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갖춰진 체계, 모나지 않은 사람들.
연봉은 맘에 들지 않았지만 그만큼 업무강도가 세지 않았기에
"많은 연봉엔 많은 책임이 따르는 법이지"
라는 생각으로 불만을 애써 눌렀다. 많은 책임을 지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렇게 이직을 밥먹듯이 했던 내가 한 회사를 꾸역꾸역 5년 가까이 다니고 있었다.
육아용품회사 웹디자인팀의 과장으로서.
2024년 연말
회사에선 매출이 안 나온다고 아우성이었다.
인건비 아낀다고 충원도 안 해주는 상황.
대표님은 모든 업무에 AI를 적극 도입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업무에 도움이 되도록 AI를 활용해 보라는 정도로 이해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모든 것을 AI로 해결해서 빠르게 생산성을 높이라는 뜻이었다.
2025년 2월 14일
디자이너 모두가 대표님의 부름으로 회의실에 모였다.
계속되는 압박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우리에게 대표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인이 되려고 하지 말아라. "
그 순간 근원적인 의문이 생겼다.
"나는 이곳에 왜 존재하는가?"
회사에 속한 이상, 나는 회사를 위해 일해야 하는 회사의 부품이다.
'디자인 예쁘게 한다고 시간 쓰지 말고 그냥 AI가 만들어주는 대로 해.'
그래. 할 수는 있어. 그런데 말이야...
창작욕구를 거세당한 디자이너의 존재가, 의미가 있나?
장인씩이나 되려고 한 적은 없다.
고민을 통해 창조해낸 아름다움을 통해 즐거움을 느낄 뿐이다.
그런데 우리의 노력은 무시한 채, 대충 빨리 만들기나 하라고?
더 이상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가 사라졌다.
퇴사.
20대 때와 달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이직을 하고 싶은데 나는 이미 30대 중반이고, 결혼을 했고, 임신계획이 있고...
나를 뽑아주는 곳이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아기 낳고 다니기 좋은 회사잖아.
육아용품 그거 비싼데, 여기선 싸게 살 수 있잖아.
좀만 더 버텨.
그건 그렇지, 그렇지만...
언제 출산을 할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더 참아야 해?
임신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6개월째 소식이 없어 병원 검진까지 다녀왔다.
이미 AI의 물결은 온 회사를 덮치고 있었다.
다른 회사로 간다해도 상황은 비슷할 것이다.
이럴 거면 나 혼자 스스로 독립해야겠어.
버튼은 눌렸고 나는 이곳을 떠날 결심이 섰다.
이제 떠날 날짜만 정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