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시간을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환자분
정신과에서 말하는 '응급'이란 어떤 상황일까요? 통상 응급 환자라고 하면 심정지, 의식 혼미, 대량 출혈, 심각한 외상 등이 떠오릅니다. 정신과에서 가장 응급한 증상은 자살 위험이 높은 경우와 타해 위험이 높은 경우가 있습니다. 덜 응급한 증상 중에는 공황 발작, 자해, 조증, 혼란감 등이 있습니다.
당장 목숨이 오가는 증상에 비하면 정신과의 응급 환자는 비교적 '응급'해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에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충동적인 자살 시도나 폭력 사건이 발생할 수 있고, 혼란스러운 환자분들은 아주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주변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아오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4월의 어느 하루, 당직 시간에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새벽 2시에 문자음이 울렸습니다. 응급실에서 오는 문자음은 다른 소리로 설정했는데, 그 문자음이 정말 싫었습니다. 당직이 아닌 날 다른 사람의 휴대폰에서 그 문자음이 들리면 깜짝 놀라기도 했습니다. 의뢰된 내용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진료 의뢰>
30세 여성분
1주일 전부터 잠을 안 자고 밤에 돌아다님. 쉴 새 없이 말을 함. 1주일 사이에 1000만 원을 씀.
아버지가 데리고 옴. 이전 정신과 진료 본 적 없음
응급의학과 선생님이 먼저 환자를 만나고, 간단하게 문진을 한 뒤에 이렇게 저희에게 의뢰가 됩니다. 응급실 내에는 정신과 환자들을 위한 개인 병실이 있습니다. 병실에는 침대와 보호자가 앉아 있을 의자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습니다. 환자분을 뵈러 내려갔습니다. 병실 문을 열자 환자분이 침대에 앉아 있었습니다. 긴 파마머리, 나이에 비해 어려 보이고, 얼굴이 분홍빛으로 상기되어 있었습니다. 그 옆에 아버지로 보이는 분이 앉아 계셨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정신건강의학과 당직 의사 OOO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제가 물었습니다.
"OOO입니다. 안녕하세요!" 환자분은 큰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같이 오신 분은 OOO님 아버지 이신가요? 같이 이야기하시는 것 괜찮으신가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니요, 아빠 나가 있어." 환자분은 아버지에게 명령조로 이야기했습니다.
"네 그러면 아버님은 잠시 밖에서 대기해 주시겠어요? 감사합니다." 제가 부탁했습니다. 보호자분이 나가시고 병실에 환자분과 단둘이 남았습니다.
"네 오늘 어떤 일 때문에 응급실을 찾아오셨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 네, 제가 응급실은 처음 오는데 오빠가 아니 아빠가 오자 해서 왔어요. 내일 자격증 시험이 있는데 지금 밤에 와서 뭐 하는 건지. 제가 자격증을 따 놓은 게 없어서 취직이 안 되는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그저께 자격증 시험 신청했어요. 자격증은 뭐였더라 생활... 뭐였는데 그냥 안 볼까 봐요 하하." 환자분은 말을 쏟아 내듯이 빠르게 뱉어 냈습니다.
"아 그렇군요. 아버지가 오자 해서 오셨군요. 다른 불편한 건 없으신가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 요즘에 제가 다이어트를 하는데 계속 배가 고픈 거 말고는 괜찮아요 풉. 다이어트 제가 어렸을 때부터 계속했거든요? 8살부터 했다고 하면 믿으실 거예요? 제가 지금 보다 30킬로가 많았던 적이 있어요. 그때는 정말 죽고 싶었어요. 죽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지금은 정말 행복해요. 행복한데 다이어트는 힘들어요." 환자분이 또 말을 빠르게 뱉어 냈습니다.
"아 네, 다이어트가 힘드시군요. 다이어트는 어떻게 하십니까?" 저는 다이어트 약물 복용 여부를 조심스럽게 물어보려고 돌려 질문했습니다.
"아하하하 제가 다이어트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하세요? 그걸 궁금해하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감사해요. 병원에 온 보람이 있네요. 제 다이어트 방법을 들으시면 놀라실걸요? 아무나 따라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선생님도 다이어트를 하고 싶으세요? 제가 특별히 알려드릴 수 있는데. 대신 저 여기서 내보내 주세요. 저 멀쩡해요. 그래 보이지 않나요?" 의도한 것과 다른 대답을 들었습니다.
"아.. 그래요. 누가 환자분이 이상하다고 했나요?" 제가 물었습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이 뭐라고 이야기했는지 환자분에게 물어보는 게 정보를 얻기 좋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환자분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렇죠?!! 제가 이상한 게 아니라까요? 역시 선생님은 정신과 의사여서 그런지 사람 볼 줄 아시네요. 아니 가족이라는 작자가 저를 못 알아보는데 생판 처음 보는 남이 이렇게 알아봐 주네. 그냥 와본 거 긴 하지만 와보길 잘했네요!" 환자분은 또다시 제 의도와 다르게 대답을 했습니다. 저는 좀 더 직접적인 질문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아버지는 왜 오자고 하신 건가요?" 제가 물었습니다.
"아 저희 아빠요? 저희 아빠가 원래 고지식한 사람이라서, 심지어는 어떤 일이 있었냐면 어렸을 때 제가...."
이런 식의 대화가 10번 정도 오갔습니다. 마지막은 환자분의 이야기에 더 이상 집중이 안 되어 그저 환자 분한 말을 30분 넘게 계속 듣기만 했습니다. 유용한 정보가 나올까 기대했는데 특별할 건 없었습니다. 그동안 제가 알아낸 유효한 정보는 환자분이 무직이고, 남동생이 있고, 다이어트 중이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감정도 널뛰는 듯하여 울다가 웃다가 화내기를 반복하셨습니다. 가족들 이야기를 할 때는 화내다가도, 갑자기 지금 상황이 웃기다는 듯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습니다. 한 가지 감정에 머무르지 못하다 보니 공감을 하기도 힘들었습니다. 정보를 얻어내지도, 공감을 해주지도 못한 채 소중한 제 수면 시간만 줄어가고 있었습니다.
어찌어찌 환자분과의 면담을 끝내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아버지에게 가서 상황을 물었습니다. 환자분은 평소에 아주 차분하고 정신과를 다녀본 적도 없었다고 합니다. 최근 3개월 정도는 조금 우울한가 싶었는데, 1주일 전부터 갑자기 이상해졌답니다. 밤에 잠을 안 자고 집안이나 바깥을 계속 돌아다니고, 말이 엄청나게 많아지고 빨라지고, 평소에 안 하던 집안 대청소나 자격증 시험을 여러 개를 동시에 준비하기 시작하기도 했답니다.
보호자에게 들어보니 환자분은 조증 삽화(manic episode)에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사실 경험이 한 번이라도 있었다면 환자분과 면담을 몇 분만 해도 감을 잡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1년 차 때는 경험이 부족하여 영문을 모른 채 1시간을 일방적으로 듣고만 있었던 것입니다. 다음번에는 환자분의 말을 적당히 끊어서 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호자분은 환자분이 입원하길 원했습니다. 반면에 환자분은 내보내 달라고 이야기를 하긴 했지만 아직 입원을 권유해보진 않았기 때문에 의사를 정확히 물어봐야 했습니다. 다시 환자분을 만나러 들어가기 전에 정신과 선배에게 전화하여 상황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전 에피소드에서 정신과 병동의 입원 형태에 대해 간략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강제로 입원시킬 수 있는 기준은 자타해 위험성 및 현실검증력 저하입니다. 절차상으로는 정신과 전문의의 검증이 필요하고, 보호자 2인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현재 환자분은 자살, 타해 위험성이 뚜렷하지는 않았습니다. 문진상 관련 history가 없었고, 면담 중에도 자살이나 타해 생각이 없었습니다.
현실 검증력 저하도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현실 검증력이 떨어져 있는 상황은 주로 정신증(psychosis)이 발생한 경우로, 환청이나 망상 등으로 인해 현실과 증상으로 인한 것들을 구분하기 힘든 상태입니다. 환자분에게는 뚜렷한 환청이나 망상이 관찰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환자분을 그냥 돌려보낼 수도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대로 치료를 받지 않고 두었다가는 조증이 더욱 심각해지는 경우가 태반이고, 그제야 사고를 쳐서 강제 입원을 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단순히 생각해 보면 환자분을 바로 정신과 병동에 입원을 시키고 정신과 치료로 이어 주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자, 그러면 저에게 주어진 역할은 환자분을 설득하는 것입니다. 제가 과연 이 환자분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요? 정신과 선배는 환자분이 심하게 거부하거나 절대 설득이 안될 것 같은 게 아니면 조증 삽화에 있는 경우에는 어찌어찌 설득이 잘 되기도 한다고 해주셨습니다.
누군가 설득을 대신해 주길 바랐지만, 저 밖에 없었기에 제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다시 환자분이 있는 면담실로 들어갔습니다. 환자분은 저에게 아버지와 무슨 이야기를 했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두리뭉실하게 환자분이 요즘에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환자분이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전에 먼저 입원 이야기를 하기 위한 빌드업을 시작했습니다.
"환자분이 최근에 수면 시간이 많이 줄었다고 해주셨던 게 마음에 걸립니다. 아무리 피곤하지 않더라도 잠은 잘 자야 하는 법 아니겠습니까? 병원에 오셨으니 문제가 없는지 확인을 해보고 가시는 게 어떨까요?" 제가 말했습니다. 수면 욕구 감소(decreased sleep need)는 조증 삽화에서 아주 특징적인 증상으로, 다른 증상들에 비해 환자분에게 비교적 설득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아 그래요? 의사 선생님이 그렇다니까 그래야죠. 저도 잠은 잘 자고 싶으니까요." 환자분이 대답했습니다. 걱정했던 것과 달리 긍정적인 반응이 돌아와 정말 반가웠습니다.
"그래요 좋은 생각입니다. 며칠 동안 잠을 거의 못 자면 뇌가 망가질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시간도 늦었고 하니 안정제를 맞고 한숨 푹 주무신 다음에 내일부터 입원을 해서 평가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겠어요?" 저는 안정제 주사와 입원을 직접적으로 권유했습니다.
"아, 안정제 주사요? 안정시켜 주는 건가요? 좋네요! 맞아 볼게요. 아플 거 같은데 흐흐. 입원은 내일 하는 건가요? 아.. 이 좁은 데서 자긴 싫은데. 어쩔 수 없죠. 입원하면 더 좋은 침대 주죠?" 환자분은 신난다는 듯이 대답했습니다. 핀트가 조금 어긋나 있었지만 어쨌건 입원에 동의가 되었습니다.
그렇게 환자분은 입원을 해서 치료를 잘 받고 조증이 많이 가랗앉아 퇴원을 했습니다. 제가 주치의를 맡지는 않았지만, 환자분이 퇴원할 때 저에게 응급실에서 이야기를 잘 들어줘서 감사하다며 인사를 했습니다. 저는 환자분이 저를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억을 하고 있었다니 놀랐고, 한편으로는 저의 1시간 넘는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보람을 느꼈습니다.
환자분을 설득하기 수월했던 것은 앞에 1시간 동안 이야기를 다 들어줬던 것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런 환자분의 모습을 보고 이상하게만 생각했을 텐데, 누군가 이야기를 다 들어주니 환자분도 안도감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집중을 잘 못하긴 했지만 환자분에게는 정신과에 대한 따듯한 경험으로 남은 것 같습니다.
현실적으로 매번 이렇게 이야기를 많이 들어줄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이렇게 작정하고 이야기를 들어줘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등장인물들에 대한 정보와 이야기는 모두 지어낸 것이며 실제 인물과는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