 않겠니?”
책과 두루마리 들을 품에 넣은 에스마는 라크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함께 하이델 마을을 다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