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 갑자기 회사의 이사 날짜가 결정되었다.
홍대와 상수역 사이에서 고민하던 대표님은 '한강뷰'가 잘 보인다는 이유로 상수역 근처로 이사를 결정했다.
'대체 상수가 어디에 붙어있는 동네지?'
평생 경기도에서만 살아온 나에게 '상수'는 정말 낯선 동네다.
애초에 서울에 가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친구들을 만나거나 어떤 약속을 잡을 때에도 보통 이동이 쉽거나 모두의 중간인 '강남', '잠실', '종로' 등에서만 만나다보니 '상수'는 낯설다 못해 처음 들어보는 곳이었다. 게다가 출퇴근 시간이 늘어난 것, 한 번 더 환승을 해야하는 것이 꽤나 큰 스트레스로 다가와서 '상수'는 가보기도 전에 가기 싫은 장소가 되었다.
상수로 출근한 첫 날, 회사로 가는 언덕배기를 올라가면서 생각했다. '정말 싫다.'
여름과 겨울에 이 언덕을 오를걸 생각하자 한숨부터 나왔고, 대표님이 좋아한 '한강뷰'는 건물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았다. (대표실에서만 잘 보인다.)
회사 근처에 식당이 없어서 도시락을 싸서 다녀야 한다는 점도 불편했다.
그렇게 상수는 나에게 '싫은 동네'로 인식되었다.
봄에서 여름을 지나며 나는 회사에 앉아있을 때면 종종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몇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정치질과 멘탈 약한 대표 사이에서 일어난 회사 내부의 갈등이 극에 치달아 몇몇 사람들이 떠나갔고, 남은 사람들끼리는 단합이 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점점 매출이 하락세로 떨어지면서 회사 내부에 일감이 떨어져가기 시작했고 분위기가 가라앉기 시작했다.
점점 물경력이 되어가는 것에 대한 걱정과 개인적인 일까지 겹쳐 나는 정말로 책상에 앉을 때마다 심연으로 가라앉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나는 회사에서 도망치기로 했다.
날이 좋을 때마다 점심시간에 산책을 하기 시작했다.
때로 너무 힘이 들 때면 오후에 10분 정도 회사를 너무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짧게 걸었다.
망원에서 약속이 잡힐 때면 약속 시간을 맞춘다는 핑계를 대며 굳이굳이 그 길을 걸어갔다.
그렇게 나는 '상수'를 걸었다.
역과 회사만을 오가던 그 길에서 조금 벗어나자 '상수'는 아주 정감가는 동네였다.
은행나무 대신 플라터너스 나무가 서있는 대로변을 걷다보면 낮은 담을 가진 오래된 집과 다세대 주택들이 줄지어 서있는 오래된 동네가 있다. 이 골목을 걷다보면 마주하는 주차된 차 밑에서 쉬는 길고양이들, 삼삼오오 모여서 수다를 떠는 할머니 할아버지들, 아무렇게나 놓여있는 작은 화분들의 모습에서 나는 어린시절의 향수를 느꼈다.
빨간색의 낮은 담이 이어져있고 3층 내지는 4층의 주택이 제각각의 모양대로 서있는 다세대 주택 단지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나는 매일같이 비슷한 또래의 동네 꼬맹이들과 함께 골목 끝에서 끝까지 뛰어노는게 하루 일과였다. 그 시절의 가장 큰 걱정이라고는 '내일 뭐 하면서 놀지, 오늘은 누구네 집에 갈지' 뿐이었다.
동네 어른들이 모두 나와 우리가 뛰어노는걸 구경하고, 맛있는 반찬을 하면 나눠먹고, 부모님이 늦게 들어오시는 날이면 친구네 집에서 저녁을 얻어먹고는 했던 '사람 냄새'가 가득했던 우리 동네.
어른부터 꼬마들까지 우리 골목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지냈던 정감가던 그 골목이 나는 정말 좋았다. 함께 뛰어놀던 친구들과 자전거나 스케이트를 타고 골목을 종횡무진하던 순간들, 서로 예쁜 인형을 갖고 놀겠다고 싸웠던 일, 다같이 소풍가서 사진찍고 놀던 일 등 아주 어릴 때지만 또렷하게 기억에 남는 그 순간들이 나에게 아주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어릴적 살던 동네와 비슷한 느낌의 골목이여서일지, 조용하고 한적한 느낌에서 오는 느낌이 비슷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상수를 걸으며 사람냄새나던 어린 시절의 골목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 시절이 너무나도 그리워졌다.
그 때는 알았을까?
이렇게 삭막하고 건조한 어른이 될 것이라는걸.
힘들고 지치는 순간이 올 때마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고 웃음이 끊이지 않던 그 골목이 그립다.
요즘의 나에게는 '사람냄새'가 나는 그 순간들이 필요한가보다.
낮은 담과 빨간 벽돌의 다세대 주택들 사이를 걸을 때면 나뭇잎 사이로 따스한 햇빛이 스며들고, 이제는 제법 시원해진 바람이 나를 스쳐지나간다. 어린시절을 떠올리게하는 그 골목을 걸으며 그 시절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아직 내 안에는 그 시절의 맑은 내가 남아있다고, 그러니 다시 힘내보자고 스스로를 달래본다.
그렇게 나는 '상수'를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