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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죽은 것은 누구인가

죽은 고양이, 불붙는 심판, 그리고 한 팩의 우유.

by 제환

법정극을 흉내 낸 오브젝트들의 심판 이야기.

이야기는, 우유가 바닥에 흘러내릴 때 끝난다.






죽은 새끼 고양이를 등진 채,

우유팩이 다른 이들을 향해 외쳤다.

“모두 정숙하시오, 지금부터, 불쌍한 새끼 고양이 ‘키티’의 죽음에 대한 재판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평소보다 낮고 단단한 목소리였다.

고양이의 죽음 앞에서 순간 얼어붙었던

감정들이, 기이할 만큼 빠르게 이성을 되찾아가는 게 느껴졌다.



유리컵과 실타래, 거울, 전선코드는 당황스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잔인한 짓을 벌인 무언가를 벌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상할만큼 안도감을 주었다.

애초에 생명을 거리낌없이 앗아가는 자와 함께 있는 것보다 더욱 불편한 게 있기나 할까?



“아아— 불쌍한 키티! 세상에서 가장 조용한 새끼 고양이가 되어버리고 말았군요? 이런 슬픈 일이!”

라벨이 감정을 흉내 내듯 외쳤다.

우유팩은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진심이든, 퍼포먼스든… 지금은 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겠군요’



우유팩의 말투엔 어쩐지 ‘주도권’에 대한 집착이 묻어났다.

곧이어 굳은 목소리로 진중하게 입을 열었다.



“이건 단순한 사고가 아닙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고양이가 죽었으니, 이건 우리 중 누군가, 키티의 생명을 앗아간 게 확실합니다.

진실은 침묵 속에 묻히지 않습니다.”



그 말은 마치, 자신을 향한 다짐처럼도 들렸다.



혼란스러워하는 실타래의 반응에 눈살을 찌푸린 전기코드가 그를 툭 쳤다.

이윽고 우유팩이 천천히 그들을 둘러보고는,

심판대에 세울 이름을 호명하였다.



“우선 첫 번째 용의자!

위태롭게 선반 위에 놓여있던 유리컵은 앞으로 나오시오!”



우유팩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놀란 이들이 자연스럽게 몸을 비키며 유리컵을 응시하였다.

덕분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유리컵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침을 삼킨 유리컵이 운을 뗐다.



“네가 어떤 의미로 부른지 알고 있어.

난 항상 내가 있던 자리를 있었을 뿐이다.

떨어진 건 내 의지가 아냐.”



“오! 정말이지 완벽하게 절제되어 있고, 어떤 이유인지 꿰뚫어 보시기까지 하였군요!

마치 ‘이런 참극이 일어나면 이렇게 대답해야겠다’ 하고 준비한 것처럼 말입니다?

아니면 설마, 당신은 오래전부터 이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던 건가요?”



“거기 너, 이상한 방식으로 몰고 가지 마.

나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야.”



“이상한 방식이라뇨?

저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너무한 거 아닙니까?”



라벨의 비아냥에 유리컵이 눈살을 찌푸렸다.

곧이어 라벨을 진정시키며 우유팩이 입을 열었다.

한층 더 이성적이고, 더 의심스러워하는 말투다.



“라벨의 말처럼 놀라우리만큼 절제된 답이군요.

게다가 그 말이 사실이라면 억울할 법도 하고 말이죠.


하지만 알고 있습니까?

이곳에선 당신의 의도가 어쨌든 상관없습니다.

유리컵씨의 무게만이 이 상황에서 진실되고 중요하게 작용할 뿐이죠.”



라벨이 작게 키득였다.

유리컵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다른 이들을 한 번 살피고는.

급히 우유를 향해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키티가 먼저 내게 왔고… 나는 그냥, 가만히 있었을 뿐이야.

내 잘못이 아냐. 악의는 없었어. 정말이다

그리고, 너도 거기 있었잖아. 너도 봤잖아”



순간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곧이어 우유팩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였다.



“우유는 누군가를 해하지 못한다는 걸 모르십니까?

저는 그저 우유일 뿐입니다.

넘쳐서 누굴 죽이는 일이 없죠.

그리고…… 알고 있습니까?


기록에 따르면, 키티는 이전에도 유리컵씨에게 다가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도 당신은 흔들리고 있었죠.

대체 언제부터 준비하고 있었던 건가요?

그 침묵은 기회가 오기까지 기다렸던 흔적입니까?”



“시끄러! 누가 뭐라고 해도 난 절대 아냐…!

나는 결백하다고…!”



“그렇게 말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답니다!”



라벨이 비웃었다.

결국 유리컵은 자신의 무죄를 확실히 증명해내지 못하였다.

그러니 처형 역시 저가 감내해야 할 것이다.



다른 이들이 유리컵을 붙잡아 테이블 밑으로 이끌었다.

유리컵은 억센 손길에 이끌려 저항하면서도

그들을 회유하고자 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이건 아니잖아!

애초에 내가 떨어져서 키티를 죽였다 치더라도

나보다는 나를 밀어트린 진짜 범인을 찾는 게 우선 아닌가?!

이런 식으로 해봤자 뭐가 달라지지?!”



“아뇨, 아닙니다.

당신이 틀린 게 하나 있는데,

우선 적으로 제거해야 할 건 ‘떨어진 자’가 아니라

‘준비되어 있던 자’ 입니다.”



다른 이들의 귀엔 전혀 들리지 않을 얘기였다.

그들은 쉬이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는 자와 함께 있고 싶지 않았을뿐더러, 치밀한 범죄계획을 짠 자와 있는 건 더더욱 싫었을 테니까.



그들은 범죄자를 제거하고 다시 평범한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



곧이어, 테이블 아래에 유리컵을 붙잡아 고정한 이들이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후라이팬을 떨어뜨려 유리컵을 깨트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튀어 오른 파편이 바닥에 흩뿌려진다.

빛을 받은 반짝이는 잔해가 실타래의 몸에 박히고, 거울에 기스를 냈으며, 전선코드의 몸을 스쳤다.

죽어서도 피해를 준다는 게 거울과 전선코드의 반응이었다.

어쨌거나 유리컵은 이제 부서진 유리조각일 뿐이었다.



“그럼 이제 다 해결된 것 맞지? 너무 피곤해. 자, 이제 우리 이 얘긴 끝이야, 끝.”



유리컵의 모습을 보던 코드가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거울 역시 동감을 표했으나— 우유팩과 라벨은 그저 침묵하며 실타래를 바라볼 뿐이었다.



“……”



“아핫! 이것 좀 보세요! 왠지 2막이 시작될 것 같은 예감이지 않나요?”



라벨의 말에 코드와 거울 역시 천천히 실타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구석에서 웅크린 채 실 끝만 보던 실타래가 입을 연다.



“…저, 저기… 그, 얘들아…… 어, 어떡하지……?”



“뭘 말하는 거야? 불안하게 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



“나… 기억… 기억났어…

그, 아까 전에. 저기, 유리컵이… 부서져 죽기 전에 알려줬는데…

누구, 누군가 자신을…… 미, 밀었…… 어떡해……?”



일순 공기가 뚝 끊기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울과, 이를 흥미롭게 바라보는 라벨, 그리고 표정이 굳어가는 우유팩의 각기 다른 반응만이 드러났을 뿐이다.



덜덜 떠는 실타래를 한참 바라보던 코드가 겨우 숨을 뱉었다.

온갖 복잡한 것들이 한 데 엉켜 나오는 것에 가까웠다.

헛웃음을 터트린 코드가 입을 연다.



“지금? 이제 와서?”



“나, 나도 무서웠단 말이야…!

너무… 너무 갑작스럽고 혼란스러웠어……!

내가 말해도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아서… 그래서 가만히 있었어…”



“그걸 변명이라고 하는 거야? 혼란스럽다는 핑계 대지 마!

결국, 넌 유리컵을 살릴 수 있었던 순간에 말하지 않았다는 거잖아.”



코드의 말은 날카롭게 뻗어나갔다.

제 손으로 무고한 이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니, 참 끔찍한 얘기지 않나.

그래서는 안 되었다. 그런 이야기는 안 된다.



실타래에 박혀있던 유리컵의 잔해가 튀어 올라 그의 전선을 스쳤음에도 코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 그래. 그런 거야.

아까 얘기를 하던 유리컵이 돌아봤잖아?

솔직히 말해봐. 이미 넌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 얘기하지 않았던 거 아냐?


고양이도 네가 숨을 못 쉬게 엉켜 들어 죽인 다음 유리컵한테 덮어씌운 거지?!

역겨운 놈!”



“아냐!! 난 진짜 그럴 의도 없었어…!!

나도 지금 생각난 거라고…!!

제발 내 말을 믿어줘!”



“입 다물어!”



실타래가 울먹이며 외쳤지만, 누구도 울음을 받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물며 그들의 중재자로 움직이던 우유팩마저도, 지금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느라 그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으니까.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우유팩은 유리컵이 자신이 처형한 범인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논리는 완벽했으니까. 그런데, 유리컵이 범인이 아닐지도 모른다니.



“뒤늦게 떠오른 기억은 종종 조작되기도 한다는 거, 실타래 씨는 알고 계시나요?

제법 그런 일이 흔하답니다. 원래 상상과 현실의 경계는 얇거든요!”



우유팩을 대신하여 라벨이 대꾸하였다.

이윽고 코드가 우유팩의 이름을 외쳤다.

어서 판결을 내리라는 듯이.



당황한 우유팩이 라벨을 흘끗 보면, 라벨 역시 고개를 끄덕일 따름이다.

우유팩이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떨리는 목소리는 실타래의 애원에 묻혀 좀체 느껴지지 않았다.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여기… 있으니까요.”



이상. 키티와 유리잔의 목숨의 무게만큼 끔찍한 형벌에 처합니다.

우유팩이 말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이 코드가 실타래를 움켜잡았다.



살려달라 울부짖는 실타래를 질질 끌어 벽난로에 처박아 넣으면

조용히 거울이 그 뒤를 따라왔다.



타오르는 불만큼이나 격렬한 비명이 울렸다.

살려달라는 말과 울음이 타오르며 재가 되고,

모든 이들이 그 끝을 지켜볼 뿐이다.



보드랍던 실이 타오르며 역한 냄새를 풍겼다.



“…그러고 보니, 거울 씨도 유리컵 씨를 붙잡았던 걸로 알고 있는데.

거울 씨는— 알고 있었군요.”



실타래의 끝을 바라보던 중, 의아함을 느낀 우유팩이 거울을 올려보았다.

길게 늘어지는 말 사이에 두 시선이 얽혀들었다.



한없이 무감각해 보이는 표정에

우유팩이 참담한 표정을 드러내었다.



“들었어요. 유리컵이 그렇게 말하는걸.

근데 그게 저와 무슨 상관이죠?

저는 그저 비출 뿐이랍니다.

아무 판단도 하지 않았고,

여러분한테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들었다고요…?

들었는데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겁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되묻는 우유팩을,

거울은 되려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응시했다.



꼭 자신이 무얼 해야 하냐는 듯한 모양새로

뻔뻔히 덧붙인다.



“그건 제 일이 아니잖아요?

저는 항상 제가 본 걸 보여주는 거랍니다.

판단은 여러분이 하는 거고요.”



“그럼 당신은,

유리컵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걸 말하지 않았고,

대신 아무 일 없는 척 조용히 있었단 겁니까?”



“어머, 싫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아무 일 없진 않았죠.

그 말이 사실인지도 몰랐고,

다들 흥분해 있는데 괜히 거기에 혼란만 더하라는 말씀이신가요?”



그런 거울의 대답에 분노한 건 우유팩이 아닌 코드였다.



가만히 얘기를 듣던 코드는 주먹을 꾹 쥔 채,

분노를 억누르는 목소리로 거울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너… 진짜, 말하지 않은 이유가 그거야?

단지 불편하고 분위기 흐릴까봐?

그게 끝이라고?”



거울이 일말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원래 그런 역할이 아니잖아요?

판단하는 자는 항상 따로 있답니다.

나는 그저 반사할 뿐이에요.”



“그 반사 때문에

모두가 잘못된 판단을 하였습니다.”



우유팩이 괴로운 표정으로 답했다.



“거울 씨. 당신이 말하지 않은 그 순간,

당신은 ‘침묵으로’ 살인을 방조한 겁니다.”



“네? 잠깐, 그건 좀 과한 해석 같은데요?

전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에요!”



“그 ‘가만히 있음’이,

누군가를 죽였습니다.”



다들 너무 예민한 것 아녜요?

제 상황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거울이 코웃음을 치며 되물었다.



“누군가를 비추는 게 어째서 죄가 되나요?

저는 제가 본 걸 왜곡하지 않았어요!

그냥 진실만을 비추었고,

진실을 모두가 제 마음대로 해석한 거잖아요!”



쏘아붙이듯 대답하는 말에

라벨 역시 작게 감탄했다.



“이렇게 완벽하게 책임을 지지 않는 자는 오랜만이네요.”



우유팩은 그저 고개를 젓는다.



“당신이 만든 진실은,

누군가의 죽음을 정당화한 도구였습니다.”



“내가 만든 건 없었어요!

사람들이 원한 걸 보여준 것뿐이라니까!”



우유팩의 말에 날카롭게 외치는 거울의 앞에

코드가 조심히 다가갔다.



이것을 자신을 감싸주기 위함이라고 생각했는지

하소연을 하려던 거울은—



“너는 정말이지, 최악이야.”



일순간, 코드의 행동에

거울은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뒤로 밀려 넘어졌다.



깨진 유리 조각이 파열음을 내며 방 안에 튄다.

튀어 오른 조각에 비친 마지막 얼굴은

고양이도, 실타래도, 유리컵도 아닌,

거울 자신의 모습이었다.



우유팩은 죽어버린 거울을 보며

가슴께가 식어가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모든 게 이상하다.



분명 논리도 완벽했고, 증거도 완벽했었다.

처형당한 이들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까지 신경이 쓰이는 걸까.



왜 나는 이 재판의 중심에 섰더라?

그저 모든 이들보다 높은 위치에 있고 싶었는데.

멋진 존재가 되고 싶었을 뿐인데.

모든 게 망가진 느낌이 들었다.



‘정의’라는 단어가 자꾸만 입안에서 형태가 바뀌어 간다.

어쩌면 내가 여태 착각하고 있던 게 아닐까? 가령…….

우유팩은 시선을 돌려 제 몸에 붙은 라벨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라벨은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고생했어. 이제 진짜 완전히 끝나버렸네.”



거울의 파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있던 코드가

우유팩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들려온 건 우유팩의 목소리가 아니라,

여전히 텐션이 높은 라벨의 목소리였다.



“아직 하나 남아있지 않습니까?

조용히, 모든 순간에 있었던 존재.”



“뭐…?”



“바로 당신 말입니다, 전선 코드.”



급히 고개를 돌린 코드가

라벨을 향해 불쾌하단 표정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진심이야?!

여태 계속 내가 했던 행동을 못 봤어?!

난 아무것도 안 했다고!”



“그래요, 당신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답니다.

그게 죄인 거예요.”



우유팩을 흘끗 보며,

그가 생각에 잠긴 걸 확인한 라벨이 말을 이어갔다.



“처음 실타래가 흔들렸을 때,

거울이 침묵할 때,

전부 당신은 가장 먼저 다가가 그들을 처형했습니다.”



“나는, 난 그저 너희가 말한 대로 따랐을 뿐이잖아!

솔직히, 네가 우리 모두를 이간질시키고

말로 죽여놓고는 이제 와서 그 책임을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야…?”



주춤거리는 코드와 달리

라벨은 되려 활짝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말한 대로 움직이는 자는,

칼보다 위험한 법임을 모르나요?”



반박하지 못한 코드가 주변을 급히 둘러보았다.

자신의 편을 들어줄 이들은 이미 전부 처형당하고 없었다.

참담한 표정으로 코드가 무너져 내렸다.

명확히 들을 수 없는 언어로 소리를 내질렀다.



라벨의 행동을 멍하니 바라보던 우유팩이

뒤늦게 행동한 건, 라벨이 입을 열며 말했을 때였다.



“이럴 줄 알았어요.

자, 이제 유죄를 외칩시다.”



“어… 그러니까, 전선 코드, 당신은 자신의 의지 없이……”



“다 너 때문이야!!

모두 네 말에 끌려가서 하나둘씩 죽어갔다고!!

라벨, 너야말로 진짜 살인자야!

말이라는 칼을 들고 우리에게 거침없이 휘둘렀잖아!!”



악에 받친 코드의 외침에

라벨과 우유팩이 일순 행동을 멈췄다.

미묘하게 굳은 라벨의 표정을 발견한 우유팩이

떨리는 목소리로 조금씩 힘겨이 말을 이어갔다.



“마지막… 마지막엔 도망치듯 비난을 흘렸습니다.

이는 다른 이들의 목숨을 가지고 논 죄…

확실한 유, 죄입니다…”



말을 마친 뒤에도 이어지는 비명에

그제야 우유팩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제 몸에 붙은 라벨과 자신,

그리고 코드 외엔 그를 죽여줄 사람이 없었다.



결국, 가쁜 숨을 몰아쉬던 우유팩이

어쩔 수 없이 가위를 가져와 코드를 잘라내었다.



굵은 전선들이 한 데에 뭉쳐있어

좀처럼 쉽게 잘리지 않았다.

고통 속에서 코드가 더욱 악에 받친 비명을 내질렀다.

반쯤 뜯긴 형태로 도망을 가려던 코드는

뒤쫓아간 우유팩의 손에 기어이 숨을 달리했다.



처참한 방안에 살아 있는 것이라고는

이제 우유팩과 라벨밖에 없다.



“잘했어요, 우리가 해냈어요.

우리가 고양이를 죽인 이들을 처형시켰다고요.”



라벨이 신난 듯이 떠들어댔지만,

우유팩은 침묵을 유지했다.

라벨 역시 잠깐의 침묵 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코드의 말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죽기 직전엔 누구나 핑계를 대잖아요?

이제 다 끝났어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당연하죠!

그게 우리가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이었잖아요?

우린 그걸 완벽하게 해낸 거예요!

난 당신이 참 자랑스럽답니다!”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라벨을 보며

우유팩은 차마 웃을 수가 없었다.

이윽고 다시 주변을 둘러보던 우유팩이 입을 열었다.



“근데 왜 나는 계속 마음에 걸리는 걸까…”



“왜 나보다 코드를 더 믿는 거예요?

나도 무서웠어요.

그렇지만 나는 정말 당신을 도와주고 싶었던 거였는데.

당신은 흔들리고 있었잖아요.

나는 당신과 한 몸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는 하나니까,

나는 당신에게 방향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이런 몸으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말뿐이잖아요?”



“그런데, 그 말들이 너무 강했어.

그 말들에 끌려다니면서

나는 정의를 구현하는 중이라고 착각했으니까.”



고개를 떨군 우유팩의 말에

라벨이 당황한 듯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으로 한참이나 머뭇거리다가

조심스럽게 다시 입을 열었다.



“믿어줘요.

나는 진짜 범인을 잡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런데 왜,

단 한 번도 ‘혹시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는 말은 하지 않은 거야?”



“그건…

누군가는 끝까지 방향을 지켜야 하잖아요?

내가 흔들렸다면,

당신은 여기까지 도달하지도 않았어요.

왜 자꾸 저를 의심하는 거예요?

여즉 믿고 잘 따랐잖아요.

왜 지금 와서, 나한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는 건데요?

이거 아녜요.

제대로 판단해보란 말예요!”



“네 말에 나는 계속 그저 이끌려갔으니까!

이제라도 판단 중인 거야!

너는 그 혀로 모든 걸 죽였잖아!

혹시 알아?!

네가 다른 애들도 그렇게 꼬드겨서 키티를 죽게 만들었을지!

아니면 내가 잠든 사이에 키티를 꼬드긴 다음

죽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고!

너는 유죄야!

이미 그렇게 많은 이들을 죽인 너도 유죄라고!”



악에 받쳐 외치는 우유팩에게

항의하듯 라벨이 입을 벌렸으나,

우유팩이 제 몸에 붙은 라벨을 뜯어낸 것이 더욱 빨랐다.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 라벨을 억지로 쥐어뜯자,

라벨이 괴로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가 입이 있었는지,

또 어디에 눈이 있었는지조차 분간되지 않는다.



수갈래로 찢어진 라벨은

이제 라벨이 아니게 되었다.

한낱 쓰레기에 불과했다.



제 숨소리를 빼면

고요한 방 안에서 한참 생각하던 우유팩은

모든 게 시작되었던 새끼 고양이의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하나뿐인 발소리가 이질적이다.



“이제야 모든 게 끝났어, 키티.

너를 위한 정의였어.

모든 걸 바로잡기 위해 심판한 거였는데…

분명 그랬는데 왜 이렇게 된 걸까.”



우유팩은 조용히 고양이의 머리를 안았다.



엉망이 된 방, 부서진 오브젝트들.

이상하게도 그 어떤 장면보다,

지금이 더 고요하고 차가웠다.

그리고 그 고요 속에야 보이는, 하얀 입가.



“……이 냄새…”



그제야 우유팩은 문득,

아주 사소했던 장면 하나를 떠올렸다.



사람의 손이, 작은 그릇에 무심히 우유를 따르던 장면.

…그리고 고양이가, 그것을 핥아먹던 장면.


너무나 평범했던 풍경이,

이제는 더 이상 평범하지 않게 다가왔다.



“내가… 내가 죽인 거였어…?”



우유팩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진실은,

단숨에 그의 내면을 갈라놓기엔 충분하였다.



“나였어… 내가 죽인 거였다고…!”



우유팩의 팩이 천천히 부풀기 시작하였다.



바람이 아닌, 죄책감과 파국으로.

모든 것을 심판하고도

정작 자신을 몰랐던 자의 파국.



곧이어 쩍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갈라진 우유팩에서 우유가 흘러내렸다.



그건 처형이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게 내린, 늦은 심판이었다.








실험적인 단편입니다.

여유분으로 글을 만들던 중, 몇몇 분들께

감정이 너무 직설적이라는 피드백을 받아

가벼운 마음으로 정제되게 슥슥 적어보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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