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 대한 사유

by 김준한

죽음에 대한 사유/김준한


죽음이 두렵지 않다는 것은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죽음을 망각하니 두려움도 망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마치 사회 곳곳에 만연한 안전불감증처럼 모르니깐 두려움에 무감한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죽음의 실체를 알고부터 죽음이 두려웠다. 죽음은 마치 내 어릴 적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버지와 같았다. 공포는 아버지가 출타하고 사라진 후 자유를 만끽할 때 더욱더 깊었다. 곧 있으면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온다는 걸 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면 나는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아버지를 대면하고 나면 후련해졌다. 시간이 가면서 나는 아버지를 대면할 것을 미리 생각하고 아버지가 들이닥치면 어색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것은 마치 내공을 쌓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는 요즘 죽음이란 것도 그렇게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내 인생은 오전을 지나, 오후로 접어들었다. 곧이어 저녁이 올 것이다. 저녁이 오면 공포의 대상이었던 아버지가 들이닥칠 것이다. 그러면 그 아버지를 낯설지 않게 당연한 듯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그 공포를 두려워하기보다는 당당히 맞서기 위해 내면을 다지고 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산불에 그을린 채 돌아온 할아버지 주검 앞에서 처음 만난 죽음은 낯설었다. 그동안 모르고 지내던 그 어떤 낯선 존재를 만난 것처럼, 나는 숫기가 없는 아이처럼 그놈을 정면으로 바라보지 못했다. 자연히 그놈이 어떻게 생겼는지 성격은 어떤지 알 수도 없었다. 그렇게 나의 어린 시절이 흘러가고 20살 무렵 작은 삼촌의 자살 소식을 접했을 때 잊었던 죽음을 다시 대면하게 되었다. 그때는 죽음이 낯설지 않았다. 오래전 헤어졌던 친구를 다시 만난 듯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그때 나는 죽음으로 귀결되는 유한한 인생을 어떻게 후회 없이 살아야 할 것인가를 확실하게 계획했다. 그것은 바로 커다란 꿈을 정하고 오로지 그것을 향해 정진하는 길이었다. 꿈을 이루든 못 이루든 결과는 상관없다. 중요한 건 그것을 위해 정진하며 나아가는 인생의 과정이다. 내일은 죽으니깐 오늘 아무렇게 살자가 아니라 내일은 죽으니깐 오늘 온 열정을 다해 살자가 되어야 한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알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롭고 사랑이 넘칠 거라 믿는다. 영원히 살 것처럼 끝없는 욕심의 노예가 되니 아옹다옹 서로 죽이는 세상이 아닌가. 모두가 죽으러 가는 가엾은 생명이란 걸 알고 서로서로 연민한다면 지옥은 면할 것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잡을 수 있다고 혹은 잡았다고 착각하고 산다. 사실은 우리가 잡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다만 흘러가는 물줄기처럼 순간순간을 흘러갈 뿐인데 사람들은 마치 어딘가에 안주하고 있다고도 착각하고 있다. 불교에서도 중생들에게 매일 화장터를 가라고 했다. 염불이나 불경을 보느니 그곳에 가서 죽음을 대면하면 인생의 답을 얻기가 쉽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꿈에서 깨어나야 한다. 욕망에 눈이 어두워 잠들어 있으니 매일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도 알야채지 못한다. 머지않아 만날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그놈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생각하는 삶을 살면 훗날 그놈 앞에 당당해질 거고 초연해질 것이다. 그것은 곧 자기 평화다.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해 내가 왜 죽어야 하나 아직 죽기 싫어하면 그 자체가 지옥이고 고통일 것이다. 죽음이 어떤 반찬을 좋아하는지 알아야 그놈이 왔을 때 만찬을 내놓을 수 있지 않겠나. 웃으며 죽음 앞에 만찬을 내놓는 자만이 자기 인생의 진정한 승자일 것이다.


2025 내 나이 44세에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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