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이 될 것인가 달걀이 될 것인가

2화. 이성적인 엄격한 어른과 감정 속 크지 못한 내면 아이

by 아름다운 옥돌

Hook


닭이 먼저? 아니면 달걀이 먼저?

https://youtu.be/B-2XnFvwb_M?si=BoNEj-1-n_2ZJHcW

EBS 지식채널 e,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진정한 설계자는 닭이 아니라 달걀 속 ***?� 과연 오랜 논쟁 끝 밝혀진 생명의 기원은?


닭의 알껍데기를 만드는데 필수적인 단백질인 오보클레딘-17(Ovocleidin-17)은 닭의 난소에서만 생성되기 때문에 닭 없이 달걀은 만들어질 수 없다.
- 2010, 영국 셰필드 대학 -


닭은 더 많은 달걀을 만들기 위한 매개체일 뿐. 진정한 설계자는 닭이 아니다. 생명은 유전자를 전달하기 위한 도구다. 자연은 닭을 탄생시키기 훨씬 전부터 달걀을 만들기 위한 유전적 도구를 가지고 있었다. "지구상 최초의 동물이 나타나기 훨씬 전부터 다세포적 분화 과정이 존재했다."
- EBS 지식채널 e / 오마야 두딘 교수, 스위스 제네바대 -

이처럼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 하는 논제에 대한 고민을 하다 보니 병아리가 되기 전, 닭의 알껍데기는 닭이라는 어른의 자아가 없으면 생성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수정체는 어른이라는 자아를 마주하고 믿을 때 비로소 닭의 알껍데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올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한 발 더 나아가서, 닭을 이성이라는 엄격한 어른의 존재로 대입시켜 보자. 닭이라는 어른의 힘이 나약해져 존재가 희미해졌을 때 닭의 알껍데기에서부터 시작한 자신을 마주한다. 그렇기에 그걸 깨고 나오는 감정이라는 내면의 아이를 무시할 수 없게 된다. 그를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움직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절망한다. 그렇지만 그가 있기에 자기도 움직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자신이 어른인 척하던 아이라는 것에 부끄러워할 수 있게 된다. 주도권을 내어주어 그를 온전히 느껴주어야 지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를 인정해 주고 받아들여주어야 지나가는 폭풍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감정을 모두 느끼는 와중에 자신의 힘이 나약하여 온갖 부정적인 것들이 자신을 이루는 것이 될까 봐 두려워서 또다시 숨어버리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진짜로 사라지게 될까 봐 최소한의 책임만 느끼면서 그가 해소될 수 있도록, 울 수 있도록 놔줬다. 그냥 그러고 보니 그게 다였다. 자신의 힘이 점차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존재를 지킬 수 있는 어른이 되기 위해 그는 감정에서 크지 못한 내면의 아이를 잘 키워서 데려갈 생각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는 껍데기에 봉인된 수정체를 조금씩 느끼고 마주하기 시작했다. 감정 속에 똘똘 뭉친 내면의 아이가 알에서 나오고 싶지만 그의 힘으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기에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자신의 존재를 믿지 못하여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던 것을 인정했다. 그 과정에서 존재의 힘을 믿기 위해 유전적 도구에 의해 태어났던 자기 자신의 뿌리인 수탉과 암탉을 원망하는 시간을 지나 그들을 향했던 원망조차 자신을 살아 숨 쉬게 했던 일부의 시간으로 통합되어 다시 방향이 자신으로 향할 수 있었다. 이 시간들을 지나 균형을 위해 싸워온 수탉이 암탉을 미워하지 않고 때론 힐링을 해주는 존재로서 받아들이고 있었기에 감정의 힘도 믿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수정체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는 필요할 때 자신의 힘을 믿고 닭의 알껍데기를 스스로 부수고 나오는 병아리로 크는 게 최종 목표다. 나는 이걸 감성과 낭만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 감성과 낭만은 이성으로 살아가는 시대에는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그렇기에 외부에서 깨뜨리면 계란프라이로 남거나 사라진다. 깨어지고 구를 때도 어쩔 수 없이 있겠지만 그럴 땐 보듬어주는 알의 품에서 안전하다는 걸 확인받고 돌아오면 된다. 밖에서 깨어졌을 때의 알을 다시 붙이고 스스로 깨어나기 위해서 현실과 돈을 무시하지 않을 수 있어야만 한다는 자연의 이치를 더욱 절실히 깨닫는다. 현실과 돈은 잠시 알로 돌아가도 괜찮다는 이성의 선물이다.


그러므로 결과와 성과를 내어야 하는 외부에서 자신의 껍데기가 깨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다친 채로 몸과 마음을 굴리는 것을 멈춰줘야 한다. 깨지지 않게 하는 게 정답이 아니다. 흔들려서 깨어지기 전에 그를 체크해 주고 알아차려준 뒤에 알껍데기 밖에서 나를 지켜주는 이성이라는 나의 양육자이자 보호자를 믿어야 한다. 그에게 다시 주도권을 넘겨주어야 현실의 법칙 속에서 외부에 발 딛고 서있는 내가 다치지 않을 수 있다. 내면의 세계에서의 상처와 혈흔에 외부의 소금으로 내 상처에 고통을 뿌리는 행위를 방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달걀은 자연의 유전적 도구에 의해서 생겨났지만 병아리가 될지 계란프라이가 될지는 잘 모른다. 그저, 자신이 병아리가 되는 날을 위해 다시 한번 도전하고 살아내는 것뿐. 그렇기에 스스로 알을 깨기 위한 자양분적 시련들을 모두 가지고서 자신의 힘을 믿기에 껍데기를 부수고 나오는 병아리로 크는 게 해피엔딩이자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는 결말일 것이다. 깨고 나올 수 있는 순간을 알고, 그 힘을 올바른 방향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게 그도 성장했다는 증거이자 엔딩이라고 생각한다. 수정체로 되돌아가도 괜찮은 순간들을 나와 있을 때 마음껏 꺼내볼 수 있도록 나만 아는 나를 마음껏 만들어보자.


Process


나의 경우, 이성적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일념 하에 내 몸과 정신을 굴리다가 그 아이가 기준점을 남에게로 맞추며 살아가며 그 기준이 현재의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상황일 때 큰 혼란에 빠지며 탈진했다. 그렇기에 이것의 굴레를 벗어나는 과정을 밟아가며 '나는 나를 사랑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는 날마다 좋아지고 있다'를 주문처럼 소리 내서 말했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와 잠들기 직전을 활용하면 나아지고 싶지 않다는 반항심도 안 느껴지니 효과가 좋았다.

좌절을 겪기 전까지 MBTI 중의 T라고 생각하며 이성적인 부분만을 선호하며 살아왔으나 그저 감정이라는 아이를 펼쳐보고 드러내고 느껴보는 직면을 하는 게 무서워서 억누르고 살아온 사람일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감정이라는 것을 맛보면서 드러내는 게 무서웠다. 그렇게 무서워서 피해버릴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튀어나올 뿐이었다. 감정과 행동의 사이를 벌리는 게 점점 힘들어지며 머리로는 이해가 안 되는 행동들이 자동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면서 내가 약하다고 생각했던 내 모든 모습들이 튀어나와 나를 괴롭게 만들었다. 평소에 돈을 함부로 써버릴까 봐 고민되는 순간들이 많았는데 낯선 공간과 낯선 사람, 낯선 상황에 적응할 힘을 내야 하는 상황에서 같이 밥을 먹은 사람에게 돈을 전송하는 일도 눈앞이 새하얘지며 숫자가 숫자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또한, 숫자를 세면서 그 숫자에 맞춰서 일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평소에는 잘 됐는데 하나도 안 돼서 당황스러웠다. 그 상황에서 따뜻하게 말을 건네는 사람들의 말들이 하나도 안 들어왔다.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상황에서도 반박하나 못하고 그렇게 무너져내렸다. 내 이상한 모습을 내가 구원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하면서 나 자신을 아무것도 모르는 나에게 당해 쓰러졌다.


그렇게 쓰러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를 미워하면서 죽어가던 도중 부족해도 도전 앞에서 힘껏 내 몸을 던졌던 과거의 나의 모습을 좋게 봐주셨던 교수님께서는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하셨다.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상황에서도 강해져야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고, 자신은 무교지만 성경을 읽으며 빠져나왔다는 힌트를 주셨다. 그래서 존경스럽다는 말을 했지만, 내가 그럴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캐치하셨는지 네가 가야 할 길이니 그렇게 대단하다고 느끼면 나아갈 수 없다는 말을 하셨다. 더불어, '동기들에게 너만큼만 하라고 말을 많이 했어. 그러니까 너 진짜 잘 살아야 해'라는 응원도 해주셨다. 그 말들을 계속 곱씹으면서 나는 다시 일어나는 방법을 찾으며 방황하기 시작했다.

강해져야 한다는 말을 계속 곱씹으니 그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반대의 방향으로 핸들을 꺾는 것조차 회피로 느껴지고 이 감정을 직면했지만 인정이 안되니까 전환이라는 생존 본능조차 미워하고 불안 속에 나를 가뒀다. 8톤 트럭에게 그냥 계속해서 발전 없이 나 혼자 들이받고 있었던 것을 깨달았다.


무너진 순간들이 너무 끔찍해서 손이 덜덜 떨리고 잠도 1시간마다 깨고, 진정이 안되고, 뜨거운 물로 손을 씻어도 그 감각이 무뎌져서 그냥 씻게 되었다. 눈이 내려 모든 것을 끝내고 싶어지는 순간에도 추위보단 마음의 추위가 너무 아파서 손이 얼어가는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심각했는데, 불안이라는 감정에서 나를 꺼내기가 힘들었기에 그 순간이 들이닥친 것뿐이었다. 이성적으로 이상한 나를 배제할수록 떠내려오는 큰 파도 같은 감정들이 나를 집어삼키는 상황에서 피를 철철 흘리면서 쓰러져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냐?! 너 이 상황에서 빠져나오는 법 알 때까지 여기 갇혀있는 게 맞아' 라며 무섭고 엄격한 내 안의 어른이 계속 밀어붙이고 있었다.

나는 그 어른의 힘을 빼놔야 했다. 그래서, 어린 왕자라는 책을 곱씹으면서 읽었다. 그러면서 감정이라는 아이를 다뤄줘야 한다는 것을 '어린 바오바브나무는 장미나무와 비슷하지만, 바오바브나무인 게 구분이 되면 씨앗을 규칙적으로 뽑아줘야 해'라는 구절 덕분에 설득시킬 수 있었다. 동시에 데미안을 읽으면서, 내 안의 혼란의 목소리도 다 들어줬다.


이렇게까지 이상해진 것은 사회적으로도 감정은 버린 채로 살아오는 게 효율적이라는 학습을 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 홀로 있을 때조차 감정이라는 아이를 외면했다. 그러나, 감정이라는 아이를 드러내면서 행동하는 것에도 힘이 크다는 것을 우리 윗세대를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감정이라는 아이를 인정하고 마음껏 드러내보기 시작했을 때, 억눌러온 감정이 왜 나한테만 참으라고 말하냐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감정의 총체로써 자신으로 향하는 사랑이 발현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 사랑이 나를 살렸던 순간들을 알아주지 않아서 뿔난 것이다. 장미나무와 비슷하여 뽑아주는 게 귀찮아서 외면해 온 바오바브나무 씨앗의 결과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나의 엄격한 어른은 종료되었다. 그는 '이제는 너도 챙기며 살아가줄게.. 미안해 정말..'이라는 다짐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감정이라는 아이도 성숙해질 기회를 주고 싶어졌다. 아이라는 이유로 너는 어리니까 삐져나오면 안 되는 것이라며 쓰지 않고 싶어 했던 게 나를 체하고 탈 나게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렇게까지 된 이유는 난 감정을 드러내며 살아오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어서 그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해 그 감정들을 읽어가며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느라 내 감정을 내가 읽는 것조차 지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나의 힘은 감정을 느껴서 그걸 원동력으로 이성적인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인데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부정당하니 존재가 지워지는 느낌마저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이성적이고 엄격한 어른도 쓰러진 아이를 둘러메고 달릴 힘을 잃어버린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것조차 억압하는 것은 문제가 되었다. 감정이 흘러가지 못할 때에는 이 감정을 언어화시켜서 이성적으로 그 상황을 넘어가고 혼자 있을 때 그 감정을 곱씹으면서 그 감정이 들게 된 상황을 원망도 해보고 충분히 가슴에서 뜨겁게 차올랐던 그 부분을 느껴주고 넘어가는 게 필요했다. 나 자신과 함께 있을 때는 감정을 느끼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거나 이성적이지 못한 어른이기에 이러고 있는 게 수치심이 든다는 틀에서 벗어나야만 가능했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온 감정들을 폭발시키는 방법은 스스로가 나 혼자 있을 때에 속 시원하게 터놓으면서 할 수도 있지만 나라의 혼란, 타인에게 연대를 하는 방향으로 폭발시키며 해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억누르다가 이상한 방향으로 터트리느니 어차피 분출될 거 건강하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오는 건강한 에너지로 표현되는 게 나에게도 좋았다. 그렇게 사랑을 돌려주었다. 기왕이면 환경에 의해 받은 상처는 환경에게로, 인간에게 받은 상처는 내가 울었던 날들을 지금 걷고 있는 어린 존재에게로 발현되면 감정과 이성의 합작품이 되어갈 것이니 아픈 시간들에 대한 치유가 될 것이다.


고백하자면, 이를 알게 된 난 아직까지도 흔들리지 않고 깨지지 않도록 노력하는 건 쉽지 않다. 특히나 나라고 착각해도 좋을 만큼 가까운 이들의 앞에서는 더더욱. 그러나, 내가 내 몸과 마음을 이 방식대로 사용하기로 한 이상, 그들도 이 방식대로 애써가며 살아가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마음을 다뤄주며 항상 같이 아파할 수 없다는 사실에 사무치게 외로워진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혼자서 있는 시간에도 그들이 없는 시간대에서도 버티는 힘을 기르기 위해 어떻게든 그들의 역할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외로움을 느끼는 순간의 감정조차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렇기에 외로움을 덜어주는 잠시의 순간이 소중하여 나라고 착각해도 좋을 만큼 소중한 그들 앞에서 나도 힘이 되어줄 순간의 기회가 찾아온다. 그날들을 위해 나의 위기와 시련을 이렇게 버텨왔는지도 모른다.


Procedure


과거의 내면아이를 달래주기 위해 울어도 괜찮다며 마음껏 울어도 보고, 울었으니까 좋아했던 맛있는 음식도 한번 먹여줘 보고, 갖고 싶었던 거, 하고 싶었던 거 다 한 번씩 해보기도 하면서 이성의 어른을 울지 말라고 혼내는 엄격한 양육자가 아니라 울어도 보상을 줄 수 있는 성숙하고 안정적인 어른으로 키워나가 보는 것이다. 타인의 앞에서 그 감정들을 책임지라며 꺼내놓는 게 아니라면 인정해 주기 위해 나오는 어떤 감정의 형태든 괜찮다. 나의 상태가 남의 감정을 책임져주지 못하는 상태라는 걸 알게 되니 그들에게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다는 사실이 와닿는다. 그러므로 그 감정들과 함께 있어도 괜찮다는 시간을 스스로와 함께 보내주면 괜찮아졌다. 내 연인, 친구, 가족에게 바라는 게 아니라 내가 나랑 있을 때 스스로 키워보는 것이다. 그들에게 바랬던 것을 나 스스로도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며 사랑해 보는 것이다. 그들이 떠난 시간도 버틸 수 있는 힘을 믿기 위한 여정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의 모든 것을 때려치우고 이것들만을 쫓으면 이성이라는 어른이 빨리 앞서나가고 싶은 마음에 다시 감정을 무시하면서 쌓아 올리느라 몸을 혹사시킬 수 있다. 마음만 느껴도 몸이 긴장되고 아파하는 걸 느낄 수 있는데 그 상태로 다시 몸을 혹사시키면 몸을 믿지 못하는 순간이 온다. 아프지만 아픈 게 맞는 건가? 하며 불신이 가득한 채로 살아가느라 회복시켜 줄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몸이 망가지게 된다. 망가져도 회복하는 방법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힘조차 사라진다.


몸과 마음을 고통 속에 굴리다 보면 한계에 도달하기에 나의 감성과 낭만을 자극할 수 있는 무언가를 곁에 두게 된다. 그렇게 해서라도 현실의 나를 지키기 위해 억압되어 있었던 감정을 다시 살려내지 않으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닌 것을 직감적으로 알게 된다. 그것들에 끌리는 삶을 살며 내가 나로 존재할만한,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감정이 터져 나와 그 감정과 함께 있어도 괜찮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 그러면서 나에게 자주 자극이 되어 움직이는 핵심감정을 마주할 수 있다. 현재의 핵심감정이 어디서 오는지 끌리는, 끌렸던 모든 것들을 뒤져 과거의 나로부터 기인했단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순간이 온다. 그걸 인정하기 싫은 마음까지도 인정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렇기에 몸 상태, 마음상태도 같이 체크해 주며 달래주는 게 필요하다. 막연하게 이걸 알고만 있으면 너무 막막하기 때문에 하루 속에 밥 2회 이상 먹기, 산책하기, 스트레칭하기, 씻기, 글쓰기를 완벽하게 못해도 괜찮다는 걸 느끼면서 하나라도 했다면 칭찬해 주고, 보상해 주고 그러면서 클리어하는 재미를 느끼며 연습해 보는 것이다. 마음적으로는 칭찬을 해주고 현실적으로는 눈에 결과가 보이는 스티커를 달력 옆에 붙여두거나 좋아하는 걸 사주는 행위를 하며 더 크게 재미를 느껴보자.

무의식적으로 밥 먹고 싶을 때 밥을 먹는 게 아니라 먹방을 보며 식욕을 해결하고, 내가 좋아하는 걸 대신해 주는 영상을 보며 대리만족을 느낀다면 그 순간 '아 나는 배고파서 이 영상을 보고 있나? 귀여운 걸 사고 싶나? 그럼 하자.' 라며 마음 따라 몸을 움직여주는 역할이 필요했다. 나의 경우,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이 좋아서 맛있게 먹는 먹방 유튜버들만 골라서 시청하고 있었다. 그렇게 하나씩 따라가며 내 안의 우울은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힘이 약해져만 갔다. 마음이 터져 나와도 괜찮다는 순간이 필요했기에 아파했던 것을 그제야 알게 됐다.


현재의 나를 이해할 수 있게 되면 현재의 나를 이해하기 위해 아파했던 모든 순간들이 하나씩 떠오를 것이다. 그 순간들의 마음을 다 느끼며 혼자 있는 시간에 맘껏 울고, 탓하고, 화도 내보며 비워가다 보면 어느새 현재의 나를 미래로 향하도록 살아가는 열쇠가 손에 쥐어진다. 그렇게 내 삶은 다시 재밌는 것(마음이 시키는 일), 도움 되는 것(마음을 실현시키기 위해 하는 일)을 하기 위한 방향으로 틀어질 수 있게 된다.

이 모든 것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세상에 영향을 받는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세상의 문제 그 자체로 바라보고, 타인에 영향을 받는 나 자신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세상, 타인, 나, 운에 의해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그들도 그렇게 사느라 그런 거겠지 하며 너그러워질 것이다. 그게 안된다면 다시 방향을 나에게로 틀어 이게 이렇게 크게 다가오는 이유는 몸 때문인가, 마음 때문인가, 에너지 부족인가 체크해 보며 현재의 나를 다시 이해해 주고 사랑해 주면 된다. 그러다 보면 나와 나의 사이도 원만해지는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 하루를 만들어내면 삶에 대한 애착도 회복이 되는 걸 경험할 수 있다.


Conclusion


감정을 마주하면서 살아가기로 선택한 이걸 읽는 미래의 나를 포함해서 모든 이들이 대단하다고 하며 이상화시키고 실수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면서 크게 실패한 삶이라고 정의 내리고 자책하며 더 끝없이 가라앉고 끝날까 봐 걱정된다. 나조차 이 길을 걸었던 사람들을 이상화하며 그들에 비해 출발선에 다시 놓인 나를 더 원망하고 그곳에서 나올 생각을 할 용기를 내지 못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버텨가고 있는 삶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다시 닿기 위해 나아져야지 하고 마주하기 시작했을 때, 자꾸 현재보다 더 최악의 상태를 자꾸 찍으며 들이받았는데 그게 맞는 길이고 지름길이었다.

한 사건과 현상에 대해 '이제 됐다.' 하고 넘어갈 수 있도록 한풀이를 제대로 해주자. 완벽할 수 없겠지만 잠깐 느끼고 무섭다고 미뤄두면 회피다! 같은 문제가 다시 떠올라서 고통스러워질 수도 있다. 그러니 풀어주었다면 '이제 됐네.' 하고 넘어가는 지혜도 믿을 수 있게 해 보자. 나아가다 넘어져 우는 건 나아가고 있다는 뜻이니 불안해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나선형으로 성장하고 있으니 같은 자리를 맴돌 때에도 시선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그걸 딛고 다시 올라갈 수 있다고 믿자.


하지만, 고통을 다 느끼면서 내 몸과 마음의 힘을 다시 낼 생각과 마주할 생각이 나지 않는다면 끌리는 것에 흔들리도록 다시 내버려 두다가 돌아오는 것도 필요하다. 도망친 곳에 낙원이 있을 수 있지만 도망친 지점이 더 이상 낙원으로 느껴지지 않을 때 비로소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이건 회피가 아니라 살기 위한 전환이고 이것을 힘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오면 스스로 극단의 상황에 도달할 때 다시 반대를 생각하며 중간으로 돌아올 힘을 믿을 수 있게 된다. 나도 아무것도 표면적으로 이룬 게 없는 나 자신에서 출발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고통스럽다면 쉬어가도 된다. 그래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저 인생이 꼬여간다고 생각할 때, 한 번씩 돌아볼 친절한 지침서가 되어주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손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물 한잔 마시는 것, 몸 한번 씻는 것조차 큰 도전이 될 때, 물 한잔 마시는 건 나를 믿기 위한 한 발자국이었다. 그렇게 작고 작은 한 발자국을 움직이는 지혜가 몸에 쌓여 어느새 큰 곳을 바라보며 나아가고 있는 자신을 맞이하는 기쁜 순간이 찾아왔다. 기쁜 순간이 찾아오고 싶지 않더라도, 찾아올 수밖에 없다. 그렇게 나와의 연결로 세상과의 연결을, 사람과의 연결을 회복해 나갈 수 있었다. 닿지 않더라도 닿는 순간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기대하고 즐기면서 현실을 만들어가는 나 자신을 좀 더 예뻐할 수 있게 되겠지. 이런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내 삶이 더없이 소중하다. 그렇게 오늘 하루를 또 만들어간다. 또다시 찾아올 절망에는 조금 더 빠르게 해답을 찾을 수 있길 바라며 오늘의 인내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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