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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건 예술이 될 수 없나요?

Takashi Murakami. 귀엽게 진지하면 좀 안 됩니까

by 한이람




도쿄에서의 마지막 날, 긴자 마츠야 백화점 입구.



다카시를 거치면 돔페리뇽도 귀여워진다. 이렇게 :D



기념품이라도 사가려다 문 앞에서 멈춰버렸다.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낯익은 얼굴. 익숙한 캐릭터가 돔페리뇽 뒤에서 웃고 있다.


무라카미 다카시.


몇 달 전엔 서울에 루이비통 카페를 열더니, 이번엔 돔페리뇽?

왜 이 사람은 갤러리 밖에서 더 자주 보이지?


어째 미술관보다 백화점에서 더 자주 마주치는 얼굴이다. 눈에는 익숙해졌는데, 머리로는 그 익숙함이 낯설게 느껴진다. ‘예술’이라는 이름을 붙이자니 머릿속의 어딘가가 삐걱거린다.


너무 대중적이어서?

아니면 너무 귀여워서?

단지 그것 때문일까?




슈퍼플랫, 슈퍼큐트, 슈퍼크리피

Artwork (2021) © Takashi Murakami, Kaikai Kiki Co., Ltd.


이 활짝 웃는 꽃 얼굴, 본 적 있을 거다. 동그란 눈, 찢어지도록 벌어진 입. 어딘가 공허해 보이는 미소.


루이비통과 돔페리뇽, 케이스티파이, 그리고 뉴진스. 그의 작업은 갤러리보다 브랜드 속에서 더 자주 등장한다. 럭셔리부터 스트리트까지, 이질적이라 느껴지는 조합은 오히려 그의 미학을 잘 설명해 준다.


슈퍼플랫(Superflat).

이 단어는 그림이 평면적이라는 의미 뒤에 더 많은 걸 담고 있다. 고급과 저급, 예술과 상업, 순수미술과 오타쿠문화—예술의 계급을 납작하게 눌러버리는 한 방이다.


깊이 없는 평면,

너무 무해해서 불안한 미소,

별생각 없는 반복.


그 납작함 앞에서 우린 묻게 된다.

“이건… 예술인가?”




귀여움은 왜 사유되지 않는가


귀엽고 예쁜 거, 누구나 좋아한다.
본능적으로 눈이 가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진다. 어쩌면 다른 어떤 감각보다 강렬한 도파민을 주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 귀여움, 이상하게 예술에서는 잘 팔리지 않는다. 너무 가볍고, 너무 쉬워 보여서일까?


귀여움에는 공식이 있다.


심리학에서 귀여움은 보통 아기 도식(baby schema)에 기반한 감각이라고 설명된다. 큰 눈, 짧고 둥근 얼굴, 작고 부드러운 신체. 이런 특징은 우리의 돌봄 본능(care-taking impulse)을 자극한다. “귀엽다”는 때때로 “지켜주고 싶다”는 충동으로 이어진다. 즉, 귀여움은 생존과 연결된 반응이다. 그래서 귀엽다는 감정은 즉각적이다.


보고 → 느끼고 → 끝


여기에 사유는 개입하지 않는다. 감상도 비평도 뒤따르지 않는다. 그냥 좋으니까. 귀여우니까. 그런데 예술은 이 감정을 곤란해한다. 예술—특히 현대미술—은 대개 사유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질문을 던지고, 응답을 유도하고, 고민하게 만들어야 한다. 반면, 귀여움은 대부분 의식 이전의 인지적 반응(pre-cognitive)으로 분류된다. 너무 본능적이고, 너무 빠르다.


Miss Ko2 in Jellyfish Eyes (2013) © Takashi Murakami, Kaikai Kiki Co., Ltd.


그럼 귀여움은 그렇다 치고, 이런 이미지가 예술 바깥으로 밀려나는 또 다른 이유는 뭘까?


흔히 “선정적이니까”라는 말이 붙는다. 특히 오타쿠 일러스트 속 미소녀, 미소년은 귀여움과 성적 대상화가 겹치는 지점 때문에 더 곤란한 취급을 받는다. 큰 눈, 작은 얼굴, 비현실적으로 긴 팔다리. 왜곡된 신체는 종종 소아성애적 코드(pedophilic code)로 읽힌다. 그림 속의 몸이 현실과 다를 때, 특히 그 왜곡이 어려 보이게 작동할 때, 캐릭터는 도덕적 의심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고전 누드화도 현실을 그대로 옮긴 건 아니다. 미끈한 팔다리, 구불구불한 허리선. 거기에도 신체의 왜곡과 이상화는 들어 있다. 그런데 왜 하나는 아름다움이고, 다른 하나는 위험함일까? 하나는 예술 애호가의 취향으로 해석되고, 다른 하나는 오타쿠의 욕망으로 취급된다. 하나는 박물관에 걸리고, 다른 하나는 피규어 샵 선반 아래 숨겨진다. 같은 쾌락이라도 어떤 건 예술이, 어떤 건—


그냥 오타쿠 그림이잖아.

라는 낙인이 된다.




그들은 왜 갤러리에 걸리지 못했을까

ASA BORAKE-Chang (2024) ©Takashi Murakami, Kaikai Kiki Co., Ltd.


이런 이미지들은 서브컬처로 분류된다.


페티시, 저급함, 유치함. 모두 ‘귀여움’과 ‘반복된 이미지’에 따라붙는 단어들이다. 작가가 아무리 진지한 메시지를 담아도, 이미 그 프레임 안에 들어갔다면 빠져나오긴 어렵다.


예술은 오래도록 사유와 고상함을 중심으로 해석되어 왔다. 반면 서브컬처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자극적이고 즉각적이다. MSG처럼, 눈에 닿자마자 반응하게 된다. 정형화된 스타일, 반복된 표정, 쉬워 보이는 구도. 그래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철학이 없다고 여겨진다.


그런 건 예술이 아니야.

그렇게 간단히 정리된다.


사람들은 늘 위를 보며 의미를 찾으려 하지만, 더 많은 이야기는 발 밑에서 시작된다. 다카시는 그 아래서 자란 이미지들을 예술로 걸었다. 아니, 애초에 왜 그게 발 밑에 있어야 했는지도 물었다. 어떤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는가는, 만든 사람보다 향유하는 사람의 이미지에 따라 달라진다. 미소년, 미소녀는 늘 “오타쿠의 것”으로 소비된다. 도색, 수집, 그림이라기보다는 상품.


결국 문제는 이거다.

누가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 누가 어디에 걸어두는가. 그리고 예술로 부를 용기가 있는가.


Artworks (2022) © Takashi Murakami, Kaikai Kiki Co., Ltd. Courtesy Gagosian


무라카미 다카시는 걸었다.

누구나 가볍다고 말하는 이미지를.

누구도 가볍게 걸 수 없었던 장소에.


사실 그가 오타쿠의 대변자였는가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많다. 오타쿠 세계에서는 그가 오타쿠 문화를 겉핥기 수준으로 소비했다고 비판하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가 그 문화의 상징을 미술의 문법으로 끌고 들어오면서 얄팍해 보이던 이미지가 전시장의 벽에 걸릴 수 있게 된 건 사실이다.




납작한 것을 진지한 곳에

© Ville de Versailles


예술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다.
-Takashi Murakami


예쁜 건 쉽게 소비되고, 금세 잊힌다. 그 경계를 통과한 몇 안 되는 예외가 바로 다카시였다. 유치하고, 장난 같은 이미지들. 쨍한 컬러, 단순한 선, 복붙처럼 반복되는 기호. 처음엔 미술보단 캐릭터 굿즈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아래 적힌 이름을 보는 순간, 멈칫하게 된다.


Takashi Murakami.

그의 작업은 베르사유 궁에 전시되고, 소더비에서 160억에 낙찰된다. 동시에 칸예와 뉴진스 앨범커버에도 등장한다. 예술과 소비, 럭셔리와 스트리트 사이에 그는 귀여움을 당당히 걸었다.


다카시는 전략가였다. 미국에서 활동을 시작한 이방인으로서 그는 진지함보다 생존이 우선이라는 걸 알았다. 90년대 중반, 에반게리온을 기점으로 오타쿠 문화가 세계적 관심을 받기 시작하던 시기. 그는 그 물결을 빠르게 탔다.


서사보다 이미지, 맥락보다 기호. 오타쿠 문화의 상징들을 말랑하게 포장해 슈퍼플랫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것은 생존법이자, 새로운 미술 언어였다. 우키요에처럼 납작한 화면 위 전통과 대중, 하이와 로우를 구분 없이 쌓아 올린 감각. 이미지 자체보다, 그걸 보는 구조를 뒤집겠다는 전략.



그런데,


다카시는 그냥 이런 수염 난 오타쿠 아저씨잖아.

(저격이 아니라, 그는 스스로 “나는 오타쿠다”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는 프레임의 위계를 전복하고 싶었던 덕후이긴 해도, 그 프레임 자체에는 큰 관심 없었던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바깥에 있던 사람.






굳이 따지자면 나는 그 안에서 살아온 쪽이다.

럭셔리 브랜드에서도 일했고, 정체불명의 인사이동 끝에 비서도 해봤다.


패션계는 예상했던 판이었다 쳐도, 비서로 일했던 곳에서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모두 크록스를 끌고 다닐 때, 나는 “TPO를 지켜달라”는 보스의 요청에 따라 힐을 장착했다. 그런 날 납작한 그림 보듯 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처음 본 사이인데도 말을 놓거나,

되게 인스타 감성이시다~ SNS 많이 하죠?

같은 말을 툭 던지거나(대체 인스타 감성은 뭘까?)

그날의 코디와 함께 블라인드에 소환되기도 했다.


업무 지시를 전하러 다닐 때면, 일 얘기보단 “역시 패디과”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냥 던진 말일지 모르지만, 그런 말들이 쌓일수록 나는 풍경이 되어갔다.


물론 전공이든, 일이든 모든 선택은 내가 한 거다. 그런데 그 선택의 결과가 ‘보이는 것’으로 평가받는 것, 그리고 꽤나 납작하게 보였던 건 예상 밖이었다. 보이는 걸 만드는 일을 해왔지만, 정작 내가 그 구조 안에서 평가받을 줄은 몰랐다. 나이브했다. 내가 만들어 온 무대 위에 나도 피규어처럼 서 있을 줄은 몰랐던 거다.


어느 순간부터 난 회사 밖 일상에서도 한 겹 더 무거운 표정, 한 톤 낮은 목소리를 꺼냈다. 사람들은 남에게 별 관심 없는데도. 혼자 과잉방어하고, 괜히 진지해졌다.


납작해 보이지 않기 위한 방어전.

그럴수록 나와 멀어졌는데 말이다.


왜 그렇게까지 애썼을까.

누가 날 어떻게 보는지는 내 문제가 아닌데.



Untitled (2020) © Takashi Murakami i, Kaikai Kiki Co., Ltd.



—귀여운 건 예술이 될 수 없다?

절반은 맞는 말이다.


이 얼굴이 아키하바라 피규어샵에 서 있든 미술관에 서 있든, 그 앞에 선 사람의 생각을 통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내 태도는 내가 정할 수 있다. 결국 이름은 내가 붙이는 거니까. 다카시가 납작한 걸 진지하게 걸었던 것처럼.


내가 보고 싶은 걸 보고, 나답게 쓰는 것.

누가 뭐라든 내가 예술이라 부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조명도, 제목도 내가 고르면 되니까.



뭐 예술이 아니라면 또 어떤가.

어디에 걸릴지는 몰라도, 블라인드만 아니면 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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