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함과 무감각 사이 그 어디쯤.
요즘은 아무 일도 없는데, 마음이 가라앉는다.
화를 내는 일도 줄었고, 감정이 크게 요동치는 순간도 거의 없다. 마음이 고요하다 못해, 이제는 무덤덤에 가까운 것 같다.
예전에는 좋으면 좋다고 웃었고, 속상하면 화도 냈다. 그게 자연스러운 줄 알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감정에 물살이 사라졌다. 잔잔함이라고 하기엔 조금 이상한데, 평온함이라고 하기엔 어쩐지 공허하다.
무뎌진 기분이랄까...
어쩌면 감정이 적어진 게 아니라,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어서 그런 것 일 수도 있겠다.
사회생활 20여 년. 이쯤 되면 감정이 사라진 다기보다,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생기는 것 같다.
생각 없는 사람들은 내게 말한다.
“이제 좀 담담해졌네.”
“원래 나이 들면 그렇게 돼.”
“그 정도는 이제 아무렇지도 않잖아?”
생각해 보면 틀린 말은 없다. 실제로 웬만한 일엔 예전처럼 요동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건 단순한 ‘내공’이 아니라, 쌓이고 쌓여 무거워진 감정이 굳은 것에 더 가깝다.
억울하고 서운한 감정을 표현해 봤자 “너도 이제 그럴 나이 아니잖아”라는 반응이 돌아오고, 사소한 기쁨을 나누면 “뭐가 그렇게 좋아?”라는 눈치를 받는다. 그래서 그런가. 감정을 꺼내는 일이 점점 줄어들었다.
조금씩, 조용히, 내부로 침잠하는 기분이다.
예민한 게 아니라, 더 이상 반응할 에너지가 없어졌을 뿐이다.
한때는 예민하다는 소리를 자주 들었다. 감정이 풍부했고, 기분이 자주 오르락내리락했고, 작은 말 한마디에도 상처를 받았다.
그런 내가 피곤하게 느껴졌고, 나도 나를 고치고 싶었다. 그런데 지금은, 정말로 덜 반응하게 되어 버렸다. 단톡방에서 누가 말을 무시해도 그냥 넘기고, 억울한 말을 들어도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넘겼다. 거기까지 힘을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게 '성숙' 해서 라기보다는 '지쳤다'는 것에 있다.
분노도, 기대도, 기쁨도 모두 줄어든 채 그냥 일정한 파동 없이 하루가 흘러간다. 그건 나름대로 편하긴 한데, 한편으론 조금… 슬프기도 했다.
감정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기대하려면 에너지가 있어야 하고, 좋아하려면 마음이 남아 있어야 하고, 슬퍼하려면 무너질 여유가 필요하다. 그 모든 게 조금씩 고갈된 지금, 나는 감정을 쓰는 데에도 신중해졌다.
이젠, 감정 하나를 꺼낼 때도
‘이건 정말 표현할 만한 감정인가?’
‘굳이 지금 꺼내야 하나?’
같은, 계산이 먼저 앞서고 만다.
감정을 잃지 않기 위해, 아주 사소한 것에 기대어 본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작은 것에 마음을 건다. 좋아하는 커피잔을 꺼내든다든지, 아무 이유 없이 창밖을 오래 바라보든지, 낯선 음악을 틀고 감정에 스며보는 시간을 만든다.
이런 사소한 일들이, 무뎌진 내 안에 아주 작게 파문을 일으켰다.
감정이라는 건, 거창한 이벤트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매일 마주치는 작은 장면 속에서 조금씩 살아난다는 걸
이제야 배워가는 중이다. 이 나이가 되어서야 말이다.
지금은 내 마음이 반응하지 않을 때 ‘이제 나도 늙었구나’ 하고 웃어 넘기기보다, 잠깐 멈춰서 묻는다.
“지금 내 마음 안에, 무엇이 남아 있지?”
감정이 없어졌다고 느끼는 건 사실은 지친 마음이 스스로를 잠깐 감추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그럴 땐 억지로 감정을 꺼내려 하기보다는 조용히 기다려주는 게 필요하다.
내가 다시 반응할 수 있는 때가 올 거라는 걸 믿으며.
한때의 나는 쉽게 상처받고, 쉽게 설렜다.
그 감정이 너무 벅차서 버거웠지만, 솔직히 그 시절의 내가 조금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