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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이걸 꼭 해석해야 되나요?

René Magritte. 의미강박자가 그림과 친해지는 방법

by 한이람




HTP 검사라고 있다.


House-Tree-Person test.

집, 나무, 사람을 그려서 나를 읽어내는 검사.

미술치료라는 걸 배우다 보면 거치게 된다.


나는 대학원 때, 수업 시간에 처음 해봤다. 조를 짜서 익명으로 서로의 그림을 해석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HTP: How-To-Panic



“감정을 참지 않고 바로 쏟아내는 타입이네요.”



완전 아닌데요??????


동기가 해석한 나는, 정.확.히. 나랑 반대되는 사람이었다. 트릴로니 교수의 찻잎점 풀이를 듣던 해리포터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내용을 모르신다면 그냥 엉터리 같았다는 뜻입니다) 완전 끼워 맞추기라고 생각했지만 티를 낼 순 없었다. 분위기를 깰 수는 없었으니까.


결국 나는 그 동기의 해석과,

이론서에 억지로 나를 끼워 맞춰 리포트를 썼다.

그리고 A를 받았다.




디테일 하나 넣었을 뿐인데

마음속 나무옹이까지 읽어내는 해석의 기술이 이 안에 있다.


문제는 거기서 시작됐다. 시간이 남아서 나무에 사과와 옹이를 좀 그려 넣은 것. 미대생의 고질병이랄까. 밋밋하니까 허전해 보여서 디테일 넣으려고. 그리고 나니 꽤 그럴듯해 보였다. 그런데 그게 날 이런 사람으로 만들 줄이야.


유년기의 트라우마가 나무옹이로 나타났네요.


…네?


옹이의 위치를 보면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외부로 분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참지 않고 쏟아내는 편이죠. 또, 성인이 과일나무를 그렸다는 건 퇴행적 기질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요...

(이하 중략. 어차피 계속 비슷한 내용이다.)


그렇게, 시간이 남아돌아 더한 그 옹이와 사과 때문에 나는 감정 직진형 인간으로 재탄생했다. 평온하다 못해 심심슴슴하게 자란 내가 유년기 외상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그날 나는 깨달았다. 그림은 그리는 사람의 무의식을 보여주는 도구이기도 하지만, 때론 해석하는 사람의 무의식이 투사되는 캔버스일 수도 있다는 걸.


그 무의식을 꺼내 예술로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다.




의도는 버리고, 무의식은 입장하세요

당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 예술이 된다. Marcel Duchamp's Fountain Ⓒ James Broad, Flickr


1916년, 취리히. 세계는 이미 한 차례 불에 타고 있었다. 1차 세계대전. 총성과 비명, 폐허와 무너진 이성. 사람들은 믿었었다. 이성으로 구축된 세계는 진보할 거라고. 하지만 전쟁은 그 믿음을 우스꽝스럽게 뒤집었다.


그리고 어떤 예술가들은 선언했다.

이제 의미는 아무 의미가 없다.


다다이즘(Dadaism)은 그렇게, 이성이 무너진 자리에서 시작됐다. 말이 안 되는 콜라주, 의도 없는 낙서, 그림도 시도 음악도 아닌 것들. 모든 무질서함이 예술이 되었다. ‘무의미함의 의미’가 그들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가장 과감한 실험은 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였다. 그는 공장에서 찍어낸 물건에 제목만 붙여 전시장에 세웠다. 그 대표작이 바로, 소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인 작품이다.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술사는 이 사건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다다이즘이 의도를 밀어낸 자리에,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의식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꿈, 환상, 자유연상.


흔히 초현실주의 화가를 말하면 살바도르 달리나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를 떠올린다. 그런데 그들을 비롯해 데이비드 보위, 존 애쉬베리 같은 여러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준 한 사람이 있다.




해석하고 싶은 나를 해석하는 중입니다

Self-portrait (1922) by Giorgio de Chirico, Toledo Museum of Art


세상의 모든 것을 수수께끼로 그려야 하고,
기이한 미술관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Giorgio de Chirico


조르조 데 키리코.


키리코는 니체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니체의 사상을 그림 언어로 옮겨왔다. 세상을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디오니소스 정신, 시간이 되풀이된다는 영원회귀, 각자가 자신만의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관점주의. 이 개념들로 세계관을 형성했다.


그의 그림 속 현실은 비틀려 있다. 각 오브제들은 아무런 연관성 없이 모여 있다. 같은 장소인데 시점이 여러 개고, 낮인데도 그림자는 길게 늘어진다. 그의 ‘형이상학적 회화’는 그런 낯선 시선에서 비롯된 것이다.


Piazza (1913) by Giorgio de Chirico, Museo Nacional de Bellas Artes


그의 그림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시험을 치르는 기분이었다. 해석욕구를 자극하는 도상들이 가득했기에. 기둥, 그림자, 텅 빈 광장, 어딘가를 응시하는 인형. 그 자체로 뭔가 상징적이다. 나 같은 의미강박자들을 자극한다. 저 기둥은 뭘까. 석상은 왜 저기 있고, 그림자는 또 왜 저렇게 길까. 그러다 깨닫는다.


아 또 번역기 돌기 시작해 버렸네.


심리학에서는 이런 걸 ‘인지적 종결욕구(need for cognitive closure)’라고 부른다. 의문이 열리면 닫아야 하고, 질문이 생기면 답을 찾아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나 같은 사람 말이다. 영화 한 편 보고 나오면 해설 최소 세 편은 보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


그런데 키리코는 사실 도상에 대한 해석을 바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원한 건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움, 수수께끼 그 자체였다. 한 마디로 느낌적인 느낌(?).




이것은 제목이 아니다

The Treachery of Images (This Is Not a Pipe) (1929), by René Magritte


마그리트는 더하다.


Ceci n'est pas une pipe.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René Magritte


아니 파이프인데 왜 파이프가 아니래.

키리코가 해석 본능을 건드려 나를 낚는다면, 마그리트는 그 본능 자체를 냅다 꺾어버린다. 이 그림의 제목마저 《이미지의 배반》.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는 이 그림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건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 그림일 뿐이다.
그 아래 문장도 진짜 파이프가 아니라,
‘이것은 파이프다’라고 적어놓은 것뿐이다.
‘이건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썼다고 해도,
그 문장 자체도 실제 파이프는 아니다.
-Paul-Michel Foucault


(나만 한 번에 이해 못 한 거 아니겠지?) 난 이 말을 처음 읽었을 땐 말장난도 아니고 무슨 소리야 생각했다. 말장난 같지만, 핵심은 이거다. 우리는 그림을 보면 ‘진짜 사물’이라고 믿고, 문장을 보면 ‘진짜 의미’라고 착각한다. 하지만 그건 표현일 뿐, 진짜는 아니다.


La Vengeance (1936), by René Magritte


말과 이미지의 관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믿음직하지 않다. 그래서 마그리트는 관습적 사고를 깨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림과 문장을 모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을 보며 “이건 뭐지?”라는 의문을 갖는 순간부터, 나는 이미 해석의 함정에 들어선 셈이었다. 말과 이미지가 모두 진짜를 담보하지 않는다면, 내가 느낀 진짜는 어디 있는 걸까? 어쩌면 기호나 해석 너머의 감각 속에 있을지 모른다.


기호, 의도, 해석.


그걸 벗어났을 때 남는 건 그 앞에 서 있는 나와 그림이 마주치는 순간이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림을 응시하던 나는 어느새 그림을 빌려 나를 들여다보고 있다. 마그리트는 그걸 알려주려던 게 아닐까.


그때 비로소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의미강박자가 그림과 친해지는 방법

L'empire des Lumières (1954) by René Magritte


그림이 보이는 것 너머로 말해주는 게 있다고 믿었다. 인상만으로는 놓치는 게 있을 것 같아서. 그래서 기호를 읽으려 했다. 작가의 시대를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았고, 수수께끼 같은 상징이 의미를 드러내는 순간, 세상이 매끈해지는 듯한 안도감마저 들었으니까.


나는 키리코의 그림에서 상징을 찾고, 마그리트의 그림에선 의심했다. 퍼즐 같았다. 맞춰야 할 것 같았고, 맞추면 무엇인가에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퍼즐은 완성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내가 좇던 기호는, 작가의 뜻보다 내가 품고 있던 질문에 더 가까웠으니까.


누군가는 말한다. 해석은 예술에 대한 복수라고.


하지만 누군가에겐 해석이 예술에 닿을 수 있는 유일한 다리이기도 하다. 감각으로 충분할 수도 있고, 의미를 통해 더 가까이 가고 싶을 수도 있다. 어떤 방식을 택하든, 중요한 건 그 순간의 다.


프루스트의 대작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도 그 무슨 추억 따위를 늘어놓은 책이 아니라 한 남자가 평생 동안 ‘기호’를 해독해 나가는 이야기라는 것, 내가 모르는 그녀만의 세계가 있다고? 그런 거, 인정하고 싶지 않다.

-신형철, 『느낌의 공동체』


표정이나 말투 같은 기호를 통해 사람을 읽는 것.

가능한 일일까?

솔직히 나는 어렵다고 생각한다.


예술도 그렇다. 한때는 해석을 완성해야 예술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예술과의 만남은 수학공식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때로는 해석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그림과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가까이 다가가려다 가장 멀어지는 아이러니처럼.


그저 내가 가진 감각과 인식이라는 렌즈를 통해 그림 앞에 선 나를 보는 일.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근사(近似)한 만남이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말했듯, 삶도 문학도 완전히 정확할 수 없기에— 예술과의 만남 또한 언제나 근사의 실험일 것이다.






그러다 아주 가끔 의미강박자인 나조차 어떤 말도 덧붙이기 싫은 그림을 만난다.


일종의 아웃라이어.


내 어설픈 해석이 첫 만남의 특별한 결을 쪼개버릴까 봐, 차라리 아무 말도 붙이고 싶지 않은 그림. 주석을 다는 순간, 그 무정형의 입자들이 흩어져버릴 것 같아서.



Le page blanche (1967) by René Magritte



There are certain meanings
that are lost forever the moment
they are explained in words.

어떤 의미들은 설명하는 순간 영원히 사라진다.
-Haruki Murakami, 『1Q84』



그렇게, 어떤 그림은 나를 내려놓게 만든다.

읽어내려는 순간 오히려 멀어질까 봐.


내 뒤통수를 때린 모네의 수련처럼.


그런 그림 앞에서는 그냥 멈춘다.

그림 앞에서 합리를 논할 수 없고,

느낌 앞에서 완결을 요구할 수 없으니까.


가끔은 오디오가이드도, 도슨트도 없이

그림 앞에서 그냥 멈춰보는 건 어떨까.

꼭 기호를 통해서만 그림과 대화할 필요 없으니까.


정확하지 않아도 괜찮다.

예술과의 만남은 그런 거니까.


그림 앞에 선 나를 그저 바라보는 일.

그게 내가 그림과 마주치는 방식이다.


그러다 가끔은 말을 걸어오는 그림도 있으니까.


정확하진 않아도, 가장 근사한 방식으로.





왜인진 모르겠는데 좋았던 그림,
만나본 적 있나요?
있다면 남겨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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