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가 임직원들에게 해외 진출을 독려하며 자주 했던 말이다. 1970~80년대 한국 청년들에게 ‘세계 시장’을 꿈꾸게 만든, 시대를 초월한 선언이었다.
세계를 뒤흔든 리더의 생애
김우중 대우그룹 창업주는 1936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판사, 어머니는 교사였던 엘리트 가정에서 성장했지만, 한국전쟁 발발로 집안은 몰락했고 가족은 부산으로 피란을 떠나야 했다. 어린 시절, 그는 돈 한 푼 없이 거리에서 책을 팔아 학비를 벌었고, 매사에 정리정돈과 계획을 중시하는 성격으로 변해갔다. 가난과 몰락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경험한 유년이었다.
경기고등학교와 연세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한 그는 삼성물산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기업가로서의 본능은 그를 직장인의 삶에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다. 스물아홉의 나이에 대학 친구들과 함께 '대우실업'을 창업하며 사업가의 길에 들어섰다. 당시 자본금은 고작 500만 원. 하지만 그는 ‘기민한 무역’, ‘빠른 회전율’, ‘현장 중심 의사결정’을 전략으로 삼았고, 주변에서는 ‘무역 천재’라 불렀다. 1970년대 오일쇼크, 불안한 정세 속에서도 그는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중동 등 그 누구도 가지 않던 지역으로 먼저 달려갔다. 이국의 시장에서 이 회장은 직접 땀을 흘렸고, 현지인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거래를 성사시켰다.
대우는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과 맞물리며 빠르게 덩치를 키워나갔다. 1976년 대우중공업, 1978년 대우자동차 설립을 통해 제조업으로도 영역을 확장했고, 철강, 조선, 건설, 금융, 전자, 가전 등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로 문어발식 확장을 감행했다. 특히 김 회장은 정부의 개발원조정책에 따라 해외에서 사업권을 따내는 데 강했고, ‘대우맨’이라 불리는 해외주재원들이 세계 130개국 이상에 진출했다. 그는 “본사는 명동에 있지만 심장은 아프리카에 있다”고 말할 정도로 해외를 기반 삼아 기업을 성장시켰다.
1980~90년대, 대우그룹은 현대, 삼성, LG에 이어 ‘4대 그룹’ 반열에 올라섰고, 한때 계열사 수 41개, 종업원 25만 명, 수출 비중 70% 이상을 자랑했다. 김 회장은 해외로 나간 임직원들을 위해 ‘대우주택’과 ‘대우학교’를 세워 가족 동반 근무를 장려했고, 신속한 의사결정과 자율경영 문화를 확산시켰다. 다른 그룹들이 국내 소비시장에 집중할 때, 김 회장은 철저히 수출과 세계화를 추구했다.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그의 말은 한 세대의 청년들에게 좌우명이 되었다.
1999년 외환위기 이후 대우그룹은 과도한 차입경영과 환율 급변, 유동성 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해체됐다. 하지만 김 회장은 끝까지 도피하지 않았다. 해외 체류 중이던 그는 자진 귀국해 조사를 받았고, 법적 책임을 진 뒤에도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니라, 멈췄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2019년 향년 83세로 별세할 때까지 그는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의 상징으로 남았다.
리더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
김우중 회장의 인생에서 가장 상징적이고도 운명적인 순간은 무모할 정도의 글로벌 확장 전략을 본격화한 1980년대 후반이다. 당시 한국 기업들은 대부분 내수와 선진국 수출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김 회장은 “앞으로의 시장은 아시아도, 유럽도 아니다. 아프리카와 남미, 동유럽이 기회의 땅”이라며 남들이 꺼리던 지역을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그의 전략은 명확했다. 인건비가 저렴하고 자원은 풍부하지만 제조 기반이 없는 신흥국에 진출해 ‘제조→판매→재투자’까지 한꺼번에 실행하는 구조였다.
그는 구체적으로 폴란드, 우즈베키스탄, 베트남, 리비아 등에 자동차, 전자, 가전 공장을 세우고, 심지어 자체 브랜드로 현지에서 생산·판매까지 주도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에 설립한 ‘우즈대우’는 현지 최초의 자동차공장으로, 국산차가 국경을 넘어 현지 브랜드로 자리잡은 대표적 사례가 됐다. 김 회장은 각국 대통령들과 직접 교섭하며 시장을 열었고, 주재원들에게 “이곳에서 10년을 살 각오를 하라”며 ‘진짜 현지화’를 요구했다.
이 전략은 단기간에 폭발적인 수출 증가로 이어졌다. 대우는 수출의 70% 이상을 이들 비주류 국가에서 올렸고, 연매출 70조 원, 계열사 41개라는 사상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림자도 존재했다. 빠른 확장을 위해 대부분의 투자가 차입에 의존했고, 내부 통제보다는 속도와 자율에 집중한 탓에 리스크 관리가 미흡했다.
IMF 외환위기 직후, 환율이 급등하고 해외 자산 가치가 하락하면서 대우는 심각한 유동성 위기에 처했다. 그는 자구안을 제출하고 계열사 매각을 추진했지만 이미 시장의 신뢰는 돌아서 있었다. 1999년, 대우그룹은 역사 속으로 해체됐다. 김 회장은 검찰 수사에 응했고, 불법 차입과 분식회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이 터닝 포인트는 단지 몰락의 역사로만 기록되진 않는다.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지금도 대우의 실패를 단순한 탐욕이 아닌, 시대와 시스템의 한계에서 나온 ‘실패한 혁신’로 해석한다. 김 회장의 ‘무대는 세계’라는 철학은 여전히 살아 있다. 실패로 끝났지만, 그가 남긴 도전정신과 세계관은 수많은 후배 기업인들의 나침반이 되었다. 그것이 김우중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회자되는 이유다.
거인의 어깨와 나란히 하려면
김 회장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시야의 확장’이다. 그는 늘 “왜 서울만 보느냐, 왜 한국만 보느냐”고 반문했다. 보통 기업인들이 국내 시장의 경쟁에 몰두할 때, 그는 아예 지도 전체를 펼쳐놓고 생각했다. 이 글로벌 시야야말로, 단기간에 대우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만든 가장 중요한 무기였다.
이 자질은 오늘날에도 절대적으로 유효하다. 특히 디지털과 물리적 경계가 무너진 시대에는 더더욱 그렇다. 독자들이 창업을 준비하거나 비즈니스 전략을 짤 때, ‘지역 중심’에서 ‘글로벌 가치사슬 중심’으로 관점을 전환해보자. 김 회장은 언어도, 인프라도, 정치 체제도 다른 나라에서 직접 공장을 세우고 팔며 부딪혔다. 그 실행력은 시야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그는 “우물 안에서 최고가 되는 것보다, 바다에서 살아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독자들도 업의 본질을 고민할 때, 세계 시장의 흐름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김 회장의 성공과 실패는 모두 ‘세계’를 배경으로 했고, 그의 인생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교훈을 준다. 도전은 때론 실패하지만, 시야는 결국 사람을 키운다.
리더도 사람이다?!
어느 날 김 회장이 해외 출장 중에 현지 직원에게 “이 동네 맛있는 집 어딨나?”라고 묻자, 직원은 “회장님, 여기 인터넷도 안 되고 맛집도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김 회장은 웃으며 “좋아, 우리가 여기서 제일 맛있는 라면집을 열자”고 했다. 이 말은 즉석에서 실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