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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머신 황도캔을 타고

by 여온빛




모든 게 귀했던 그 시절

텔레비전은 집안의 중심이고

다이얼전화기는 신비로운 통로였고

작은 선풍기 한대는 에어컨보다 더 시원했고

냉장고 한대 있으면 부자 소리 듣던 그 시절


이 모든 풍요 속 가장 최고의 경지요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요

이것 하나 있으면 어느 집 잔치도 부럽지 않게 한

황도 통조림 한 캔


그 한통에 온 집안 아이들 뛰쳐나와 환호성을 불렀고

그 향기가 온 집안을 뒤덮었고

두툼하고 촉촉한 한 조각에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


빨리 먹어버리면 그 귀한 것이 사라질까 아까워

혀끝에 얹어 그 달달함 오래토록 붙들라 하는데

떠 앉는 순간 살 살 눈 녹듯이 없어지는 황도 한 조각


비록 한 조각조차 맛보지 못했어도

자식들의 행복한 모습에 달달한 맛을 본 아버지에겐

아직도 달달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비록 한 조각조차 맛보지 못했어도

자식들 입에 부지런히 넣어주던

울 엄니 손에는 여전히 그 달콤한 사랑이 남아있다


비록 한 조각이었어도 자식들에게

황도의 여운은 지금까지도 남아있다

허연 국물 한 방울까지 다 마셨어도

달짝지근한 아쉬움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땐 참 모든 게 귀했지

그래서 모든 게 참 귀했지


많지 않아도 함께 나누는 한 끼가 귀했고,
그 귀한 텔레비전 앞에 모여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던 시간이 귀했지

저 먼 고장에서 오랜만에 들려주는

수화기 너머 고모의 안부인사가 귀했더랬지


모든 게 풍족한 지금 이시절

마트 진열대에 아무리 많이 쌓여있어도

제대로 된 눈길조차 받지 못하는 잊혀진 황도


이제는 아쉬움 없이 열 캔도 사 먹을 수 있는데

그 시절의 아쉬움은 아직도 생생한데

내 마음만은 아쉽게도 그 시절 같지 않구나


그 시절의 마음, 황도캔에 있던 마지막 한 방울까지 꺼내야

비로소 그 맛을 완성할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풍요로워졌는데

널 대하는 나는 그때의 내가 아니어서 슬프구나


비록 한 조각뿐이었도 풍요로웠던 그 시절

비록 가진 게 많지 않았지만 나누는 마음만은 풍요로웠던 그 시절

진짜 풍요는 소유가 아니라 나눔에 있음을 일깨워주는 그 시절



손에서 손으로 전해지던 작은 행복은 사라지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따뜻함은 어디 가고

세상은 풍요로워졌다는데 우리들 마음은 왜 이리 고독한 건지


그 시절엔 없어서 모든 게 귀했고

지금은 넘쳐서 잊혀지는 것이라면

나는 황도캔을 타고 타임머신여행을 떠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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