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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기억

by Liar

제4장. 기억


겨울 끝자락의 바람은 아직 이가 시릴 만큼 날카로웠다.

햇살은 낡은 유리창을 비스듬히 통과하며, 바닥에 깨진 유리조각처럼 반짝였다.

가게 안에는 빛보다 더 느린 먼지들이 유영했고, 바늘 하나 움직이는 소리조차 숨죽은 공간 속에 잠겨 있었다.

그날은 유난히 조용했고, 나는 오랫동안 바늘을 들고 앉아 있었다. 실 한 가닥도 꿰지 못한 채.

문득, 종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들었을 때, 문 앞에는 택배 상자가 놓여 있었다.

익숙한 방식이었다. 말없이 물건을 맡기는 손님들이 종종 있었다.

나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열었다.

그 안에는 오래된 가디건 하나가 접혀 있었다.

색이 바랜 니트는 햇빛과 세탁에 서서히 씻긴 듯 희미했고, 소매 끝은 실밥이 풀려 마치 손끝처럼 피로에 지쳐 있었다.

단추 하나가 빠진 자리에는 낡은 실밥이 매듭처럼 남아, 무언가 잃어버린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어딘가에 익숙한 느낌의 가디건 이었다.

그 아래, 작은 메모지 한 장이 따라붙어 있었다.

[혹시, 이건 고칠 수 있을까요? - 은서 드림]

무심결에 메모장 뒤로 보이는 택배 보낸이의 이름이 보였다. ‘김X서’

순간, 바늘보다도 얇은 어떤 것이 심장을 찔렀다.

익숙하면서도 너무 낯선 이름. 시간 속에 묻어두었던 기억의 뚜껑이, 아주 작은 소리로 열리는 느낌이었다.

기억 속에서 은서는 웃고 있었다.

작고 따뜻한 손, 겨울이면 내 손등에 장갑을 덮어주던 사람.

그날도 겨울이었다.

눈이 오던 골목 끝에서, 은서는 내게 낡은 머플러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내가 직접 짠 거야. 예쁘진 않아도 따뜻할 거야.'

머플러는 고르지 못한 실로 짜여 있었고, 중간엔 엉킨 매듭이 하나 있었다.

나는 억지로 웃었다. 어색한 그 매듭을 핑계 삼아 장난을 쳤지만, 그 웃음 뒤로 자꾸만 가슴이 시려왔다.

이유는 몰랐지만, 그 따뜻함이 왠지 오래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그런 걸 느끼는 게 사랑인 줄, 그땐 몰랐다.

우리는 오래 함께하지 못했다.

시간은 아주 조금 우리를 엇갈리게 했고, 말하지 못한 마음들은 차곡차곡 틈을 벌렸다.

그러다 어느 날, 은서는 떠났다. 마지막 인사도 없이.

그녀가 남긴 건 편지 한 장도, 물건 하나도 아니었다.

다만, 내 손에 닿았던 온기.

그리고 내가 놓쳐버린, 말 한마디.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나는 자꾸만 ‘고치려는’ 사람이 되었다.

어쩌면, 가장 먼저 고치고 싶었던 건 헤어짐의 모양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녀를 아주 오래전에 떠나보냈다.

그것이 이별이었는지, 죽음이었는지, 혹은 그냥 시간의 작별이었는지조차도 이제는 선명히 말할 수 없었다.

다만, 나는 그녀를 떠나보낸 뒤 무언가를 고치기 시작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손끝이 떨렸다. 가디건을 펼치려다, 나는 한참을 멈췄다.

이것이 그녀의 것인지, 아니면 그녀와 관련된 누군가의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나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나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슬픔을 수선해주면서도, 내 슬픔엔 바늘을 대지 않았다. 그건 수선사의 자존심이었다.

하지만 그날, 처음으로 나는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누구보다도 침착해야 할 내 손이, 누구보다도 흔들리고 있었다.

가디건을 조심스럽게 꺼내 들었다.

단추를 하나하나 확인하고, 소매 끝의 올을 다듬으며

나는 문득 그녀가 이 옷을 입고 웃던 모습을 떠올렸다.

아니, 어쩌면 그건 내가 만든 기억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잊지 않기 위해 덧씌운 이미지.

며칠이 걸렸다.

나는 그 가디건을 천천히, 조심스럽게 수선했다.

실밥 하나를 정리할 때마다, 마치 내 안의 어떤 헝클어진 감정들도 함께 다듬는 기분이었다.

바늘 끝이 스치면 그와 동시에, 기억의 한 조각이 살을 스치듯 되살아났다.

다 고친 뒤, 가디건을 상자에 곱게 넣었다.

그리고 내게는 드물게, 메모 한 장을 함께 넣었다.

[이 옷엔 따뜻한 기억이 묻어 있었어요. 저도, 잠시 잊고 있던 온기를 꿰맬 수 있었어요. – 수선사]

그날 밤, 나는 가게 한 켠에 오래 비워둔 종이 한 장에 조심스럽게 이름 하나를 적었다.

[은서. 기억 속의 온기. 꿰맬 수 있었으나, 메울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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