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레이놀즈의 '점'
주인공 베티는 미술 시간에 아무것도 그리지 못해서 도화지에 등을 돌린 채 부루퉁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있습니다. 선생님은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보라며 아이를 격려합니다. 그 말을 들은 아이는 잔뜩 화가 난 채로 연필을 잡고 도화지 위에 힘껏 내리꽂습니다.
아이의 엄마이자 교사로 살아가며 많은 아이들을 만나고 있지만 베티와 같은 아이를 만나게 되면 난감해집니다. 어떤 것이라도 괜찮다고 말은 했지만 이렇게 화를 잔뜩 내며 점 하나만 찍는 아이를 보게 된다면 잘했다고 칭찬이 나올 것 같지는 않거든요. 하지만 선생님은 도화지에 베티의 이름을 쓰게 하고 책상 위 액자에 걸어둡니다.
반짝거리는 금테 액자 속 작은 점 하나. 점을 보며 베티는 깜짝 놀랍니다. 그리고 저것보다 훨씬 더 멋진 점을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도 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치고,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한다며 망설이는 다른 아이에게도 용기를 나누어 줍니다. 선생님이 베티에게 한 것처럼 말이죠.
책을 읽으며 어른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결과중심의 성취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럴듯한 무언가를 내놓아야지만 인정받는데 익숙한 우리는 베티의 점을 그냥 지나쳐버릴지도 모릅니다. 이런 식으로 그려보라며 알려줄지도 모르죠. 하지만 선생님은 베티에게 결과를 강요하지 않고, 스스로 시작할 수 있도록 기다려줍니다. 이 기다림과 인정이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펼쳐나갈 수 있는 밑거름이 됩니다.
저 또한 교사이자 두 딸의 엄마로 아이를 기다려주고 인정해 주는 어른인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무언가를 더 주고 싶은 마음과 다른 이들과 비교하는 시선이 낳은 조바심에 아이를 채근하지는 않았는지 부끄러워지네요. '가르치는 자'가 되기는 쉽지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더 어렵다는 걸 책을 읽으며 새삼 느낍니다.
어떤 결과물을 가져오든지 간에 자신의 그림에 이름을 쓰게 하는 행위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믿고 나아갈 용기를 줍니다.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 스스로를 재단하는데 익숙해져 버려 자신만의 색을 잃어버린 세상의 많은 이들에게 우리 모두는 다 예술가라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잘 그리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표현해 보는 것, 그렇게 찍은 점 하나와 아무렇게나 그은 선들 모두가 독창적인 그림이라고 말합니다.
허접함을 이겨내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작할 때 변화는 찾아옵니다. 시작은 미미할지언정 이야기의 끝은 우리 스스로 만들어나갈 수 있으니까요. 포기하지 않으면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니까요.
저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가능성을 지켜보아 주는 따뜻한 시선에 굶주려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내성적이고 소심한 성격에 시선이 집중되면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선생님이 던진 한 마디 칭찬에 하루 종일 심장이 두근거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쓴 일기를 친구들 앞에서 읽어주시며 칭찬해 주셨던 선생님이 계셔서 초등학교 6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썼습니다. 어쩌면 그때의 경험이 지금의 나를 있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쓰는 사람으로 살고 싶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가닿는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가득하니까요.
지금도 이런저런 글을 끄적여보지만 수많은 사람들의 글과 내 것을 비교하다 보면 언제나 작아집니다. 나 같은 게 무슨 글을 쓴다고 노트북 앞에서 한참을 앉아있나 싶지만, 따뜻한 응원을 건네는 그림책을 보면서 마음을 다잡습니다. 어른이 된 지금, 점 하나 찍었다고 액자에 걸어주고 손뼉 쳐 줄 사람은 없지만 꾸준히 쓰다 보면 조금씩 나아질 거라고 믿습니다.
"내가 지금 한 일이 인생에 어떤 점을 찍는 것이라고 한다면 미래에 그것들을 어떻게 이어질지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후 돌이켜 보니 그 점들은 이미 모두 연결되어 있었다."라는 스티브 잡스의 이야기가 떠오르네요.
일단 점 하나라도 찍는 게 중요합니다. 내가 찍은 점 하나가 당장은 뭐가 될지 모르겠지만 먼 훗날 뒤돌아봤을 때 커다란 작품이 되어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보잘것없는 점 하나라도 괜찮습니다. 지금 바로, 마음에 드는 연필을 골라 잡고 점을 하나 꾹 찍어보는 건 어떨까요?
1. 확산적 사고(Divergent Thinking)의 실현
베티가 점 하나에서 시작해 다양한 예술 작품을 창조해 나가는 과정은 토렌스 창의성 검사에서 측정하는 요소들을 보여줍니다. 단순한 점을 크게, 작게, 점 없이 점 만들기와 같이 수십 가지 방식으로 변형하는 유창성과, 독창적, 점 안의 점들로 이루어진 작품에서는 정교성이 돋보입니다.
2. 창의적 환경의 조성
그림책에서 선생님은 창의적 촉진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점이 뭘 말하고 있니?"와 같은 개방적인 질문을 하거나, 작품을 평가하지 않고 이름을 쓰도록 요청하는 모습은 아동이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할 수 있도록 지원해 줍니다. 특히 실패를 성장의 기회로 재해석하는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습니다. 작품이라고 스스로 생각지도 않은 그림을 액자에 걸어줌으로써 아이의 자신감과 창의성이 자라나게 됩니다.
3. 창의성의 사회적 확장
베티가 자신의 경험을 다른 아이에게 전파하는 장면은 토렌스 이론의 창의적 리더십 개념을 보여줍니다. 선생님의 행동이 베티에게 내면화되어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친구를 격려해 주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창의성이 집단 창의성으로 발전하게 되는 순환 구조로 이어지며 '창의성은 가르칠 수 있다'는 토렌스의 주장을 뒷받침합니다.
많은 어른들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습니다. 칭찬이 필요했던 어린 꼬마 예술가들이 책을 통해 작은 용기를 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무언가를 하며 얻는 순수한 즐거움, 나는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 어른들을 보며 꿈꾸는 아이들로 가득한 세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남들과 비교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들을 즐겁게 성취해 나가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좋겠습니다. 아이들이 마음껏 점을 찍을 수 있도록 매일 따뜻한 시선을 담아 칭찬의 말을 건네자고 다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