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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일기장

by Liar

5장. 일기장


가게 한 켠, 빛이 거의 들지 않는 구석에 있는 낡은 나무 서랍 속엔 작은 공책 하나가 숨겨져 있다. 나는 그것을 ‘일기장’이라 부른다.

수선을 마친 후, 손님들이 떠난 텅 빈 가게 안에서 나는 조용히 그 일기장을 꺼내 기록을 남긴다. 처음에는 단순히 손님과 물건을 기억하기 위해 시작했다. 하지만 기록을 거듭할수록, 나는 이 행위가 단순한 기억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님들이 놓고 간 이야기는 종종 내 안에 남아, 쉽게 떠나지 않는 흔적이 되었다. 그 흔적을 담아두는 것이 나의 일기장이었다. 시간이 흘러가도 놓아줄 수 없는 마음들, 누군가의 슬픔과 내가 붙잡지 못한 말들까지, 일기장은 내가 말할 수 없었던 감정들을 대신 품어 주었다.

일기장은 낡은 가죽 표지로 감싸여 있었다. 모서리는 닳아 있었고, 책등에는 세월이 만들어낸 작은 주름들이 있었다. 책을 펼칠 때마다 나는 그 주름을 어루만졌다. 페이지에는 얼룩이 많았다. 커피 자국, 빗물, 그리고 어쩌면 나조차 몰래 흘렸던 눈물의 흔적까지.

늦가을 어느 저녁이었다. 한 노인이 회중시계 하나를 들고 가게로 찾아왔다. 그의 손등은 얼룩지고 주름져 있었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시간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이 시계를 고쳐줄 수 있나요?”

시계는 멈춘 지 오래였고, 유리는 금이 가 있었다. 나는 시계를 받아 들고 물었다.

“오랫동안 사용하신 시계인가 보네요.”

노인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겁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순간에 멈췄어요.”

“하지만 저는 시계를 전문적으로 수리해 드릴 수는 없어요”

“알고 있어요. 하지만 꼭 부탁하고 싶어요. 대신 아버지와 저의 추억 이야기를 같이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업대 위에 시계를 올려놓았다.

멈춘 바늘을 바라보며 나는 시계를 열고 천천히 수선을 시작했다.

노인은 힘겹게 입을 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실... 사실 아버지와 저는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노인의 목소리는 작고 가늘게 떨렸다. 나는 손을 멈추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깊은 눈가에는 오래된 슬픔과 후회가 서려 있었다.

“젊었을 때, 저는 아버지가 지독히 고지식하고 완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늘 제게 간섭만 하고, 제가 원하는 건 모른 척하셨거든요.”

나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시계 뒷면의 덮개를 조심스레 열었다. 오래된 톱니바퀴들이 먼지와 녹으로 멈춰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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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가출을 했던 그날 밤에도 아버지와 심하게 다투었어요. 그땐 몰랐죠. 그게 마지막 대화가 될 줄은.”

노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는 부드럽게 녹슨 톱니바퀴를 하나하나 닦으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몇 년 후, 아버지가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이미 너무 늦었어요. 병실에 도착했을 때, 아버지는 이미 눈을 감으셨고, 손에는 바로 이 시계를 쥐고 계셨죠. 멈춘 시계처럼, 저와 아버지의 관계도 그 자리에서 멈춰버렸습니다.”

나는 작게 숨을 내쉬며 마지막 톱니바퀴를 다시 끼웠다. 조심스럽게 시계의 태엽을 감자 바늘이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쩌면 아버지께선 이 시계를 제게 남기며 말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시간이 다시 흐르길 바란다고. 멈춰버린 우리 관계가 다시 움직이길 원한다고요.”

시계의 초침이 다시금 정확하게 박자를 맞추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부드럽게 유리를 닦고 시계를 닫았다.

“이제, 다시 시간이 움직입니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시계를 받아 들었다. 그는 한참 동안 움직이는 초침을 말없이 바라보더니, 천천히 눈물을 훔쳤다.

“고맙습니다. 이제 저도 멈춰버린 그 순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노인의 어깨가 조금 가벼워진 듯 보였다. 그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가게 문을 나섰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짧게 적었다.

[기록 29 : 멈춰 있던 시간은 다시 흐르기 마련이다. 중요한 건, 늦지 않게 다시 시작하는 것.]

나는 그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일기장을 펼쳐 방금의 이야기를 짧게 적어 넣었다. 펜 끝을 들어 올렸을 때, 내 마음에도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멈춰 있던 것들이 다시 움직이는 순간, 언제나 작은 두려움과 희망이 함께 찾아온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가 고치는 것이 정말 '물건'뿐일까. 손님들은 수선이 필요한 물건을 들고 오지만, 그 물건엔 대개 마음이 함께 실려 있다. 나의 손길이 닿을 때, 그 마음 역시 조금은 회복되기를 바란다.

그날의 노인은 갔지만, 그의 시간은 내 안에 잠시 머물렀다. 마치 시계의 태엽처럼, 나 또한 천천히 감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잊고 있던 나의 기억들, 내가 외면해 온 감정들이 조용히 깨어나는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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