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감정은 점처럼, 예술은 루틴처럼
남편이 핸드폰 케이스를 바꿨다.
노란색으로.
노란색이 나한테 좋대!
사주를 보고 왔단다.
교회를 그렇게 열심히 다니는 사람이,
그 와중에 이건 미신이 아니라 정보라고 우긴다.
(아니 누가 뭐라 그랬냐구)
미신이든 정보든,
제일 예뻐 보이는 걸 골랐다고 한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김환기잖아.
점.
또 점.
그리고 그 점들의 바다.
대한민국 추상미술의 레전드.
색과 점으로 시간을 쌓은 사람.
김환기와 케이스티파이라니.
1970년대 작품이 지금 아이폰을 감싸고 있다니. 묘하게 이질적인데 어울린다. 뭐, 고흐가 우산에 프린트되고 마티스를 키링으로 달고 다니는 세상 아닌가. 생각해 보니 50년 전 그림쯤이야 놀라울 것도 없다.
저녁노을 14-XII-71 #217
이 그림의 제목이다.
무슨 암호 같기도 하죠? 그런데 읽는 공식이 있다. 일-월-년도, 그리고 넘버링. 이 그림은 1971년 12월 14일 완성한 217번째 그림이라는 뜻이다. 그는 하루도 빠짐없이 점을 찍었다. 서서 그리고, 또 찍고, 또 반복했다. 거창한 게 아니었다.
매일 찍는 점 하나하나,
그 점들이 만든 우주였다.
그의 예술은 루틴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새 화포 앞에 선다.
새 화포 앞에 서면 그냥 그림이 시작되어진다.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우리는 하루 중 많은 시간을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살아간다. 방금 내 스크린타임을 확인했는데, 하루 평균 5시간(실화야?). 그러니까 나는 매일 1080x2340개의 작은 점들 속에서 5시간을 사는 셈이다. 터치하고, 스크롤하고, 또 터치하며.
그에 비하면 김환기의 하루는 훨씬 아날로그적이었다. 그는 매일 무려 16시간씩 서서 점을 찍었다. 목에 디스크가 올 만큼, 손목을 버텨내며. 그게 그의 루틴이었다.
흔히 점묘화라 하면 무언가를 묘사하기 위한 점들을 떠올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김환기의 점은 달랐다. 무엇을 그리기 위한 점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로 쌓여가는 점.
기억처럼, 숨처럼, 하루처럼.
그는 면 캔버스 위에 아교를 발라 번짐이 생기게 만들었고, 붓은 동양의 것으로 골랐다. 한지에 먹이 스며들 듯 묽은 유화는 때론 짙게, 때론 투명하게 퍼져나갔다.
점을 찍고, 번짐을 기다리고,
다시 점을 찍고,
그 위에 또 하나의 숨을 얹는 것.
그건 기법이 아니라 감정이었다. 그의 점들은 어떤 경계를 그리는 게 아니라, 퍼지는 마음의 반경 같은 것이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감정이 물을 먹은 듯 캔버스 위로 번져 나가던 순간.
그의 점은 그리움이었다.
뉴욕땅과 떨어진 고국의 밤하늘을,
그는 매일 점으로 잇고 있었다.
루틴이란 뭘까.
흔히 루틴이라 하면 일상, 자기 관리 같은 걸 떠올린다. 반면 예술은 보통, 어떤 순간의 번뜩임이나 감정의 폭발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루틴의 아이콘으로 알려진 무라카미 하루키를 비롯해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은 루틴 속에서 창작을 지속해 왔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예술이 감정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감정은 신경계의 각성과 반응성에서 비롯된다. 흐르고, 요동치며, 방향을 잃기 쉽다. 그러나 루틴이라는 구조는 그 감정을 앉히는 역할을 한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감정 조절 이론(Emotion Regulation Theory)을 보자.
이 이론에 따르면, 사람이 감정을 조절하기 위해 효과적인 전략 중 하나는 ‘예측 가능한 환경’을 만드는 것이다. 매일 일정한 시간대에 특정한 행동패턴이 반복되면, 감정도 그 안에서 일정한 온도로 유지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뇌는 인지 리소스를 효율적으로 분배하면서, 과잉된 감정 반응을 자연스럽게 가라앉힌다.
프로이트는 감정 에너지가 사회적으로 수용 가능한 형태로 변환될 때를 승화(sublimation)라고 불렀다. 매일 반복하는 사소한 루틴도, 그런 의미에서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통로가 될 수 있다. 반복이 창작을 일상으로, 감정을 체계로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까 루틴은 감정을 앉히고,
구조화하고, 배열하고, 쌓고,
결국엔 남기는 일이다.
피카소는 발견이란 말을 많이 쓴다.
그다음엔 파괴란 말을 또한 많이 쓴다.
발견하고 표현하며 그다음엔 파괴해 버린다.
–김환기,『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루틴은 반복의 구조지만, 그 안에는 매일 조금씩 다른 감정이 섞인다. 바로 발견이다. 예술가들은 매일 발견하는 존재다. 발견은 찰나에 일어난다. 감정은 그 순간 피어나지만, 오래 머물지 못한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예술로, 작가들은 글로 그 찰나를 붙든다.
표현하고, 해체하고, 재구성해서—
내 것으로 만든다.
피카소는 이를 “발견하고 파괴하라”고 했고,
김환기는 “전진하기 위한 파괴”라 불렀다.
익숙한 것을 버리는 고통. 피카소는 하나의 얼굴을 정면, 측면, 위, 아래에서 바라본 조각으로 나눈 뒤, 다시 하나의 화면 안에 재배치했다. 형태는 해체됐지만, 감정은 더 선명해졌다. 그것은 파괴인 동시에 창조였다.
그러니까, 감정을 오래 붙드는 가장 역설적인 방법은 그 감정을 한 번 부수는 일이다. 발견은 파괴를 통해 하나의 작품이 된다. 예술은 그렇게 발견의 휘발을 막는 장치다. 표현하고, 무너뜨리고, 재발견하는 과정. 결국 그건 반복된 감정의 기록이다. 그리고 루틴이라는 구조 속에서 가능한 깊이다.
김환기의 루틴에는 그의 몰입을 묵묵히 지켜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아내 김향안이다. 그녀는 이화여대에 다니던 시절, 시인 이상과 결혼했지만 4개월 만에 남편을 보냈다. 사별 후 시간이 흘러 그녀는 김환기를 만난다.
우리는 한 번 만나고는 한 해 가까이 문통으로 교제를 하였다. 편지는 서로를 다정스럽게 접근시켰던 것 같다. 두 번째 만날 때는 우리는 이미 서로가 그리움으로 가득 차 있었고 10년의 지기와도 같이 친밀한 정을 나눌 수가 있었던 것 같다.
-김향안,『월하(月下)의 마음』
김환기는 당시 세 명의 딸을 둔 채 이혼한 상태였다. 쉽게 고백할 수는 없었지만, 대신 자주 편지를 썼다. 다정한 글과 그림을 함께 담아. 한 글자, 한 마디씩 조용히 쌓아 올렸다. 그 편지들은 겹겹이 포개져 어느새 감정의 지층이 되었다.
매일의 말들이 마음의 면적을 넓혀갔고, 그녀는 결국 변동림이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김향안이 되었다. 그의 성과 아호를 빌려, 함께 쌓은 이름 안에 머물렀다. 그곳은 다정한 반복이 만든 온도의 집이었다.
흔히 그녀는 시인 이상과 화가 김환기, 두 천재의 뮤즈로 불린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누군가의 영감이 아니었다. 자신만의 글을 쓰던 작가였고, 그림을 그리던 화가였으며, 무엇보다 김환기의 예술이 계속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든 사람이었다.
김환기가 “내 예술이 세계에서 어디쯤 있는지 알고 싶다”라고 했을 때, 김향안은 혼자 먼저 파리로 날아갔다. 김환기의 그림 슬라이드만 들고서. 불어와 미술사를 배우고, 파리 화단의 주요 인사들과 교류하고, 아틀리에를 구하고, 전시 일정을 잡은 뒤에야 남편을 불렀다.
그녀는 남편이 작업에 전념하도록 백화점에서 판매원으로 일하며 생계를 책임졌고, 김환기가 사망한 후엔 환기미술관을 세워 그의 작품을 지켜냈다. 그녀는 그의 예술을 지키고, 그 의미를 미래로 이은 동반자이자 큐레이터였다.
루틴이란 그런 것이다.
감정을 앉히고, 정리하고,
차곡차곡 쌓아 무언가를 남기는 일.
그들에게 편지가
하루치 감정을 찍는 작은 루틴이었던 것처럼.
주고받은 말들이 겹겹이 쌓여,
기억의 면적을 넓힌 것처럼.
김환기의 하루 속 점들도
모여서 결국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점처럼 이어진 순간의 조각들이
어느새 무늬가 되고,
그 무늬가 세계가 되는 일.
그건 루틴이 만들어낸 가장 사적인 예술이다.
어쩌면 우리는 매일 하루의 점을 찍는 사람들일지 모른다. 대단치 않은 반복이 어느 날 무늬가 되고, 그 무늬가 결이 되고, 마침내 하나의 우주가 된다.
예술은 종종 천재성에서 시작되지만, 감정을 다룰 줄 아는 사람에게 반복은 가장 정직한 재료가 된다. 반짝이는 순간은 점으로 남지만, 반복은 그 점을 세계로 확장시킨다.
매일 한 점, 매일 한 줄.
그것이 쌓여 의미가 되고,
의미가 쌓여 성취가 되고,
그 성취가 예술이 된다.
그래서 루틴은 예술의 밑그림이자,
가장 조용한 방식의 열정이다.
Here's to the fools who dream.
매일 같은 자리,
같은 마음으로 하루의 점을 찍는 사람들에게.
루틴이 만들어낼 조용한 우주를 나는 믿는다.
김환기의 하루가 모여 우주가 되었듯이.