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k Rothko. 당신에게 닿는 색의 방식
로스코, 좋아하세요?
고백한다.
나는 미술학도였음에도 처음 로스코를 보았을 때 속으로 이 말이 튀어나왔다.
'이게 예술이라고?'
대학생 때, 예술의 전당에서 로스코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갔다. 현대미술의 거장. 너무 유명한 작가라 설렘을 안고 마주했는데, 내 눈앞에 펼쳐진 건
—커다란 직사각형 세 개.
그게 다였다. 다들 감동했다는데, 그 앞에서 아무 감정도 들지 않았다. 감동은커녕 '나만 모르겠는 건가...' 하는 머쓱함이 올라왔다. 그게 로스코와의 첫 만남이었다.
실제로 로스코의 그림은 직사각형 두세 개, 색의 덩어리일 뿐이다. 기호도, 서사도 없다. 심지어 제목도 죄다 'Untitled', 'No.1' 이런 식이라 힌트도 없다. 그래서 처음엔 무척 불친절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 자꾸 떠오른다. 내가 이해했다고 느낀 다른 그림들은 잊혀도, 이해하지 못한 이 그림은 마음에 남는다.
그리고 시간이 조금 흐르면,
그 불친절함이 바로
감정이 스며들 틈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다.
10월을 사랑한다.
10월의 공기엔 색이 없다. 대신, 밀도가 느슨해진다. 여름의 공기가 피부에 들러붙었다면, 10월이 올수록 공기에 여백이 생긴다. 그 여백에서 가을은 말없이 자신을 드러낸다.
로스코의 색면도 그렇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평평하지만 안쪽에서는 감정이 아주 천천히 번진다. 색보다 온도가 먼저 느껴지는 그림. 말이 없어 더 또렷하게 말을 거는 색. 그 앞에 가만히 서 있으면 계절이 바뀌는 순간처럼 마음이 조용히 물든다.
겉을 덮지 않고, 안쪽에서 번지는 색.
설명보다 감각에 가까운 밀도.
그 밀도 안에서 가을로 물든 마음을 꺼내게 된다.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울었다는 사람들은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 사실 로스코의 그림은 보았다고 하기보단, ‘겪었다’고 말하는 게 더 어울린다.
도대체 어디서 그런 감정이 오는 걸까?
미국의 신경과학자 에릭 캔들은 이런 감정의 반응이 뇌의 기억 구조와 연결되어 있다고 말한다.
추상화는 단순한 감각 자극이 아니라, 감정과 기억을 불러오는 ‘하향처리(top-down processing)’를 유도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감정은 위에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안에서 올라온다는 것.
그러니까 추상미술은, 감상자의 뇌를 혹사시키는 미술이다. 보이는 건 적고, 끌어올릴 건 많다. 해석은 감상자의 몫이다. (에릭 캔들의 이론에서 착안한 제멋대로의 요약이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눈은 이 빨간색을 본다. 동시에 뇌는 그 색에 연결된 기억, 감정, 경험을 꺼내든다. 그러니까 이 사각형은 단지 검붉은 면이 아니라,
누구에겐 옷장 속 오래된 겨울 코트 냄새가,
누구에겐 사랑한다 말한 날의 저녁 빛이 된다.
그림은 가만히 있지만, 감상자는 움직인다. 무의식이 안쪽에서 요동치기 시작한다. 우리는 스스로도 몰랐던 감정들을 꺼내어 해석하고, 때론 그 안에서 아주 개인적인 고백을 하게 된다. 나 역시 그렇다. 그의 그림은 조용한데, 그래서 오히려 그 앞에서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이걸 가능하게 만드는 건 이상하게도 무형이다. 추상화는 구상화처럼 “이건 꽃이야”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감상자가 꽃을 떠올릴 만한 조건을 제공한다. 그리고 나머지는 우리 뇌가, 우리의 기억이, 우리의 마음이 채운다.
감정은, 그 틈에서 비로소 솟는다.
감정을 형태로 담지 않는다는 점은 닮았지만,
무형을 드러내는 방식은 다르다.
베이컨은 지하실, 로스코는 사찰에 머문다.
겉모습이란 계속 떠다니는 것(부유)이다.
-Francis Bacon
베이컨은 얼굴을 지운다. 의미도 지운다. 생각보다 감각이 먼저 오도록. 그의 초상은 초상이 아니라, 감정의 폭로다. 들뢰즈는 이를 ‘기관 없는 신체’라 불렀다. 움직이지 않지만, 긴장으로 꽉 찬 상태. 모든 감각이 뭉쳐 있는 덩어리. 말보다 먼저 오는 느낌.
베이컨은 얼굴을 흔들고, 일그러뜨리고, 지워버린다. 형상을 지울수록 감정은 더 원초적으로 남는다. 불편함은 붙잡히지 않는다. 그게 감정의 정체다.
베이컨의 그림은 지하실 같다. 거실에 걸기엔 좀 버겁지만, 어떤 날엔 그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필요해진다.
침묵은 너무도 정확하다.
Silence is so accurate.
-Mark Rothko
로스코 역시 형태를 비워냈다.
하지만 그의 방식은 고요함 쪽에 가깝다. 형상의 자리를 비우고, 색의 밀도로 감정을 누른다. 베이컨이 고통을 흔들며 꺼냈다면, 로스코는 감정을 조용히 앉힌다.
로스코의 그림은 사찰 같다.(사진은 채플이라는 게 조금 아이러니지만, 영적인 감각이라면 통하지 않을까.) 그 앞에 서면 스스로를 내려놓게 된다. 나는 가끔 절에 가는데, 로스코의 그림은 풍경소리처럼 느껴진다. 명상처럼, 감정이 떠오를 틈을 만들어주는 그림. 감정을 새로 만들어 내기보다, 이미 내 안에 있는 마음을 조용히 비춘다.
그림은 감정을 토해내지 않는데—내가 꺼내게 되다니. 감응(感應)일까. 아니면 지각의 일일까.
감정이 꼭 형태를 가져야 할까?
오히려 형태가 없기에 더 깊이 남는 감정이 있다.
베이컨은 감정을 흔들어 꺼냈고,
로스코는 감정을 가만히 앉혔다.
서로 다른 방식으로, 형태 없는 마음을 그렸다.
로스코는 마이크로매니징의 대가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 앞에 몇 센티미터쯤 떨어져 서 있길 바랐고, 특정한 조명 아래에서 보길 원했으며, 심지어 어떤 감정 상태로 바라봐주길 바랐다. 보통 예술가들은 “느끼는 건 감상자의 몫”이라며 거리를 둔다. 하지만 로스코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그림을 그릴 때 느낀 감정을, 보는 사람도 똑같이 느껴주기를 원했다.
예민함일까, 아니면 다정함일까.
나는 후자라고 믿는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 글을 쓰는 사람, 음악을 만드는 사람, 요리를 하는 사람—이런 이들은 언제나 무언가를 ‘보내는’ 사람들이다. 글과 그림을 짓고, 그 안에 마음을 눌러 담고, 그걸 받아볼 누군가를 그린다.
내가 느낀 걸 당신도 느꼈으면 좋겠다고.
그건 아마, 디테일한 사랑의 방식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로스코를 좋아하고,
그를 닮은 사람들을 좋아한다.
로스코의 예민한 다정함에서 가끔 내 모습을, 그리고 그를 닮은 얼굴들을 발견한다.
감정 하나를 꺼내기 전,
마음속에서 열두 번쯤 접었다 펴는 사람들.
상처 주고 싶지 않아서,
말보다 침묵을 택하는 사람들.
받기보다 주는 마음에 오래 머무는 사람들.
누군가는 그런 조심스러움을 마음을 닫은 태도라고 말하고, 감추는 건 진심을 흐리게 만든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그건 오히려 배려의 한 방식이고, 존중에서 오는 조율이라고. 로스코가 45cm 거리를 설정하고, 조도를 조절한 것처럼.
디테일한 사랑의 방식 같은 거라고.
그래서 로스코의 색은 말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림이 조용하다는 건,
너도 마음을 천천히 꺼내도 된다고 해주는 거니까.
말을 건네는 대신 삼키면서.
어느새 보는 이의 마음을 물들이고 있으니까.
나는 이제 말한다.
좋아합니다.
그의 그림도,
그를 닮은 마음들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