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호박으로 쑨 죽
매년 가을이 되면 어머니는 시장에서 '늙은 호박'을 여러 통 사 오셨다.
둥글고 단단한 늙은 호박은 바로 손질하지 않고 마루 모퉁이나 부엌 장 위, 가구 한쪽에 올려두셨다. 햇빛이 들고 바람이 스치며 시간이 지나가도록 그대로 두었다. 그런 풍경은 우리 집만의 것이 아니고, 많은 집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가을이 깊어지거나 첫추위가 시작될 즈음이 되면, 그제야 호박이 식탁 위로 올라왔다. 어떤 날은 호박지짐이 되었고, 어떤 날은 호박죽이 되었다. 아이들에겐 간식이었고, 어른들에겐 속 편한 음식이었다.
어머니는 호박을 가르고, 안에 든 씨를 깨끗이 씻어 채반에 담아 햇볕에 말려 보관해 두셨다. 군것질이 귀하던 시절이라 호박씨는 우리에게 좋은 간식거리였다. 그때 먹었던 고소한 맛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어머니는 호박의 윗부분을 잘라내고 속의 씨를 긁어냈다. 호박의 부드러운 속살을 숟가락으로 긁어내어 찹쌀가루를 섞어 부침개를 부쳤다. 노릇하게 구워진 호박지짐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하여 맛있게 먹었다. 한 장만 먹기엔 늘 아쉬웠다.
남은 호박으로 어머니는 호박죽을 쑤었다. 호박을 잘라 껍질을 벗기고, 가마솥에 푹 삶았다. 물에 미리 불려둔 찹쌀과 삶아둔 콩, 강낭콩을 넣고 다시 끓였다. 경상도에서는 찹쌀을 갈지 않고 불린 상태로 호박과 함께 끓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호박죽은 늘 조심스러운 음식이었다. 나는 어머니를 돕고 싶어 긴 나무 주걱으로 저어봤다. 호박죽은 끓는 동안 툭툭 튀었고, 한 번 튀면 손등이 뜨거워 깜짝깜짝 놀라곤 했다. 호박죽을 끓이다가 손을 데어본 기억,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것이다.
호박죽이 완성되면 어머니는 동네분들에게 호박죽을 보내셨다. 그 심부름은 주로 우리 집 막내인 내가 했다. 동네분들은 호박죽을 쏟지 않고 잘 가져왔다고 용돈을 주기도 했고, 착하다고 칭찬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 내 마음이 으쓱해지며 좋았다.
# 재료
늙은 호박 800g, 밤 10개, 팥 1/3컵+ 소금 1/3Ts, 찹쌀 1/2컵, 다진생강 1/4Ts, 생수 1.2L
# 요리 과정
늙은 호박을 준비한다.
호박(특히 골)을 흐르는 물로 깨끗이 씻는다.
호박(골 쪽으로)을 크게 썬다.
호박씨와 껍질을 칼로 벗겨낸다.
일정 분량의 호박을 잘게 썬다.
밤을 준비한다.
밤 껍질을 벗겨낸다.(껍질 벗겨진 밤을 마트에서 구입하세요 ㅎ)
밤을 작게 토막 낸다.
냄비에 물을 붓고, 잘게 썰어 둔 호박과 밤을 넣는다.
생강물을 채에 걸러 냄비에 넣는다.
물을 1.2L 넣고, 강불로 호박과 밤을 삶다가 끓으면 중불로 해서 25분간 푹 삶는다. 5분 간격으로 저어주고, 거품을 걷어준다.
삶은 호박과 밤
삶은 호박과 밤을 믹서기에 넣고 30초 간다.
믹서기로 간 호박과 밤
팥을 반나절이상 물에 불린다.
팥을 한번 끓이고, 물을 버린다. 물 2컵, 소금 약간을 넣고 40분 이상 또 끓인다.
삶은 팥
찹쌀을 2시간 전에 물에 불린다.
호박과 불린 찹쌀을 넣고 끓이다가 찹쌀이 익어가면 삶은 팥을 넣는다. 한번 끓고 나면 약불에서 15분간 끓인다(호박죽이 툭툭 튀어 손에 묻으면 정말 뜨겁습니다). 중간에 소금으로 간을 한다.
삶은 호박죽
완성된 호박죽(드실 때마다 소금, 설탕으로 간하세요 ㅎ).
얼마 전 어머니 기일에 일산 부근에 있는 납골당을 다녀왔다. 어머니 생각을 하다가 요즘 같이 추운 날씨에 어머니가 끓여 주시던 '늙은 호박죽'이 문득 떠올랐다. 어릴 때는 추운 계절이 오면 먹던 음식이었지만, 이제는 마음먹지 않으면 끓이지 않게 되는 음식이다.
‘늙은’이라는 말은 이제 내게 그다지 거슬리지 않는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천천히 익은 것들에는 서두르지 않아 얻은 단맛과 풍미가 있다. 그래서 그 맛은 오래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