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의 맛

- 무너진 남자

by 해피마망


남자는 병실을 나와 1층으로 내려왔다.

접수, 수납이라고 쓰인 창구 앞에는 같은 모양의 의자들이 일제히 놓여있었다.

그는 그중 제일 안쪽의 의자에 쓰러지듯 풀썩 앉아버렸다. 차가운 플라스틱의 감촉이 허벅지를 타고 올라왔지만, 몸은 그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자는 두 손으로 자기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마른 얼굴 위로 손바닥이 몇 번이나 오갔다.

남자의 커다란 두 눈에서 흘리다 만 눈물 한 방울이 남자의 여린 손바닥 안에서 조용히 뭉개져버렸다.

"어디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고, 이미 수없이 되풀이해 온 말이었다.

남자는 아내가 자해를 하게 된 이유를 생각하며 눈을 감아버렸다.

"아니, 아내가 아니야."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내는 오래전부터 자신이 지켜주지 못한 사람이었다.

"나는.. 나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어디서부터 이렇게 비틀어져 버린 것일까?"

대기실 맨 안쪽, 사람들이 없는 끝자리에서 남자는 묻히듯 몸을 웅그렸다. 남자는, 두 손으로 턱을 감싸 쥔 채 눈을 감았다. 형광등 불빛이 눈꺼풀 너머로 희미하게 스며들었다. 접수창구에서 오가는 말소리와 누군가의 발걸음이 물속에서 들리는 소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열여덟 살 동갑내기 신부였다.

동그스름한 얼굴, 살짝 눈을 치켜뜨고 웃는 신부의 얼굴을 처음 봤을 때 남자의 마음엔

이미 방망이질이 시작되고 있었다.

귀엽고 장난기 서린 눈매의 맑은 얼굴.

사랑스러웠다.

아껴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처음으로 만난 여자였다. 처음으로 '내 여자'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만져보고 싶었다.

그런데 첫날밤 신부가 기절을 하면서 남자는 어쩐지 신부에게 다가가기가 두려워졌다.

첫날밤도 두 번째 날 밤도, 세 번째 날 밤도.

신부에게 다가가기만 하면 여자는 오들오들 떨면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낮에는 멀쩡하게 말도 하고 대꾸도 잘하던 신부가 왜 밤만 되면 저렇게 떨고 있는지 남자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대놓고 신부에게 왜 그러냐고 물어볼 수도 없었다. 그 시절의 그는, 모르는 것은 그냥 모르는 채 두는 것이 배려라고 믿고 있었다. 그도 그때는 열 여덟 살이었었다.

다행스럽게도 사흘밤이 지나면서 신부의 떨림은 사라졌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자가 선뜻 여자를 만지기가 겁이 났다. 이러다 또 기절하는 거 아닐까 하는 염려가 앞서 생겼다.

그때는 그렇게 지나갔다.

진이를 낳고, 자식들을 다섯이나 낳는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아내 외의 다른 여자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따지고 보면 남자에게 있어서 아내는 첫사랑이었다.

처음으로 만난 여자이고 , 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때도 보고 싶고 그리운 얼굴은 오직 아내뿐이었다.

출장을 자주 다녔지만 남자는 단 한 번도 가정밖을 나간 적이 없었다.

술도, 담배도 하지 않는 그였기에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는 적도 없었다.

그런데 하필 그날...

자신을 접대하겠다는 거래처 사장의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나갔던 저녁식사 자리에서 그는 그만 술 몇 잔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몰라 머릿속이 까매졌다. 그러나 어수선한 방 안을 둘려보며, 뭔지 모를 불안감과, 감전이라도 당한 듯 순간적으로 짜릿한 감각이 자신의 온몸을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끼며 몸서리를 쳤다.

어쩌다 터져버린 그의 리비도는 금단의 열매를 한입 베어 문 하와처럼 급속히 빠져들고 말았다.

집으로 돌아가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보면서 수십 번을 다짐했다. 아침마다 분주하게 꼬물거리는 다섯 아이들을 보면서 "멈춰야 해, 멈춰야 해!"양심의 경고에 괴로워야 했다.

그러나 이미 금단의 열매 맛에 매혹당한 그에게는 정신보다 몸의 욕구가 더 뜨겁게 그를 잡아챘다.

매혹은 무서운 것. 순식간에 치고 들어와 정신없이 육체를 점령해 버리고, 말할 수 없는 쾌감으로 양심을 탈진시켜 버리는 것.

늘 조심스럽던 아내와의 관계에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 사악한 쾌락이란...

남자는 지금 자신에게 들이닥친 이 모든 불행이 자신이 벌인 사악한 행위의 대가라고 생각했다.

그는 이제 자기 자신도 자기를 제어하지 못한다는 무력감에 두려움을 느꼈다.

가정이 파탄 나고,

아내가 자해를 하고,

사업이 무너지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지금도 그는 이토록 끔찍한 리비도의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나를 벌하소서.

지옥의 가장 뜨거운 곳으로 날 내치소서."

그러나 그의 절규는 공허하기만 했다.

집을 나와 미스 손과 함께 지내는 동안도 남자는 수도 없이 기도했다. 벌을 달라고, 끝을 내 달라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의 절망은 그를 돌아가지 못하게 하는 또 다른 올가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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