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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아휴직 대신 선택한 재택근무

Chapter 3. 일과 가정, 사이에서

by 문장담당자

"육아휴직 대신 선택한 재택근무 - 현실과 이상 사이, 나만의 선택"


정확히 말하면 나는 육아휴직을 쓰지 않았다.
재택근무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심하게 살았던 건 아니다.
다만, 늘 조금 늦었고, 조금 부족했다.

아이의 첫 돌을 지나 두 돌 즈음까지도 아내는 육아를 전담했다.
이로 인해 조금 더 유연한 스케줄이 가능하단 이유로 육아를 전담했던 아내는 2년 가까이 복직 시기가 계속 미뤄지게 됐다.
나는 회사를 계속 다녔다.
출퇴근하고, 회의하고, 업무를 마치고 그리고 가능한 한 빠르게 집에 가려 애썼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보다 빠르고, 아이의 하루는 내 하루보다 짧았다.


점심시간에 잠깐 얼굴을 보러 가던 날이 있었다.
반찬이 남아있었고, 장난감은 어질러져 있었다.
아내는 멍한 눈으로 아이를 안고 있었고, 나는 몇 분을 머뭇거리다 “잠깐 들렀어”라고 말했다.

그 말이 자꾸 미안했다.

퇴근 후 집에 도착했을 땐 불이 꺼져 있었다.
문을 조심히 열고 들어가면 거실 매트에서 아이와 함께 잠든 아내의 모습이 보였다.
둘 다 지쳐 있었고, 나는 그 곁에 서 있기만 했다.


그 밤은 나를 오래 멈춰 세웠다.
'나는 오늘 하루, 누구와 있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사무실 안에서 나는 매일 ‘누군가의 일’을 돕는다.
인사 담당자로서 채용을 조율하고, 평가와 보상을 정리하고, 복지 제도를 설명한다.
누군가의 워라밸을 설계하는 입장에서, 정작 내 삶의 균형은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무척 어색하게 만들었다.


아내는 종종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나에게 육아 맡겨둬.”
하지만 그 웃음 뒤의 숨결은 늘 바빴다.
아이는 자라고 있었고, 그 시간의 대부분을 나는 놓치고 있었다.

육아휴직, 재택근무.

그 두 단어는 선택지가 아니라
때로는 ‘미안함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선택하지 못했다기보단 선택하지 않았다.

조직에서의 내 자리, 타이밍, 프로젝트, 팀 사정…
너무 많은 현실이, 너무 솔직하게 나를 조직으로 이끌었고, 나는 그 틈을 돌보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후회만 하는 건 아니다.

아이를 위해, 가족을 위해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감정이라는 건 ‘최선’이라는 말로 쉽게 중화되지 않는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오늘 아이가 나보고 그랬어.

'아빠, 왜 자꾸 가?'라고.”
그 말을 듣고 난 후 나는 다음 날 점심에도 아이를 보러 갔다.
밥을 먹는 손을 보고, 손바닥 위에 쥔 장난감을 보며, 작고 짧은 시간을 꼭 쥐었다.

그 시간은 짧았지만, 그것만으로 하루를 달리 바라볼 수 있었다.


인사담당자로서 나는 늘 말한다.
“가정과 일을 병행할 수 있는 조직이 필요합니다.”
“육아휴직은 권리가 아니라 보호 장치입니다.”
그 말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내 삶과 닿으려면 내가 먼저 '현실과 감정의 간극'을 인정해야 했다.


지금은 육아휴직도, 재택근무도 경험하지 못했지만 그 시간의 무게를 안다.
혼자서 아이를 안고 시간을 보내는 사람의 외로움, 누구에게도 칭찬받지 않는 노동의 고됨,
그리고 “아빠, 왜 자꾸 가?”라는 질문 앞에서 속수무책이 되는 마음을.

그 마음 덕분에 나는 조금 더 ‘다른 사람’을 바라보게 되었다.
사직서를 내는 육아휴직 복귀자, 돌봄 문제로 출근시간을 조정 요청한 구성원, '워킹맘’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사람들의 메시지를 이제는 더 깊이, 더 조심스럽게 읽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일터에 있고 아내는 아이와 함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의 선택이 서로를 위한 것이었다는 걸 믿기로 했다.


아직도 저녁에 늦게 도착해 잠든 아이와 아내를 바라보는 날이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다짐한다.

“오늘은 놓쳤지만, 내일은 더 곁에 있어볼게.”

그 다짐은 매번 어설프지만, 내가 가진 최선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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