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지 마음이 서늘하다.
계절 탓이라 말하고 싶지만, 사실은 그리움 탓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다. 가슴 한쪽에서 오래된 바람이 다시 분다. 엄마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지는 때면, 나는 향을 찾는다. 마음을 달래줄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해 아로마 마사지 숍 문을 열었다.
향들이 속삭인다.
다정한 캐모마일, 달콤한 오렌지, 눈부신 레몬, 스치듯 지나가는 장미와 제라늄. 하지만 그 어떤 향도 마음에 닿지 않는다. 혼자 바스러질 것 같은 순간, 라벤더가 찾아왔다. 은은하고 깊은 보랏빛, 마음을 천천히 열어젖히는 향. 그 향이 스며드는 순간, 나는 알았다. 향 하나로 심장이 저릿해지는 건, 그 안에 엄마가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향은 따지고 보면 꽃향기와 거리가 멀었다. 흙내, 연기, 비누 거품, 된장찌개 냄새. 고단한 생활의 냄새들이었다. 그런데 왜 나는 라벤더에서 엄마를 느꼈을까.
척박한 땅에서도 보랏빛 향기를 피워내는 작은 꽃처럼, 엄마의 다정함은 고단한 세월 속에서도 변치 않았다. 짙지도 가볍지도 않은 향으로 주변을 감싸안는 라벤더는, 지친 하루에도, 상처 난 마음에도, 늘 부드러운 온기를 흘려보내는 엄마와 닮았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엄마를 라벤더 향으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라벤더의 보랏빛이 방 안에 번지자, 오래전 엄마의 시간이 차례로 피어올랐다.
촛불이 흔들리던 밤, 엄마는 소리 없이 울었다고 했다. 도시에서 산골로 들어온 서울 여자의 치맛단엔, 어느새 들풀 냄새가 밴 지 오래였다. 세월은 엄마의 손바닥에 굳은살을 피우고, 웃음 사이사이에 주름을 새겼다. 그럼에도 엄마의 마음은 늘 보랏빛 향처럼 다정하고 온화했다.
어느 날,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병실의 하얀 불빛 아래 누워 있는 엄마를 바라보며, 나는 라벤더 향이 가진 또 다른 면을 떠올렸다. 잔잔하지만, 향이 사라진 후에도 부드러운 잔향이 오래 남는.
엄마의 마지막 시간도 그랬다.
“엄마, 나 왔어요.”
그 말을 하고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매번 돌아설 때마다 엄마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가서 일 열심히 해라.”
“이번 주말에 올게요, 엄마.”
약속 같은 변명이 입에서 굴러 나올 때마다, 엄마의 눈빛은 조금씩 멀어져 갔다. 기다림과 체념이 뒤섞인 엄마의 눈빛을 나는 너무 늦게 읽었다.
‘조금만 더 곁에 있을걸, 단 하루라도 모셨더라면…’
칠 년 반 동안 엄마는 하얀 병실에서 계절이 바뀌는 소리를 들으며 긴 이별을 준비했다. 나는 곁에서, 말 대신 침묵으로만 울었다. 기다림과 체념의 세월 속에서도 깊고 부드러운 향기가 엄마 곁을 맴돌았다. 점점 옅어지면서도 끝내 끊기지 않았던 향.
마사지사의 손끝이 어깨를 누르자, 잠들어 있던 기억들이 조용히 깨어났다. 라벤더 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우며 나를 감싸 안았다.
그 향으로 엄마가 내 곁에 온 것 같아 가슴 한쪽이 푸근해진다.
엄마가 부엌 문턱에 서서, 나를 부르던 장면이 떠오른다.
“밥 다 됐다, 어서 와서 밥 먹어.”
그리운 엄마의 목소리가 향처럼 스며들어왔다.
눈가가 뜨거워진다.
“엄마, 보고 싶어요.”
입술에서 떨어진 말이 보랏빛 연기처럼 허공에 흩어진다. 손끝에 남은 향을 맡자, 저녁 들녘에서 돌아와 내 머리를 쓰다듬던 거칠고 따뜻한 엄마의 손길이 되살아났다.
“엄마, 이제라도 이 향기로 당신을 안을게요.”
라벤더 향이 사라지고 난 자리엔 엄마의 온기가 오래 머물렀다.
내 삶의 가장 깊은 곳, 엄마의 향, 라벤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