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eorgia O'Keeffe. 예술가다운 게 뭔데?
예술가라는 사람은 예민하달까,
변덕스럽달까, 대하기가 까다롭다.
-Haruki Murakami,
『채소의 기분, 바다표범의 키스』
파인애플, 좋아하시는지?
나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더 좋아한다. 그냥 파인애플은 먹다 보면 입안이 따끔거려서. 그래서 파인애플이 먹고 싶을 땐 주로 통조림을 사는데, 보통 제조사는 델몬트 아니면 돌(Dole)이다.
좀 이상한 시작이었나? 그런데 하루키의 에세이에 더 이상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지아 오키프라는 화가의 에피소드. 1938년, 돌 사의 초청을 받고 오키프는 석 달간 하와이에 체류하게 된다. 숙식비용 전액 지원. 대신 조건이 있었다. 광고에 쓸 파인애플 그림 한 장만 그려달라는 것.
그런데?
그녀는 파인애플을 그리지 않았다.
하와이에 있는 동안 오키프는 꽃도 그렸고, 바다도 그렸다. 그런데 정작 파인애플은 한 장도. 결국 돌은 그녀의 뉴욕 집으로 파인애플 나무를 보내며, ‘이걸 그려주세요’ 요청했다. 그래서 탄생한 그림이 바로 이 글 커버의 그림이다.(보시다시피 먹음직한 파인애플은 아니다. 그러나 돌은 이 그림을 광고에 쓸 수밖에 없었다)
나도 이해가 안 가지만, 하루키도 그랬나 보다.
그러니 그런 말을 했겠지?
예민하다, 감정기복이 심하다, 사차원이다...
예술가를 떠올릴 때 따라붙는 단골 수식어들이다. 일종의 클리셰? 공대생에게 체크남방과 너디(nerdy)함이, 공무원에게 꼼꼼함과 어딘지 모를 보수성이 연상되듯, 예술가에게는 감정이 풍부하고, 혼자만의 세계에 사는 사람이라는 스테레오타입이 따라붙는다.
그런 이미지를 전략적으로 활용한 사람도 있다. 앤디 워홀처럼. 가발을 쓰고, 특이한 어조로 말하며, 자신을 하나의 캐릭터로 브랜딩한 인물이다. 대중이 원하는 ‘예술가다움’을 연출하면서.
우리는 종종 예술가에게 복잡한 사연을 기대한다.
파란만장한 서사, 극단적인 감정 표현. 이런 것들은 작품의 진정성을 설명해 주는 요소처럼 여겨진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인물에게 더 깊게 이입하게 된다. 삶이 울퉁불퉁할수록, 그의 작품도 더 진짜 같아서. 하지만 그런 예술가상은, 삶의 굴곡을 예술로 풀어낸 몇몇 인물에게서 비롯됐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렇지 않은 예술가도 있을까?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
페테르 파울 루벤스. 그는 부유했고, 제자들이 줄을 설 만큼 명성을 누린 화가였다. 외교관으로도 큰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지성, 재능, 유머, 관대함까지 고루 갖춘 육각형 캐릭터. 그의 친구는 “그의 수많은 재능 가운데 회화가 가장 하찮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좀 올드한 표현이지만, 엄친아라는 단어가 이토록 어울리는 화가가 또 있을까 싶다.
미켈란젤로의 라이벌,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 산치오 역시 마찬가지다. 두 거장에게 이런 표현이 괜찮을까 싶지만, 고독한 아싸였던 미켈란젤로와 달리 라파엘로는 전형적인 인싸였다. 귀족 전속 화가였던 아버지 밑에서 영재교육을 받았고, 늘 겸손한 태도로 타인에게 귀 기울였다. “왕자 같았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 둘은 후대에도 거장으로 평가받지만,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예술가스러움’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나 역시 한때 이런 완벽한 예술가들이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처럼 결핍이 없어 보이는 예술가에겐, 이런 말도 따라붙는다.
“상상력이 부족하다”, “모범생 그림 같다.”
결핍의 부재가 결핍이라는 말은, 그들이 예술가로서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기대하는 정형화된 서사에 어긋나 있다는 뜻에 가깝다. 빈곤, 격정적인 굴곡 같은 가시적인 스토리들. 하지만 외적으로 결핍이 없어 보여도, 결핍감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정말 결핍이 있어야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걸까?
오히려 루벤스나 라파엘로처럼 안정된 배경이,
더 넓은 감각의 스펙트럼을 열어주는 건 아닐까?
모든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열등감을 갖고 있고,
그것을 채우려는 노력이 인생을 움직인다.
-Alfred Adler
심리학자 애들러의 말이다. 이 말은 예술가에게도 설득력을 가진다. 그는 인간의 창조성이 ‘결핍을 채우려는 상상력’에서 비롯된다고 했는데, 예술은 그 상상력이 섬세하게 작동하는 영역이다.
HSP(Highly Sensitive Person) 개념도 연결된다.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 HSP들은 그 감각을 내면화해 다시 외부로 표현하는 데 강하다. 그들은 감정의 진폭도 크기 때문에, 그 감정을 예술로 승화시키며 균형을 잡곤 한다.
이들에게 결핍은 창작의 내적 동력이다. 애착 손상, 상실, 이해받지 못한 경험들. 이 모든 감정은 무언가를 만들어야만 견딜 수 있게 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문화는 학습을 통해 계층적으로 재생산된다.
-Pierre Bourdieu
우리는 감각이 타고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대부분 노출의 결과다.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이를 문화자본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 예술, 문학, 언어 사용 방식 등은 후천적 훈련을 통해 길러진다는 것.
예컨대, 어릴 적부터 예술작품에 꾸준히 노출된 아이는 자연스럽게 ‘예술적 안목’을 체화하게 된다. 이는 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habitus), 즉 몸에 밴 감각과도 연결된다. 결국 감각은 자본이 만들기도 한다.
결핍과 자본은 대립항이 아니다. 한 사람 안에, 하나의 작품 안에 함께 스며들 수 있다. 결핍은 때로 사유의 깊이를 더하고, 자본이 감각의 스펙트럼을 넓히기도 한다. 우린 그 사이 어딘가에서 나의 예술을 발견한다.
Nobody sees a flower—really—
it is so small, we haven't time.
and to see takes time,
like to have a friend takes time.
아무도 꽃을 제대로 보지 않는다.
꽃은 너무 작고, 우린 너무 바쁘다.
무언가를 본다는 건 시간이 필요한 일이다.
친구를 사귀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Georgia O'Keeffe
조지아 오키프는 뉴욕과 뉴멕시코를 오가며 꽃과 풍경을 그려낸 미국 모더니즘의 대표 작가다. 그녀의 예술은, 보는 태도에서 시작되었다. 꽃 한 송이 들여다볼 여유 없이 바쁘게 사는 시대 속에서, 그녀는 멈춤과 들여다 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바쁜 뉴욕 사람들이라도,
멈춰서 볼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하와이에서 오키프는 파인애플 밭을 무척 아름답다고 느꼈다. 농장 근처에서 지내길 원했지만, ‘여자가 노동자들과 지내는 건 부적절하다’고 거절당했다. 대신 농장은 손질된 파인애플을 그리라며 건넸고, 그녀는 “남자의 손에 만져진 것(manhandled)”이라며 거부했다.
그러니까 파인애플 에피소드는 후대에 각색된 ‘카더라’일 수도 있다. 그런데 처음 하루키의 글을 읽었을 때, 나는 그 이야기가 꽤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그림을 의뢰받아놓고 그리지 않았다는 이야기는 괴짜, 고집스러움, 그 전형적인 예술가다움에 잘 들어맞았기 때문에.
오키프가 파인애플을 그리지 않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그게 그렇게 중요한지도. 솔직히 말하면, 미국에서 처음 본 그녀의 그림 역시 썩 내 취향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난 오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그린 꽃은,
정말 그냥 스쳐 지나가기엔 너무 컸으니까.
무언가를 오래 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빠르고 쉽게 얻을 수 있는 색들이, 삶의 곳곳에 흩뿌려져 있으니까. 그 색들만으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지만, 그건 그만큼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우리가 멈추는 그림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그림이다. 삶이 매끄럽지 않을 때에도, 그 불편함을 텍스쳐로 바꿀 줄 아는 사람이 그려낸 자기만의 그림.
어떤 색으로 그렸든 그런 그림은 빛이 난다.
그래서 우린 매끈하게 프린트된 포스터보다,
울퉁불퉁한 원화 앞에 더 오래 머무는지도 모른다.
We find ourselves
only by looking to what we’re not.
우리는 우리가 아닌 것들을 바라볼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발견한다.
–Paul Auster, 『Moon Palace』
‘내가 아닌 것’을 마주할 때,
우리는 나를 더 선명히 알게 된다.
오키프가 파인애플을 그리지 않은 것도 어쩌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와이에서 파인애플을 끝내 그리지 않은 것.
누구나 스쳐가는 작은 꽃을 크게 그린 것.
그것은 스스로를 응시한 시간이 만든 선택이다.
무엇을 그릴지, 그리지 않을지.
나를 하나씩 발견해가는 일.
그건 예술가만의 일은 아니다.
스쳐가는 풍경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만,
그 안에서 빛나는 조각을 발견하는 일은
오래 멈춰 서서 바라보는 사람만의 것이다.
그 조각을 팔레트에 담아,
자기만의 그림으로 완성해가는 방식.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깊이이자,
어쩌면 ‘예술가다움’이다.
바쁘고 복잡한 하루 속에서,
요즘 여러분을 멈춰 서게 하는 건 뭔가요?
(저는 최근 동물의 숲에 빠져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