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거슬러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나요?
'개미 요정의 선물'은 단정하면서도 따뜻한 동양화풍의 그림이 참 아름다운 그림책입니다. 모든 페이지마다 세밀하면서도 정성스러운 그림과 은은한 색채에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이 그림책은 신선미 작가가 전통 채색화 기법으로 완성했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인지 색감과 질감이 독특합니다. 장지에 아교와 백반, 분채로 여러 차례 색을 쌓는 방식으로 완성했기 때문에 글이 없더라도 그림만으로도 전시회를 보러온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이야기는 할머니와 엄마가 사진첩 속 옛 사진을 보며 지나간 시절을 떠올리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예쁘네 우리 엄마, 내 나이쯤 됐을 때인가?" 미소를 지으며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는 이제 사진 속 엄마만큼 나이가 들었습니다. 할머니가 된 엄마는 사진을 보며 아쉬워 합니다.
"너희 엄마가 이렇게 귀여웠는데. 이때는 바빠서 많이 안아주지도 못했단다."
아쉬워 하는 할머니를 위해 아이는 개미요정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요정들은 할머니와 엄마를 위해 '특별한 옷'을 선물합니다. 그리운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투명 장옷'이지요. 이 옷을 입고 할머니와 엄마는 어린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엄마의 소녀시절과 할머니의 젊은 모습. 소중한 순간이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집니다. 서로를 마주한 두 사람은 꼭 안습니다.
"보고 싶었어요."
"사랑한다, 내 딸."
짧고 평범한 한 마디가 마음에 꽂힙니다.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책을 읽고나니 저의 어린시절로 잠시만 다녀오고 싶어집니다. 젊고 서툰 엄마, 따뜻하고 무한한 사랑으로 저를 품어주신 외할머니. 두 분을 다시 만나고 싶어집니다. 엄마는 바쁘고 말이 없었습니다. 술을 좋아하는 괴짜같은 아버지와 사는 게 쉽지만은 않았을겁니다. 엄마의 고단함이 제게도 전해졌습니다. 그래서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다른 모녀지간처럼 마음을 나누는 것은 제게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저 해야할 일을 묵묵히 책임지고 하는 조금은 불안하고 지친 사람. 아기를 낳고 얼마 되지 않아 복직을 해야만 했던 사람. 어린 아이때만 누릴 수 있는 특유의 사랑스러운 모습도 온전히 누리지 못했던 사람. 그래서인지 엄마가 아이를 대할 때 낯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안고 뽀뽀하고 사랑한다고 표현하는 게 어색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사랑을 나누지 못했던 저는 사실 아직도 엄마를 안아드리거나 손을 잡는 게 참 어색합니다. 서로를 생각하며 걱정하고 마음 아파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지켜보거나 다른 이야기로 괜히 주의를 돌립니다.
그때로 돌아가 엄마를 만난다면 그림책 속 딸이 그랬던 것처럼 엄마의 머리를 곱게 빗어드리고 싶습니다. 저리 가라고 저를 귀찮아 하시면 조용히 편지를 써야겠습니다. 엄마가 참 좋다구요. 엄마랑 안고 싶다구요. 엄마가 힘들지 않을 때 나를 한 번 쳐다봐 달라구요.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바쁘지만 내 엄마가 되어줘서 고맙다고, 우리를 생각하느라 인생의 많은 시간들을 그저 참아내지는 말라고 전하고 싶어요. 적고 보니 후자의 말은 아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말은 아닌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개미요정이 제게도 필요합니다. 지금의 제가 어린아이가 되어서 그 시절 젊었던 엄마를 만나야 가능할테니까요.
그저 사랑에 목마른 아이였기에 저 또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받고 싶었지만 내색하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하는 아이였어요. 그랬던 저의 어린 시절과 만난다면 너의 생각을 이야기 하는 게 잘못된 일이 아니라고 말해주어야겠어요. 느껴도 된다고, 표현해도 된다고, 응석부려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할머니. 얼마 전 할머니를 뵈러 요양 병원에 다녀왔습니다. 오랜만에 찾아뵌 할머니는 저를 보고서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셨어요. 유난히 야윈 볼, 핏줄이 튀어나온 쪼글한 손. 한참동안 얼굴을 부비고 안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대신 휠체어에 앉아 계시는 할머니에게 옛날 사진들을 보여드렸습니다. 제 딸들의 손을 붙잡고서 문방구로 나서는 할머니의 뒷모습, 까만 머리에 모시 옷을 입고서 나를 안고 계신 모습을 보여드렸습니다. 혼자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어댔지요.
한 번만 더 건강한 할머니의 모습을 뵐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개미 요정이 실제로 제게도 그런 마법같은 시간을 선물해준다면 꼭 할머니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할머니 생신을 한번도 제대로 챙겨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구요. 늘 받기만 해서 죄송하다고 말씀드릴거에요. 할머니의 사랑으로 제 마음이 채워질 수 있었다고, 채워진 사랑을 아이들에게도 전할 수 있다구요. 이 모든 게 할머니 덕분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할머니가 계셨기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다고 말씀드릴거에요. 그리고 오래오래 할머니를 안고 볼을 부빌겁니다. 아이가 되어서 할머니 옆에서 오랫동안 잠들고 싶어요.
개미 요정의 선물을 독자의 마음 속 그리움을 따뜻하게 안아줍니다. 상처받은 아이를 치유하고 지금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도와줍니다. 소중한 존재와 함께했던 시간을 회상하게 합니다. 잠시나마 소중한 여행을 다녀온 것만 같습니다. 잊고 지냈던 사랑이 제 안에 조용히, 깊게 스며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